2. 이놈의 모든 것
‘왜 늘 녹차만 마셔?’
‘향이 가장 적잖아. 난 향이 강한 건 싫어해. 사실은 혼합물자체도 싫지만.’
늘 궁금했었다.
항상 같은 차면 지겹지도 않은 건가 싶어서 물어보니 해원 씨는 엷게 웃으면서 커피는 못 마신다고 덧붙였다.
‘원두도 싫어해?’
‘어. 혼합물은 목에 넘어갈 때 느낌도 조금 다르잖아. 목이 칼칼한 거 싫어하거든. 특히 우유 같은 건 질색이야.’
삼 개월쯤 지나자 어느 순간부터 말을 놓게 되었다.
몸을 섞다보니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편하게 느껴지다 보니 그런 탓 같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섹스는 열 번을 채우지도 않고 해치워버렸다.
사실은 첫 데이트에서부터 하고 싶었지만 유현이놈이 다섯 번은 넘기고 하라고 옆구릴 찔렀다.
한번 만나고 말 놈이 아니라 오래 사귈 거라면 천천히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여덟 번째 데이트에서 해원 씨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 전까진 차에서 페팅을 나눴던 게 다였는데 그 날은 호텔 바로 데려 간 것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자자는 뜻이기에 올라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늘 호텔이었다. 모텔도 아니고 호텔, 돈이 아깝지도 않은지 해원 씨는 꼭 호텔로 골랐다.
자기 때문이니까 부담가지지 말라며 비용을 댔으니 상관은 없지만 나한테 무언가 사주는 거 참 좋아했다.
그렇다고 엄청난 고가의 선물을 덥석 안기는 돈지랄은 아니지만 때때로 브랜드제품의 시계나 목도리 등의 선물도 받았고
데이트 비용을 자기가 냈다. 사회인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겉으론 미안한 척 했지만 속으론 브라보를 외쳤다.
꽤 돈을 잘 벌거나 부자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무슨 일 해?’
낮에도 시간이 나면 만나곤 했기에 회사원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다니는 걸 보니 장사도 아닌 것 같고 사업을 하는 것 같아 물어보자 대답이 조금 늦게 나온다.
‘친구들이랑 작은 벤처기업 하고 있지.’
어떤 친구들인지 어떤 업종인지 말을 안 한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내 앞에서 일 얘긴 절대 꺼내지 않는다.
가끔 전화가 와도 다른 곳에 가서 하고 오거나 목소리를 낮춘대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니 알 수가 없다.
궁금해서 핸드폰 문자라도 몰래볼까 했지만 잠금장치를 걸어놔 실패했다.
혹시 날 좋아하지 않는 걸까? 초반엔 미심쩍기도 했다.
하지만 간혹 가게로 꽃 배달이 오거나 학교 앞으로 불쑥 찾아오기도 하는 둥 상냥한 연인의 모습에 의심은 사라졌다.
‘넌 요즘 애들 같지 않아서 좋아. 경박하지 않잖아.’
해원 씨는 간혹 이런 얘길 꺼냈다.
그때의 나는 예의바름20% 무심함30%과 청순함50%로 이루어진 쿨하고 참한 법대생을 연기하고 있었기에 차마 따질 수도 없었다.
해원씨도 그런 나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해서 계속 그렇게 지냈다.
어느 땐 내가 진짜 그런 성격인 줄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가끔은 너무 들끓는 피를 자제하기 힘들었지만 이 수상쩍지만 완벽한 남자에게 밉보이기가 싫었다.
‘개그프로 좋아해요?’
‘별로.’
나와 유현이 환장하고 좋아하는 웃찾사나 개콘 혹은 오락 프로그램 따윈 절대 보지 않는다.
인생 무슨 재미로 사나 싶었지만 ‘나도 별로 안 좋아해요,’ 하며 뻥으로 맞장구 쳤다.
한 달만 만나도 그 사람 성격 대충 파악이 되는데 이 남자는 알 수가 없다.
마치 드라마 같은 곳에 나오는 사람 같다. 인간미가 떨어진다고 해야 되나?
나야 내숭이니 그렇다 치지만 이 시간이 지나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어쩜 그렇게 피곤하게 살 수 있던 건지 이해가 안 간다.
나중엔 지쳐서 점점 시큰둥해지는 나를 해원씨도 눈치 채곤 더 잘해주곤 했다.
