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이름은 김수현
지긋지긋했다. 더 이상 혼자 아등바등 거리는 것도 싫고 혼자 속 끓는 것도 지겹다.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할 고민이 얼마나 많은데 연애질까지 피곤해야 한단 말인가.
엄청난 감정의 소모를 들여 고생하는 건 연애가 아니다.그건 차라리 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
헤어졌다 사귀었다 반복하고 툭하면 싸움을 해대며 민폐 끼치는 커플들의 작태를 연출하기도 싫다.
확실하게 끝맺음을 하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일부러 없는 시간을 쪼개 상대를 불러냈다.
헤어져야할 이유까지 조목조목 머릿속에 정리도 했다.
돌이켜보니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다 날이 샐지도 모를 정도다. 그러다보니 다시 열이 오른다.
벌써부터 성급하게 나오는 화를 애써 가라앉히며 앞에 놓인 냉수를 들이켰다.
만나면 할 말을 일부러 소리 내서 연습해봤다.
“헤어지자.”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겨우 네 음절짜리에 이초밖에 안 걸리는 쉬운 단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열불이 난다.
그 길던 시간은 겨우 이 한마디를 남기기 위해 걸어온 가시밭길이었던가?
장장 삼년간의 시간이 겨우 이걸로 끝난다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계속 된다면 이것보다 더한 스트레스와 상처만 남기겠지. 이제 그만 적정선에서 끝내는 게 좋다.
다시 혼란스러운 머리 때문에 골이 아파 이마를 꾹꾹 눌렀다. 요즘은 늘 두통 때문에 고생이었다.
장마철이라 더 극성을 부리는 이 지병을 어찌하면 좋을까 생각하는데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천천히 들린다.
“일찍 왔네.”
상대는 여전히 느긋한 걸음과 말투로 나에게 다가왔다. 세련된 정장차림이 잘 나가는 사업가로 보인다.
여전히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이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
가끔은 짜증이 나고 답답할 정도로 빈틈이 없다. 그를 올려다보며 반대편에 빈 소파를 손짓했다.
“앉아.”
상대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다가오자 늘 그렇듯이 아이스그린티를 시킨다.
내가 늘 블루마운틴이나 홍차를 시키는 것처럼 남자도 기호가 일정했다.
“무슨 일이야? 회사까지 찾아오고.”
회사라니, 나는 상대가 일하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단지 이쯤에 있는 어느 작은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건 알고 있다.
말이 작은 사무실이지, 그의 씀씀이를 보면 대기업 직원쯤 되 보인다.
“할 말이 있어서.”
“무슨?”
그는 늘 그렇듯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상냥하기 그지없다.
그 사이에 주문한 음료도 금방 나왔다.
“나 내일부터 잠시 해외에 나가.”
“그래? 무슨 일로?”
“여행. 그래서 미리 말해두는 거야. 헤어지자.”
“응?”
그는 직원이 가져다 준 녹차를 입에 대려다가 그만두며 물었다.
살짝 찌푸린 눈썹을 보니 그나마 반응이 있어서 다행이다.
무심하게 네가 원한다면, 그래 알았어 등의 말을 지껄였다면 이곳에서 내 성질을 있는 대로 드러낼지도 모르니까.
그런 진상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고 싶다.
최소한 이 남자 앞에서만은 그러고 싶었다. 비록 내 속을 다 타 없애버리게 해서 재만 남긴 사랑일지라도.
추억을 위해 예의를 지키고 싶다. 태어나서 이런 인내심은 처음 부려 본 것 같다.
허세라고 불러야 정당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맥시멈의 한계는 딱 여기까진 것 같다.
“이제 그만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늘 그래왔듯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 남자는 그런 나를 맘에 들어 했다.
적당한 선을 지키는 쿨하고 어른스러운 관계.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다지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격정적이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테이블 밑에 있는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감정을 절제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제발 이 모습을 지키길, 허튼 행동이나 말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앞에 있는 상대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입가로 손을 가져다대며 코를 쓸어대는 행동은 그가 가끔 곤란할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무슨 대답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은 늘 생각했던 그 말을 꺼냈다.
“이제 지겨워 졌어.”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도, 고민하는 그 시간도, 후회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모든 것들과 안녕을 고하고 싶어서 당신과 헤어지고 싶다.
구겨지는 표정을 보니 흔들리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아쉬움이라도 보여줘서 고마운 내가 참으로 밉기만 하다.
왜 이렇게 사람을 망가트리는 걸까. 사랑이란 정말 절대로 피해야할 덫이다.
이제는 빠져나와서 나를 찾고 싶다.
“그만 가볼게. 잘 지내.”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상대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천천히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내 차 값은 미리 와서 계산해둔 후였기에 아무런 부담 없이 밖으로 향했다.
잘한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오전 내내 비가 내리던 날씨는 오후에 접어들어 제법 구름이 걷어져 있다.
비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다.
피곤함이 밀려와 다리가 축축 쳐졌지만 제법 견딜만한 고통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머릿속으로는 이 생각만 가득했다. 생각했던 것보단 나쁘지 않은 엔딩이었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집을 나왔다.
내 자신이 게이임을 자각하고 어느 순간부터 결심한 일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룸메이트 녀석과 함께 살고 있다. 김유현, 내 대학 동창이다.
“왔냐?”
녀석은 오자마자 성의 없이 물었다. 까치집을 한 머리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됨을 말해주고 있다.
흘낏 시계를 보니 지금이 오후 세시였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퍼질러 자?”
쏘아대듯 묻자 녀석은 나를 무슨 파리 취급하는 눈으로 보더니 벅벅 사타구니를 긁으면서 화장실로 향한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보다가 나 또한 옷을 벗었다.
일단 답답한 양말부터, 집에서 양말 신고 있는 게 가장 싫은 일 중 하나였다.
은근히 불편한 옷들을 벗어던지고 편안한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그제야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야! 밥 먹자.”
곧 욕실에서 나온 유현이 우렁찬 외침을 내뱉는다.
내가 유현을 만난 것은 대학교에서였다.
같은 과에 수업도 겹치는 게 많아 출석부를 때마다 내 시야에 밟히곤 했다.
이름이 너무나 비슷해 친근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피면서 대화를 해본 결과 너무나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엔 우리의 성취향이 같다는 이유도 포함해서였다.
처음 만나자마자 녀석에게 동류의 향기를 느꼈고 이건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엔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유현은 별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이란 곳에서 마음 터놓고 친구를 사귀기는 의외로 힘든 곳이다.
게다가 우리 같은 성적소수자들이라면 더욱 그렇고.
유현이 놈은 몸을 사리는 쪽이었기에 처음엔 나와의 우정을 부담스러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적절한 들이댐으로 우린 친구가 되었다.
같은 대학, 같은 나이, 둘 다 자취를 하고 있어 우정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오고 함께 살기 시작했고 여러모로 취향도 비슷해 같이 있으면 즐겁다.
유현은 나에겐 파트너보다도 소중한 존재다.
녀석의 키는 178cm로 나보다 2cm 가량 작고 몸무게는 5kg정도 덜 나간다.
목소리는 나보다 더 허스키하며 째진 눈이 나름 매력이라고 우겨댄다.
마르고 날렵한 몸매도, 남자치곤 잘빠진 허리도 늘 자랑을 한다.
첫인상은 차갑고 냉정한 녀석 인줄 알았는데 친해지고 나니 이거 완전 푼수였다.
뭐 덕분에 재밌으니 상관은 없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한다.
“너 지금 몇 그릇을 먹는 거냐?”
밥통에 있는 밥을 거덜 내려고 작정을 한 듯 연신 밥을 새로 퍼먹는 놈에게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유현이놈은 뻔뻔하게 대꾸하는 것이다.
“세 그릇? 야, 근데 계란말이 더 없냐?”
입 옆에 묻은 밥풀을 낼름 주워 먹으며 이젠 반찬투정까지 한다. 어이가 없다.
“니가 다 먹었잖아!”
“또 해주라.”
“싫어. 이 돼지야.”
계란말이와 감자조림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반찬들이다.
그리고 늘 유현이 녀석이 다 먹어치우는 일 순위는 바로 그 두 메뉴다.
하지만 양심 없는 이 새끼는 내가 먹는 것 가지고 구박한다고 늘 투덜거리기 일쑤다.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굴긴.”
“시끄러. 이 날강도야. 식비는 내가 내잖아.”
“전기세랑 가스 비는 내가 내거든? 야, 이 장조림은 어디서 났냐?”
“마트에서 샀다.”
“어쩐지 맛있더라. 야, 물 좀 줘.”
“떠다먹어.”
녀석과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식사는 끝나버렸고 자그마한 밥통도 텅 비어버렸다.
“김수현. 그러는 거 아니다. 친구 사이에.”