관계가 이년이상 지속된 건 그래도 노력하는 구나 싶은 감동 때문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또 해원 씨 생각에 빠져버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가물가물해지는 머릿속에 그 남자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딩동 딩동 야 김수현 딩동 딩동 딩동 쾅 쾅 쾅 딩동 딩동 쾅 야 문 열어 딩동 딩동 쾅 쾅 야 자냐 문 안 열어 딩동 딩동
자고 있던 중, 연속적으로 터지는 벨소리와 과격한 문 차는 소리에 결국 깨고 말았다.
비척비척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윤경헌이다. 놈은 인상을 구긴 채 콧김을 내뿜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차가 왜 저 꼴이야!”
“……아 씨, 왜 지랄이야?”
잠이 덜 깨서 눈을 부비며 귀찮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더욱 언성을 높인다.
“스크래치 났잖아!”
“……엉?”
그러고 보니 주차하다가 벽에 살짝 부딪히긴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야, 이걸 어쩌지?’
‘이 정돈 티 안나.’
하필이면 내가 운전하던 중이었고 3cm 정도의 경미한 스크래치다.
걱정하며 묻자 유현이 놈이 자신만만하게 지껄이기에 괜찮겠지 하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 그거…….”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하자 경헌이 놈은 더욱 인상을 구긴다.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에게 살살 빌었다.
“미안.”
“그걸로 끝? 장난 하냐?”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닌데 봐주면 안 됑?”
“너라면 봐주겠냐?”
아니. 물론 겁나 열 받아서 물어내라고 지랄하긴 하겠지만 넌 돈 많잖아. 봐주면 안 되겠니?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애써 귀여운척하며 물었다.
“……정말 미세하게 긁혔거든? 응?”
눈치 보며 말하자 경헌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역하다.”
씨발, 안 통한다. 그래도 역하다니 너무 하잖아. 나름 귀엽다고 자부하는 인물인데.
“썅! 물어주면 될 거 아냐!”
“아,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때 뒤에서 유현이 놈이 굴러온다. 자다 깨서 그런지 표정이 경헌이놈만큼이나 살벌하다.
“왜 오밤중에 남의 집 와서 소리는 바락바락 지르고 지랄이냐?”
“……같이 사니 둘이 말버릇이 똑같네. 뻔뻔한 것도 그렇고.”
경헌은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유현은 그 말에 인상을 구기더니 다시 뒤돌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야! 어디 가!”
“잘 거야. 니가 실수했으니 니가 물어줘라.”
나쁜 놈, 유현은 방을 쾅 닫아버린다. 틀린 말은 아니니 어쩔 수가 없다.
“카센터 가서 수리비 나오면 말해. 줄 테니까.”
그까짓 거 오만원이면 되겠지 싶어 퉁명스레 내뱉자 경헌은 당연하다는 얼굴이다.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갑부 주제에 치사해라. 아무튼 빌려 쓰긴 했으니 예의상 인사를 던졌다.
“아무튼 졸리니까 가라. 차 잘 썼다.”
“손님이 왔는데 대접도 없냐?”
“빈손으로 온 주제에 따지긴. 물이라도 주랴?”
대접이라니, 그런 우아함 따위 이 집엔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사온 매너 없는 손님 따위는 취급하지도 않는다.
“됐다. 아무튼 다시는 차 빌려달라는 소리하지 마.”
“치사하긴.”
경헌은 열쇠를 받더니 바로 돌아나간다. 그나저나 할 일도 없는 새끼다.
차도 또 있는 주제에 받아가겠다고 진짜로 오다니. 어련히 내일쯤 알아서 갖다줄까봐.
흥하며 콧방귀를 낀 뒤에 나 또한 내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고시 공부를 위해 4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휴학을 했다.
법대생이라고 잘난척 해봤자 막상 1차 시험을 코앞에 두면 다시 고삼으로 돌아가 버리는 기간이다.
“우린 시험 떨어지면 영락없는 밥버러지야.”
유현은 밥맛 떨어지는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이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우리 둘 다 외출 시엔 렌즈를 끼고 집에선 고시생모드로 돌변하기에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뭐 꼭 사시를 안 봐도 상관없잖아.”
“그렇긴 하지.”
취업을 해도 상관없긴 하다.