“김유현. 너야말로 라면 한 번 안 끓여주면서 그렇게 당당해도 되는 거야?”
“내가 싫어서 안 한 거 아니잖아.”
“그래. 재료가 아깝도록 졸라 못 끓이니 내가 못하게 하는 거지.”
“씨발 놈. 요리 못하는데 보태준 거 있냐? 지도 할 줄 아는 건 딱 두 개면서.”
“닥쳐 라면도 못 끓이는 놈아.”
“야! 난 못 끓이는 게 아니라 일인분밖에 못하는 거라고.”
“자랑이냐? 시끄러.”
녀석의 입을 막아버렸다. 늘 반복해서 지겨운 레퍼토리들, 이젠 듣기도 지겨웠다.
이번 주는 내 당번이라서 설거지를 하고 유현이 녀석과 좁은 거실에 나란히 누웠다.
식후 땡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나 오늘 헤어졌다.”
“좋은 일 했군. 그 사람을 위해선 잘한 일이다.”
“죽을래?”
“사실이잖아.”
유현은 킬킬 거리며 담배연기를 코로 내뿜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숭 떨기 힘들었을 텐데 이제 편안하게 사셔.”
“니나 잘해.”
나보다 더 심한 놈이 웃기고 자빠지셨다. 한동안 서로 악담을 주고받을 때였다.
유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하와이 갈 준비 안하냐?”
“해야지.”
“내일 갈 텐데 미리 짐 싸놓자.”
“그래.”
녀석과 나는 방에 들어가서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은 지긋지긋한 관절염 때문에 하와이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가서 온천욕이나 하고 모든 피로를 풀어야지.
“야, 근데 차는 빌려놨어?”
“경헌이놈한테 빌렸다니까.”
“으헤헤헤, 나 부곡하와이 처음 가본다.”
“나도 처음이야.”
서로의 방에서 수다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짐을 쌌다. 필요한 물건이라고 해봤자 옷 몇 벌뿐이다.
이 날을 위해서 산 하아와인 티셔츠를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맞춰 사기까지 했다.
“우리 바보 같다.”
“그러게.”
미리 입어보고 서로를 삿대질하며 낄낄 거렸다. 정말 바보 같았다.
옷에 맞춰 산 내 밀짚중절모와 녀석의 선글라스가 관광 온 할아버지 같다.
내친김에 관광버스 춤까지 춰대며 우린 주접을 부렸다.
내 신들린 관절놀림에 유현이 놈이 배꼽 빠지도록 웃어 재꼈다.
아침이 되자마자 윤경헌이 집 앞으로 차를 끌고 왔다. 약속 시간 정각에 오다니 쪼잔 한 그 놈다웠다.
“살살 다뤄라. 고장 나면 알지?”
“알았다니까. 경헌 형님, 나만 믿으시라.”
슬쩍 눈을 흘기는 경헌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유현이 놈이 보인다.
같은 과 동기인 한 경헌은 복학 후에 게이 바에서 만나 어쩌다보니 친해진 놈이었다.
경헌은 하와이안 셔츠를 맞춰 입은 우릴 보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할아버지들 관광 가냐?”
“음, 눈치 챘냐? 컨셉이다.”
“간지가 좔좔 흐르지?”
“미친. 정확히 삼일 뒤에 내 아파트 주차장에 갖다 놔.”
경헌은 우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차키를 휙 던지고 사라져 버린다.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놈이라 역시 차도 멋지구리하다.
“자, 하와이로 출발.”
유현이 놈이 호쾌하게 외치며 운전석에 탔다.
집을 뒷좌석에 집어던지고 나도 조수석에 타며 선글라스를 꼈다.
“김 기사, 출발해.”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자 유현이 놈이 옆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곧 협박을 한다.
“손님, 이러시면 미터기 킵니다.”
해원을 처음 만난 것은 겨우 스물넷이었다.
그 때는 군대를 갓 제대해서 사무실이 밀집한 번화가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성정과는 달리 생긴 것만큼은 단정했던 나를 좋게 본건지 사장은 늘 농땡이였고
커피기계와 믹스만 있으면 바보도 만들 수 있는 음료들뿐이라서 일은 쉬었다.
손님도 많지 않아 한가했고 시간당 3500원이면 괜찮은 보수였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앉아서 커피를 마음대로 먹거나 책을 보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손님들 스토킹이라고 해보려고 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이 없다.
근처 다단계에서 나온 사람들과 간단한 면접으로 보는 회사원들, 테이크아웃으로 잠시만 다녀가는 손님들과
아무리 봐도 불륜으로 밖에 안 보이는 중년의 남녀들.
간혹 찾아오는 내 스타일의 남자 손님들에게나 방긋 방긋 웃어주며 서비스를 해줄 뿐, 그 외엔 관심도 없었다.
밤만 되면 근처 단란주점 지대 등에서 나온 삐끼들로 손님도 없었고 말이다.
나가요 언니들은 커피도 안 사먹는다.
군대에서 갓 제대해 까맣게 된 피부가 유난히도 짜증스러웠고 다시 머리길러야지 생각만 간절했었다.
‘내 매력은 하얀 피부라고. 근데 이게 뭐냐. 짜증난다. 진짜.’
‘말년에 화이트닝 좀 하지 그랬어.’
유현이 놈과 이런 수다나 떨며 복학자금 모으기에 급급했다.
커밍아웃 덕분에 집에서 원조가 끊겼기에 학자금은 늘 내 고민이었다.
어차피 빚도 많아 눌러앉아있기도 부담스러웠던 곳이다.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고, 그들이 날 인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냉랭한 관계였다.
이것저것 고민은 많고 뚫을 길도 안보이고 착잡하기만 했던 내게 단 하나 위안이 있다면 가끔 들르곤 하는 그였다.
늘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녹차를 시키는 남자다.
뜨거운 녹차를 테이크 아웃시켜 먹는 내 식성인 남자.
훤칠한 키로 느슨한 표정으로 늘 창가자리에 앉아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나가곤 했다.
‘저 탄탄한 가슴에 안겨봤으면 소원이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늘 몰래 지켜봤었다.
근처에서 일하는 호스트인가 했지만 그런 기색도 없고 아마 회사원인 것 같은데 늘 혼자 있으니 알 길이 없다.
저런 남자가 꼬시면 나라도 다단계 할지도. 홍차를 타면서 키득거리곤 했다.
가끔은 서비스를 빙자한 수작을 걸기도 하면서.
‘자주 오시는데 마일리지 카드를 만드시지 그러세요?’
‘음, 자주 안 오는 것 같은데.’
‘일주일에 한 번이면 자주지요. 만들어 드릴까요?’
‘갖고 다녀도 잊어먹을 것 같은데요. 제가 워낙 덤벙거려서.’
‘여기 보관함에 두고 다니시면 되요.’
목소리 또한 낮아서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음흉한 마음을 숨기고 친절하게 웃으며 이름이나 알아내자는 생각이었다.
남자는 내 말에 혹한건지 카드에 이름을 적었다.
‘정해원.’
이름 세 글자를 알아낸 뒤엔 혼자 좋아라했었다.
그가 피우는 담배 던힐, 좋아하는 색은 아마도 무채색, 녹차 매니아.
그리고 사용하는 핸드폰 기기 등 차곡차곡 정보를 업데이트하며 삼 개월을 보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녹차 주십시오.’
일주일에 한번쯤 들리는 그와 안면을 알게 된 후엔 눈인사까지 나누는 경지에 올랐다.
자랑이라곤 청순한 낯짝밖에 없는 내 주 무기를 마음껏 사용하며, 가끔은 날씨 얘기를 나누는 혜택도 누리고.
거의 혼자였기에 심심하면 청소를 하기도 하고, 그 사람 언제 오나 목을 빼고 기다렸었다.
어쩌면 그때가 차라리 나았을지도. 그렇게 손님과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상태가 제일 편안했었다.
그때의 나는 겨우 스물넷이었으며 자신이 애송이란 것도 몰랐다.
클럽에서 만난 남자들과 원 나잇 혹은 몇 번의 만남을 반복하며 욕정을 푸는 데만 급급했었다.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얼른 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끌리는 남자는 없었다.
그나마 제일 간절했던 건 그였다.
그렇게 육 개월이 지나고 무섭게 비가 오던 날이었다.
우산이 없어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망연자실하게 서있던 날, 그가 내 앞에 차를 몰고 나타났다.
‘타요. 우산 없죠?’
그 순간, 기회가 찾아 온 거라고 생각했다. 세 시간 전에 돌아갔던 그였다.
비는 그 이후에 왔고 차는 삼십 분전에 흘끗 본 기억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일주일마다 찾아오던 그가 삼사일에 한번으로 방문 간격이 짧아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계산기를 미친 듯이 두드려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우연을 기뻐하는 순진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때도 나는 꽤 여우였던 것이다.
‘지나가던 길이세요?’