일차를 떨어지면 학교로 돌아가 취업을 알아봐도 되고 학벌이 딸리는 것도 아니고 편입도 괜찮은 방법이다.
“근데 직업상 미혼은 불리하지 않나?”
“합격만 해봐. 결혼해달라는 애들이 줄 설 텐데 적당히 고르면 되지.”
“그건 싫은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았던 것처럼 얘기한다?”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유현은 비웃는 표정으로 맞받아친다.
하여간 입바른 소리만 하는 새끼,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아침에 일어나 학교 도서관에 가기보단 집에서 편하게 공부하려고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각자 방에 책상이 있긴 하지만 상대가 공부하는 모습을 봐야 긴장감이 생긴다는 이유였다.
저 새끼는 붙었는데 내가 떨어지는 경우를 상상하자면 열의가 치솟는다.
간간히 잡담도 나누고 불시에 퀴즈를 내기도 하며 공부를 했다.
“차라리 사범대가서 임용고시나 볼 걸 그랬나?”
“왜 차라리 군대 가서 말뚝이나 박지?”
“안 돼. 꼴려서 총 대신 딸 잡으라고 하고 머리 박는 대신 좆 박으라고 할 거야.”
“게이 부대를 만들 셈이냐?”
쾅! 이런 얘기를 지껄이며 법률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놈이 드디어 참다 참다 폭발했는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쾅 두들긴다.
“너희들 제박 닥치지 못하겠냐?”
나와 유현은 동시에 픽 웃음을 흘렸다. 우리 도련님께선 이런 종류의 음담패설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사실 일부러 그런 거지만 시침 뚝 떼고 다시 공부하는 척을 하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이 새끼들이!”
“공부하는데 조용히 해줄래?”
“용건 끝났으면 갈 것이지 왜 그러고 있는 거래?”
차 수리비 받으러 와서는 계속 안 가고 개기고 있는 경헌이었다.
정확히 삼일 뒤에 수리비 받으러 오다니 진정 치사한 놈이다.
그리고 여행 뒤에 본격적으로 공부 좀 하려고 하니 방해질까지 두루두루 재수 없는 짓만 골라한다.
“나가자고 했잖아.”
“어딜 가자고.”
자꾸 옆에서 보채니 귀찮다.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묻자 경헌이 냉큼 대답한다.
“아무데든. 더워 죽겠는데 집에만 쳐 박혀 있고 싶냐?”
“공부해야 되는데?”
“하루안하면 죽냐?”
“그건 아니지만.”
“내가 쏠 테니 가자.”
“……어디 간다고?”
쏜다는 말에 휙 고개가 돌아간다.
“더운데 강바람이라도 쐬자고.”
“혼자 갈 것이지 귀찮게 하기는.”
비굴해 보일까 괜히 추임새를 넣었다. 어깨를 벅벅 긁으며 대답하자 경헌이 그럼 나가자며 손짓을 했다.
어느새 일어난 유현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재빠른 놈이라며 속으로 혀를 차고 나도 내 방에 들어갔다.
“어디 가?”
“옷 갈아입으러 간다.”
추례한 몰골로 외출할 순 없어 방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유현 역시 나와 비슷한 모습이다.
둘이 화장실에서 사이좋게 렌즈를 갈아 끼고 머리만 손봐서 나오자 경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 씻냐?”
“아침에 씻었어.”
곧 우리 셋은 사이좋게 경헌의 스피드스터에 올라탔다.
유현이 쪼르르 뒷좌석으로 가서 눕는 바람에 내가 조수석에 탔다.
“어디 가게?”
“어디 가고 싶은데?”
안전벨트를 하며 묻자 경헌은 백미러를 보며 되묻는다.
“……글쎄.”
한강 가긴 뭐하고 가까운 청평이나 강촌 같은 데를 갈까 고민했다.
그때 유현이 벌러덩 누운 자세 그대로 손을 휘휘 저으며 외친다.
“야, 거기 가자.”
“어디?”
“선유도! 나 한 번도 못 가봤어.”
선유도라면 데이트와 나들이 명소였다. 일산 호수공원보단 낫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데 가봤자 귀찮으니 거기 가자.”
“……쯧.”
경헌을 혀를 차며 운전대를 몰았다.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겨우 한강에 있는 조그만 섬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곳곳에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소풍 나온 가족이나 연인들도 많이 보인다.