뻔히 알고 있음에도 물어보자 그는 약간 곤란한 듯 웃었다.
‘아니오. 일은 아까 전에 끝났는데 비가 오더라고요. 이때쯤 퇴근하는 친절한 아르바이트가 걱정 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속으로는 만세를 외치면서도 겉으론 쑥스럽게 웃었다.
육 개월 간의 스토킹이 전혀 아깝지 않은 쾌거였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식사했냐는 물음에 고개를 젓자 그는 나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고 분위기 좋은 바에서 와인도 마셨다.
핸드폰 번호를 따고 키스를 하고 헤어지며 생각했다. 봉 잡았다고. 그때도 나는 꽤 속물이었던 것이다.
비성수기이기에 도로는 한산했다. 방학 맞은 대학생들이나 한가한 유월 말이었으므로.
우리 둘 또한 비성수기를 노려 휴가를 가는 것이었다.
친구 둘이 쓸쓸한 온천을 즐기러 초여름에 떠난다니 눈물이 찔끔 나올 스토리였다.
하지만 바다에서 태어난 유현이나 강가에서 태어난 나나물이라면 지겨웠다.
유현이 놈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나에게 물었다.
“경헌이 놈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지 않아?”
“뭐?”
담배를 피우던 중 유현이 턱 내뱉은 얘기에 내 시선이 돌아갔다.
유현이 놈은 여전히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다.
“윤경헌이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고.”
“헛소리.”
“빼기는. 생각 있으면 잘해보지 그래?”
“좆 까.”
“미친년, 주제에 튕기긴.”
유현은 꽁초를 튕기며 키득거린다. 나는 여전히 쓰고 있는 선글라스를 치켜 올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윤경헌이라니 말도 안 된다.
윤경헌, 우리 과 최고의 킹카였다. 여성들에겐 아깝지만 진성 게이로 알고 있으며 얼굴값 하는 바람둥이다.
성격은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개진상은 아니었다.
집안이 무슨 재벌 쪽 로얄 패밀리라고 하는데 돈 씀씀이도 헤픈 놈이었다.
차만 두 대를 교대로 끌고 다니는 복 터진 놈, 지금 우리가 빌린 것은 군대에 가기 전에 타고 다니던 매그너스였다.
지금은 오펠의 스피드스터를 타고 다니는데 무슨 장난감 차 같다.
농담으로 이거 다간처럼 변신도 되냐고 했더니 삼일동안 삐쳐서 말도 안 걸었었지.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있는 놈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보통이라면 환장 할 텐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나는 어른스러운 스타일이 좋았다.
기댈만한 구석이 있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좋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은 아니지만. 이젠 내 취향이 뭔지도 모르겠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건 나를 꽉 잡아주는 사람, 그거 하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해원 씨 생각이 난다.
해원 씨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침대에서든 길에서든 어디서든, 비밀은 많았지만 나쁜 점은 없었다.
바쁘기 때문에 가끔밖에 만나지 못했어도 불만이 없을 만큼 서로를 이해해주고 배려하는 관계였는데.
하지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 따위는 돼지껍데기만도 못한 것이다.
나의 신상명세는 밝혀졌지만 그는 나의 성격을 모르고 나는 그의 정체를 모른다. 지겨웠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뭉글뭉글한 의심과 호기심.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무게도 싫었다.
한때는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지만 이젠 해탈했다. 헤어지면 그만인 것이다.
“에라이, 모르겠다.……제길, 언제 도착 하냐?”
“아직 반밖에 안 왔다.”
부곡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아침 아홉시에 출발했지만 도착하자 오후 세시였다.
그동안 우리는 운전을 교대로 하며 졸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죄다 따라 부르다보니 목이 쉬기도 했다.
하와이 호텔에 짐을 풀고 괜찮은 남자 있으면 꼬셔볼까 작당을 하기도 하며 저녁을 먹고 야외 온천으로 갔다.
“얼마 만에 미는 때냐.”
“그러게 말이다.”
아르바이트로 지친 심신을 여기서 모두 풀어보자며 유현이 놈과 장난을 치며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마침 밖으로 나오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인상 더러운 아저씨다. 쫙 찢어진 눈에 눈가에 주름이 많이 접혀있다.
예의상 인사를 하는데 상대는 흘낏 째려볼 뿐 그냥 휙 지나가버린다.
조금 무안하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탕이 보이자 우린 만세를 외치며 앞 다투어 먼저 들어가겠다고 설쳤다.