섬 내부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놔서 제법 봐줄만했다.
그곳에서 우리 셋은 뻘쭘하게 강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구경하려고 해도 워낙 좁아서 금세 끝나버렸고 나가자니 딱히 할 일도 없고 괜히 벤치에 앉아 흡연만 하는 것이다.
평범한 남녀연인들이 손을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동시에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남자가 아깝다.”
유현은 담배를 입에 문채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여자는 별로지만 남자는 괜찮아 보인다.
나와 경헌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게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게이라도 미녀에겐 약하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고 담배를 끈 후에야 자리에서 미적미적 일어났다.
왠지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그래도 남자 둘이 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것은 남자 둘이다.
여자들끼리 오면 몰라도 남자 둘은 무언가 굉장히 빈곤해 보이고 수상쩍어 보이니까.
“밥이나 먹자.”
“어디서?”
내 말에 유현이 대꾸를 한다. 아무데서나 먹자며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차에 타자 경헌이 시동을 걸며 제안을 한다.
“이 근처 말고 다른데 가자.”
“그래라.”
어차피 경헌이 놈이 쏴야하니 아무 곳이나 상관없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유현이놈과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고 경헌이놈과 틱틱거리기도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곧 하나의 문제로 떠들기 시작한다.
“고시준비에 토익 공부까지 하려니 대갈빡 터지겠다.”
“누가 아니래?”
“난 텝스로 하려고 하는데 630정 정도면 된다더라.”
역시 법대생이다 보니 고시문제가 대화의 주를 이룬다. 경헌은 주로 묵묵히 듣기만 한다.
잘사는 놈이다 보니 이 판국에도 여유가 흘러넘치나 싶어 괜히 배알이 꼴린다.
“좋겠다. 누구는 집에 돈 많아서 취업걱정도 안 하고.”
“그러게. 나도 갑부 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네.”
“이것들이 왜 툭하면 시비야?”
경헌은 우리가 한마디씩 놀려대자 눈을 치켜뜨며 짜증을 부렸다. 왜 그러긴, 부러워서 그러지.
누구는 좋은 집에서 태어난 데다 원판까지 훌륭하고 머리도 좋고 좋은 차 끌고 다니고 자격지심이 안 생길 리가 없잖아.
다른 놈들도 아마 마찬가지의 생각일 거다. 하지만 대놓고 비웃는 건 나와 유현뿐이다.
남녀노소 다들 윤경헌에게 잘 보이려고 발악을 하지만 우린 그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
거침없이 바보취급을 하며 삥만 뜯는다.
‘어이, 갑부. 밥 한 끼 쏘지?’
‘어이. 재벌3세. 술 한 잔 쏘지?’
‘이 거지새끼들…….’
학기 중에도 늘 경헌만 마주치면 어떻게든 한 끼 얻어먹겠다고 나와 유현이 들러붙었다.
경헌은 그런 우리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결국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우리 셋이 다니게 되었다.
더우니 냉면을 먹기로 하고 경헌이 추천한 곳으로 가는데 전화가 울린다.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액정엔 희한한 번호가 적혀있다. 보통 땅 사라는 전화 아니면 광고다.
수신보류를 누르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왜 안 받아?”
옆에서 바라보던 경헌이 의아한 듯 물었다.
“……광고야.”
“아아.”
경헌은 담뱃재를 창문 밖으로 털며 다시 고래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잠시나마 가슴이 철렁했던 게 부끄러웠다. 경헌이 좌석 사이에 쳐박아 놓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담배를 깊이 빨자 두근대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다.
차 안이지만 창문을 열어놓으니 에어컨이 없어도 강바람 덕에 시원했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공부하는 것 보단 낫다.
“오랜만에 클럽이나 갈까?”
식사를 다하고 유현이 제안했다.
계란 노른자를 건지느라 정신없던 나와 매운 비빔냉면을 시켜 연신 물만 들이키던 경헌의 시선이 휙 돌아간다.
클럽이라니, 혹시 우리가 자주 갔던 그곳 말인가?
유현은 이미 다 비운 그릇을 치워놓고 히죽거리며 다시 물어온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등한시 했잖아. 오랜만에 몸 풀러 갈래?”
“난 상관없어.”
경헌은 더 이상 못 먹겠는지 자신의 그릇을 옆으로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미 면은 다 건져먹고 노른자 남은 것을 주워 먹던 중이라 미련 없이 그릇을 밀었다.
“가자!”
오늘 옷차림새가 좀 꾸리긴 하지만 어차피 여름이고 잘 보일 사람도 없다.
경헌과 유현을 질질 끌다 시피하며 이태원으로 향했다. 처음 경헌을 목격했던 단골 클럽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주인 지호 형이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하하, 공부하느라고 못 왔어요. 잘 지냈어요?”
지호 형과 인사를 나누고 안면 있는 직원들과도 눈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김가 형제들이 나란히 오셨네?”
“형제 아니라니깐요.”
마스터는 오랜만에 온 내가 반가운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근데 옷차림 심하게 프리한데?”
“밥 먹으러 나온 김에 들렸거든요.”
얇은 면소재의 민소매 티셔츠와 카고 반바지, 슬리퍼에 백 팩만 메고 나왔다.
유현은 나한테 지갑과 담배까지 맡기고 맨몸이었다.
긴 후드 베스트에 브이넥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차림이었다. 동안이라서 가능한 애들 패션이었다.
경헌도 간편한 차림이고 셋 다 놀러온 티가 난다.
지호 형은 아르바이트생들한테 여기 한상 거하게 차리라며 외친 뒤 우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 공부하느라 힘들지?”
“뭐, 안 힘든 게 어디 있겠어요?”
“그래, 장하다.”
“으헤헤헤.”
예전엔 꼴에 법대생이라고 비웃더니 사법고시 준비하면서부턴 격려해준다.
나중에 잘 부탁한다며 서비스 안주도 주곤 했다.
해원 씨랑 사귀고 나선 가뭄에 콩 나듯 스트레스 풀러 가끔 들리곤 했으니 육 개월만이었다.
이젠 뭐 자주 오게 될 테니 지호 형에게 애교를 떨며 술을 따랐다.
맞은편에선 유현과 경헌이 같잖다는 미소를 짓는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라 가게는 한산했다.
여덟시쯤 되면 그때부터 스테이지에 조명 들어오면서부터 시끄러워지니 미리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지호형이 난데없이 해원씨 얘기를 꺼낸다.
“애인은? 애인 때문에 자제한다더니?”
“……헤어졌어요.”
“에엑?”
“뭐 삼년이면 헤어 질 때도 됐잖아요. 뭘 놀래고 그래요? 술이나 더 줘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고 지호 형에게 술을 받아 마셨다.
남자야 까짓 거 새로 사귀면 장땡이고 어차피 사시 때문에 바빠서 연애질도 못한다며 덧붙이자 형도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중요하냐? 인생이 중요하지 거들며 다시 잔을 따랐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흘렀고 곧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바뀌었다.
강렬한 비트의 리믹스 곡들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관절 좀 비벼볼까?”
사람들도 많아져 지호형도 자리를 뜨고 유현이와 함께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일어날 때 약간 휘청하자 유현이 옆에 와서 어깨를 붙잡는다.
“너 취했냐?”
“취할 정돈 아니야.”
취하면 완전히 개가 되는 내 성격을 알기에 유현은 순순히 놔준다.
“야! 경헌아! 너도 나가자.”
“귀찮은데.”
자리에 앉아있는 경헌이놈을 끌어내 스테이지로 나갔다. 빈티 나게 입긴 했지만 꿀릴 정도는 아니다.
아싸 가오리 어깨를 들썩거리며 스테이지로 신나라 뛰어나갔다.
휘적휘적 팔을 휘두르는 어설픈 웨이브로 관절들을 풀어준 뒤 유현과 어깨동무를 했다.
“넌 오늘 막춤의 끝을 보게 될 것이야.”
경헌이 놈에게 선전포고를 날려주며 발바닥에 착 달라붙는 스테이지 앞에 섰다.
유현은 피식 웃으며 나와 장단을 맞춘다.
“오늘 여기서 본 것을 평생 잊지 말게. 소년.”
“지랄.”
경헌은 코웃음 치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슬슬 몸이 비트에 적응이 된다.
“유현아. 일단 그것부터 하는 게 좋겠지? A spring in the deep mountain.”
“물론!”
곧 나와 유현은 하나 둘 셋 박자를 외치며 팔을 위로 쳐들었다. 팔을 모아주듯이 위로 쭉쭉 뻗었다.