비누칠할 생각 따위 없이 어린애처럼 신나서 뛰어들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자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 같다.
“크아! 좋다.”
“온몸의 관절이 회춘하고 있구나.”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우리 둘은 온천욕을 즐겼다.
찜질방에 사우나까지 딸려있어 천국이 따로 없다.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우정도 다지고 냉탕에서 바가지를 겹쳐 수영을 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물장난 치다가 할아버지한테 혼나기도 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장난질이야!”
호통을 치는 할아버지를 피해 후다닥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그러게 하지말자고 했잖아!”
“지랄! 먼저 시작해놓고.”
유현이놈과 티격태격하며 잽싸게 밖으로 향했다.
사실 난 푼수 떼기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여자만큼이나 남자도 내숭이 중요하다고.
‘네 성격 감당 못하겠어.’
군대 가기 전까지 질리도록 듣던 말이었다.
나름 지성과 미모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너무나 대가 센 탓에 남자들이 남아나질 않았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강력한 에고가 늘 걸림돌이었다.
사실 내 전공은 법학이었다. 따지기 좋아하고, 권리에 있어선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게 법학도들이다.
학창시절엔 전교 십 등 밑으론 떨어진 적이 없다.
지방 출신이라 고등학교도 시험 쳐서 들어갔기에 학군 내에서 제일 높은 그곳에서도 늘 고개 뻣뻣이 들고 다닐 실력이었다.
서울에 있는 나름 명문대에도 덜컥 현역 합격했고 과외 아르바이트로 풍족한 생활을 했었다.
이년동안의 그 과외아르바이트 덕분에 지금 널널한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겠다가 내 지론이었다. 수준이 맞아야 놀지, 양아치 사절.
이마빡에 아예 써 붙이고 다닐 정도였다.
게다가 반반한 얼굴 때문에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못 말리는 왕자 병은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가 너무 소중했을 뿐이지.
성격 남자답고 시원시원하고 털털하고 유머 감각 있고 게다가 지성과 미모.
그러나 탑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체질이 바텀이었다.
이왕지사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애교 많고 얌전하고 체구 작은걸 좋아하는 마초들이 이 세계에도 많았던 것이다.
처음엔 외모와 털털한 성격이 좋았지만 사랑은 도무지 생기질 않는다며 날 떠나간 무수한 남자들, 그래서 나는 컨셉을 바꾸었다.
‘내숭만이 살 길이다.’
그래서 친구들 외에 사람들에겐 어디서든 얌전한 모습만 보였다.
지적이고 상큼한 이미지를 모토로 사기를 친 것이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스스로도 역했지만 하다 보니 재미가 들렸다.
게다가 잘 먹히니 아예 생활이 되어버렸다.
사람은 진화한다더니 난 퇴화하는 것 같다.
학창시절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억제했던 내 똘끼가 수험을 끝으로 폭발했고 절정기를 이루던 1학년 말기였다.
나의 장점은 일단 청순한 외모와 보기 좋게 마른 몸매다.
뻔뻔함, 잔머리 등등의 장점도 있지만 내적인 건 살짝 무시하고 아무튼 겉보기엔 상태 좋다.
그러나 ‘입만 열면 깬다.’의 주인공도 바로 나였다.
‘솔로기간이 오래되니 자웅동체가 될 것 같아.’
유현이 놈한테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유현이 놈은 나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그딴 언어나 구사하니 니가 솔로인거다.’
그때 깨달았다. 언행이 이미지를 좌우한다는 것을.
조금만 피곤하면 누워버리는 게으름, 비꼬는 데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입담,
열 받으면 욕과 주먹이 나가는 무식함은 연애하는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우정과 연애는 다른 매력이 필요했다.
어쩐지 몇 번 자고나면 자연스레 친구가 되더니, 이것 때문이었다.연애는 긴장감이 중요한 것이다.
나처럼 술 먹고 레슬링 하는 꼬장을 부려선 안 되는 것이다.
상대 품에 기대어 졸지언정 잔디밭에서 노숙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열이 받으면 싸대기 하나 올려주며 앙탈을 부리거나 잠수 타며 애간장을 녹여야지 맘에 안 든다고 재판을 벌이면 안 되는 것이다.
‘니가 이래저래 해서 내가 어쩌구저쩌구 하니까 우린 요로코롬 해야 돼!’
정답은 시험 볼 때나 필요한 것이다. 너무 줏대 있게 굴면 오히려 정떨어진다.