산 모양을 그린 뒤엔 수영을 하듯이 팔을 안쪽으로 원을 그리듯이 크게 휘두른다.
박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래도 따라 불렀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이게 바로 깊은 산 속 옹달샘 댄스야!”
“동작은 격하고 크게!”
경헌이 질린 얼굴로 미친놈들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끔 클럽에 와서 할 일이 없거나 심심하면 유현과 함께 추는 춤이었다.
어린이 합창단의 옹달샘 안무를 크고 격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물 마시는 장면은 양동이를 들이키듯 뒤로 휘청거리며 먹는 동작이 중요하다.
안무는 짧고 간단해서 몸 풀기엔 그만이다.
하고나면 머리가 좀 어지럽긴 하지만 분위기 띄우는 데는 최고다.
유현과 김흥국이 호랑나비 부를 때 휘청거렸지만 낄낄 거리며 즐거워했다.
경헌은 이미 저만치 사라진지 오래였다. 멀리서 지호 형이 박장대소하는 모습이 보였다.
스테이지에서 이십분쯤 부분비만을 해소하는 막춤을 추다 나왔을 땐 나와 유현 둘 다 땀범벅 이었다.
예전에 클럽에 오면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별 쇼를 다 했다. 거침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춤추다 키스하고 애무하고 스트립쇼까지, 막 나갔던 시절이었다.
반쯤은 장난이었고 이십대 초반이었으니까 귀엽게 봐줬지만 이제 와서 그러기엔 조금 민망했다.
차라리 막춤 추며 신나게 노는 게 더 즐겁다.
어차피 이 클럽에서 남자들 낚아봤자 죄다 친구 아니면 섹스파트너로 끝나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진지한 연애를 해본 적은 딱 한번 뿐이다. 사랑한 것도 해원 씨 한 사람 뿐이었다.
“힘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로봇~ 아싸~ 후르르륵~.”
“그만 해라.”
스테이지에서 내려왔지만 아직도 막춤신이 빙의되어 있는 건지 목 춤을 추며 테이블로 돌아오는데 경헌이 놈이 한심스럽게 바라본다.
옆에선 유현이 장단을 맞춰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있다.
“놀자고 한 건 지면서.”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자 경헌이 놈은 질렸다는 얼굴이다.
“놀자고 했지 진상 부리라곤 안 했다.”
진상이라니, 저런 개새끼. 열 받아서 쿠션을 던져버렸다.
놈은 슬쩍 피해 손으로 잡은 뒤 옆에다 던지곤 테이블에 뻗어있는 우리에게 잔을 돌렸다.
“술이나 먹어.”
마다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땀을 흘렸더니 맥주가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
술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몇몇 사람들이 나와 유현을 쳐다보며 픽픽 웃는 게 보인다.
방금 전에 광란의 스테이지 때문인가 보다. 나도 마주보며 씨익 웃어줬다.
꽃게 춤, 용춤, 쟁반 춤, 감전된 오징어 웨이브, 핑클 댄스, 초 난잡한 복고댄스까지 화려하게 꽃 피운 것이다.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경헌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쪽팔려.”
일행으로 보이기 싫어하는 경헌이 놈을 내버려두고 나와 유현은 서로 기특하다는 듯 안주를 먹여주었다.
“아유, 우리 유현이 힘들징?”
“아잉, 자기가 더 열심히 했잖아. 나 너 탈골되는 줄 알았쪄.”
꺄르륵 거리며 서로를 추켜 세워주자 경헌의 표정은 더욱 살벌하게 구겨진다.
그 모습을 안주삼아 유현과 함께 킬킬거리며 술을 마셨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조금 취했다 싶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저녁 열시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예정에 없던 즉흥 나들이였다.
내일 부족한 양을 채우려면 일찌감치 잠이 들어야 할 것 같아 클럽을 빠져나왔다.
웃기게도 안전제일주의인 경헌은 대리운전을 불렀고 술도 깰 겸 기사가 올 때 까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놀아서 기분은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콧노래까지 중얼거리며 담배를 피우며 유현과 내일은 꼭 공부하자는 결심을 다지는데 옆 건물에서 소음이 흘러나온다.
“왜 저렇게 소란스러워?”
무언가 부셔대고 깨지는 소리가 난다. 간간히 누가 소리치는 것도 같다.
보수공사라도 하는 건가해서 돌아보니 1층에 자리 잡은 고기집이다.
부산하게 누군가가 돌아다니며 마구 집어던지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장사 잘 되는데 빚도 안 갚아? 완전 겁 대가리를 상실했구만?”
누군가가 커다랗게 외치자마자 곧 와장창 소리가 나며 창문이 부셔졌다.
깨진 유리창 밖으로 의자가 던져졌다.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간다.
“거, 또 시작이구만.”
“하여간 순 악질이여. 하루라도 늦으면 저 지랄이랑께.”
내가 서있던 가게 앞 열쇠 집에서 할아버지 둘이 한숨을 내쉬며 구두를 벅벅 닦았다.
“왜 저런대?”
“빚쟁이 왔나본데?”
유현과 경헌이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래도 저 가게주인이 빚을 진 모양이다.
가게 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사채업자 들일 테고 말이다. 쯧쯧, 혀를 차며 담배를 비벼 껐다.
빨리 대리운전기사나 왔으면 싶었다. 이런 소란스러움은 절대 피하고 싶은 일중의 하나니까.
게다가 깡패들 근처엔 가기도 싫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더러운 방식으로 이익을 보거나 피해를 주는 것이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강압적으로 누군가를 협박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사채업자나 깡패 등을 경멸한다.
영화 같은 곳에선 개폼 다 잡고 꼴에 의리 따지지만 실제로 겪어봐라. 다들 현실 부적응 쓰레기다.
“이놈의 대리운전 왜 이리 안와?”
즐거운 기분을 저 따위 꼴 때문에 망치기 싫어 어서 돌아가고 싶다.
불만을 토로하며 바닥을 발로 툭툭 칠 때였다.
“으아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건물에서 밖으로 날라 가는 커다란 것이 보인다.
화들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이었다.
붕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철퍼덕 소리가 나게 바닥으로 쳐 박힌다.
사십대의 안경을 쓴 평범한 남자였다. 덩치가 꽤 컸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곧 가게 밖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한 남자가 보인다.
“약속은 지켜야지. 안 그래?”
남자는 친절한 웃음을 머금은 채 엎어진 상대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미소였다.
깔끔하고 세련된 정장차림에 넥타이는 메지 않고 제일 위의 단추 하나만 푸른 상태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외양이지만 행동만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정실장. 내가, 내일까지 꼭 갚을 게. 한번만 봐 줘!”
엎어진 남자는 몸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계속 손을 삐끗한다.
바닥에 엎드려 빌다 시피하며 앞에 있는 남자에게 사정을 했다.
“딱 한번만 봐준다고 했을 텐데? 지금 세 번째잖아. 내가 두 번까진 봐줬어. 경고했는데 안 지킨 건 그쪽이야.”
“내일까지. 정말 꼭 내일까지 갚을게!”
“진작 그랬어야지.”
그 말만 내뱉고 남자는 가게주인으로 보이던 상대를 걷어찬다.
다시 데구르르 굴러가는 중년의 남성은 차도 전에서 바로 멈춘다.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이 폭력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나는 곧 몸을 돌려 다가온다.
남자는 작게 욕을 중얼거리다가 앞에 있는 나를 보더니 귀찮은 표정을 짓다가 서서히 얼굴을 굳힌다.
“…….”
평소엔 눈치 채지 못하던 중력이 거세게 다가와 온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까지 비슷한 실루엣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남자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한없이 곤란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수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대는 분명 정해원, 얼마 전에 헤어진 내 전 애인이었다.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고 꿈쩍도 할 수 없는데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상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낭패 짙은 얼굴이 돼서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속물인 내가 연애에 대해서 환상을 가질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 본질을 무조건 이기심 혹은 욕망으로 치부할 정도로 극단적인 인간은 아니다.
사랑은 배려하고 집착하고 아껴주고 소유하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골고루 섞여 있는 것이다.
연인간의 애정은 그 사람을 최대한 넓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난 믿었다. 가족보다 더 자세히.
친구보다 더 깊이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키워 나가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나는 이 사람과 만남을 반복하며 인내를 배웠다.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내가 양보해야할 것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자신할 수 있는 건 내가 알고 있는 정해원은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그의 진실이 빌어먹을 우연으로 인해 드러나 버렸다.
삼년동안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그의 본모습은 우습게도 내가 가장 무시하던 카테고리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