상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줄듯 말듯 하며 긴장감을 유지시켜야 했다.
그것을 깨달은 뒤, 첫사랑에 장렬히 실패한 뒤엔 연애의 명수가 된 유현에게 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원래 유치한 게 잘 먹히는 거야. 뻔히 보여도 속는 게 남자야. 흔한 게 유명한 것처럼 당장 속으론 토할 것 같아도 참아.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남자가 남자를 잘 안다고, 시각에 약한 남자들을 위해 겉모습은 물론 행동 하나하나까지 상큼하게 바뀌도록 유현은 나를 조련했다.
길거릴 걸을 때도 표정관리, 하품도 아무데서나 하지 말고 트림도 금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도록 늘 무표정을 유지하고 눈동자는 꿈꾸는 것처럼 어딘가 허공을 바라보고!
절대 크게 웃지 말고 희미하고 엷은 웃음을 지으며!
건조하지만 섬세한 성격인 것처럼 보여서 관심을 유도하라고 했다. 농담도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
그 외기타 등등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괴이한 행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거 미친놈 아냐? 누가 이러고 살아? 내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이냐? 요즘 드라마 주인공들도 안 이래.’
‘닥치고 해!’
과연 이게 먹힐까 궁금했지만 삼 개월쯤 지나 클럽에 가자 직방이란 걸 알게 됐다.
‘야! 다들 농약 처먹었나봐. 믿어!’
‘훗, 원래 인간이란 단순한 법이지. 한 달 전에 헤어진 사람도 내숭떨면 변했다고 믿거든.’
유현은 시니컬하게 중얼거리며 과외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초반엔 실패도 많이 겪었었다.
타고난 체질이나 성격을 감추는 내숭이 습관화가 되지 않아서 번번이 실수를 했다.
소개팅 하러 나가서 의외로 성격이 맞기에 신나게 수다를 떨며 즐겁게 놀다가 긴장이 풀린 것이다.
대화 주제는 ‘섹스 시 상대편이 제일 짜증나게 굴 때는 언제?’ 였다.
나는 상대가 빨리 안 넣고 애태운답시고 애무만 길게 하는 게 제일 싫었다.
상대도 웃으면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공감대가 형성이 되자 긴장이 풀렸던 나는 제대로 실수를 해 버렸다.
‘맞아. 그럴 땐 진짜 거시길 확 뽑아버린 다음에 그놈 구멍에 꽂고 싶어. 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 감질나게 구냐고!’
나도 모르게 다리를 쫙 벌리고 인상을 쓰며 열렬히 비난을 던졌다.
그것뿐인가? 담배를 피며 음담패설을 던지고 만 것이다.
‘그런 놈들이 꼭 넣자마자 싸잖아?’
유현이놈한테 하듯이 능글맞은 사십대 아줌마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덕분에 그놈과도 친구가 되었다.
섹스를 하든 말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내 핸드폰은 친구이상 애인이하의 쓸모없는 놈들로만 채워졌다.
처음엔 대부분 괜찮지만 알고 보면 그럭저럭 찌질 한 새끼들, 서로에게 점점 소홀해지고 어느 순간 잊어버리게 된다.
언제 만나도 반갑고 아무 때나 연락해도 전혀 부담 없지만 중요하지는 않은 사람들뿐이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친구들만으로도 인생은 즐겁지만 연인은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부재감이 커진다.
한참 즐겁게 웃다가도 늘 끄트머리엔 뭔가 허무한 감정처럼 말이다.
무언가 꼭 빠진 것 같은 공허함, 힘든 일이 생기면 기댈 사람이 필요하다.
해원 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사람이다 싶었다.
최대한 본성을 숨기고 그 사람이 원하는 연인이 되어준 이유는 사실 속물적인 마음 때문이었고 말이다.
해원 씨가 내 그늘이 되 주기를 바랐다.
물질적 감정적인 지주가 되어주길 바랬고 시작은 관심이었지만 끝은 사랑이 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려주진 않았지만 나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증거였고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발버둥이었다. 노력하는 만큼 대가를 받길 기대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등짝을 친다.
살과 살이 부딪혀서 나는 커다란 짝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악!”
“뭐하냐? 눈 뜨고 자냐?”
얼얼한 아픔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해있는 나를 유현이 부른 것이었다.
수건 양끝을 말아 양머리로 만들고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같은 꼴이다.
또 딴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안 잤어.”
“유체이탈한 줄 알았다. 하도 멍해서.”
충격은 적어도 후유증은 남는다더니 이별은 깔끔하게 끝났는데도 뒤끝이 지저분했다.
자꾸 이런 식으로 현실도피를 하게 되는 것이다. 민망함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밤엔 술이나 먹자.”
“……응.”
유현이 놈은 이런 내 상태를 눈치 챘는지 뭐라고 하진 않는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인터넷에서 식당 밥도 맛있다더니 정말이었다. 식사 후엔 근처 슈퍼에 가서 맥주도 한 박스 사왔다.
방에 돌아와선 맥주를 마시며 뒹굴 거렸다. 한껏 뽀송해진 피부를 만지작거리며 서로 칭찬도 해줬다.
“어머, 쌩얼이 예술이시네요.”
“피부가 아주 기냥 나이 값을 못하고 있어요.”
자기 전에 한잔하자던 맥주가 한 캔 두 캔 결국엔 맥주 캔이 탑을 쌓았다.
그러자 슬슬 속 얘기도 나오고 꼬장도 부리고 개가 되어간다. 유현도 스물쩍 나를 피해 침대로 도망간다.
내 술버릇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야, 히끅. 내가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냐?”
“……모르고 싶거든?”
“들어! 이 색퀴! 야, 내가 정해원 그 씹탱이 때문에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암세포가 자라날 정도였어.”
“지랄, 니가 무슨.”
“야, 나한테도 연애세포가 있다니까?”
유현이놈과 나는 술에 취해 얼굴에서 피가 나고 제 자리에서 몸을 주체 못하며 미친 듯이 웨이브와 헤드뱅잉을 했다.
배불러서 더 이상 맥주 마시기도 힘들다.
“야. 김유현.”
“씨발, 왜 자꾸 불러대?”
유현은 자려고 누웠는데 내가 계속 옆에서 치근거리니 귀찮은 모양이다.
하지만 놈의 투정 따윈 무시해줬다.
“연애질은 왜 이렇게 내 맘대로 안되느은 거냐아아?”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인생도 좆같구먼.”
유현은 이불을 뒤집어쓰며 대충 대답한다. 하긴 이놈 인생길도 상당히 s라인이었지.
침대위로 기어 올라가던 나는 유현이 놈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무거워!”
“……인생의 무게다.”
“지랄.”
유현이 놈은 싸늘하게 받아치고는 다시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 거렸다.
하지만 바로 잘 생각은 아닌지 충고랍시고 한 마딜 던진다.
“나도 그놈 잊었는데 세상에 못 잊을 놈 없어.”
잠결에 하는 헛소리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달라붙어 있으니 잘만 들린다.
“그렇겠지. 뭐.”
어떤 감정이든 세월의 힘에 더러워지고 마모되고 침몰할거야. 지금은 서글퍼도 기다려야하지.
돌이켜보면 죽고 못 살 사랑도 아니었어.
지하철 환승하듯 사람을 만나던 옛 시절에도 별거 아닌 남자들에게도 상처를 입고 기대를 했듯이 말이다.
지금은 좀 섭섭해도 나중엔 분명 괜찮아 질 거다.
다음 날 낮에는 잘 꾸며놓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사진도 좀 찍고 다시 온천 가서 놀다가 근처 맛 집들을 헤맸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식도락이었나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먹을 것에 집착했다.
유현이 놈은 인터넷에서 조사한 걸 프린트까지 해서 운전을 하며 찾아다녔고 덕분에 혀가 호위 호식했다.
가마솥 추어탕과 주말농장 숯불갈비 중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고기를 택하기도 했다.
근처에 있는 우포늪과 밀양 얼음골과 화왕산 군립공원까지 대충 돌고 다음 날 오후에야 돌아왔다.
온갖 괴상한 포즈로 찍은 사진들은 모 사이트 셀갤에 올리면 악플이 줄줄 달릴 것 같다.
본좌급에 오르기엔 약해도 유머게시판을 휩쓸지도 모르겠다.
멈출 수 없는 똘끼를 마음껏 자랑하고 왔더니 배가 고프다.
“배고파.”
“나도.”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우리는 집에 오자마자 배고파 타령을 벌이다 결국 피자를 시켰다.
두 판에 만 오천 원 하는 동네 피자를 싸그리 먹어치우고선 뒹굴 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쏴~ 호랑나뷔~ 한 마리가아아 꽃밭에 앉았는데 으아~그냥 들이대는 거야~.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틀 전에 바꾼 김흥국 벨소리였다.
“네 벨소리잖아. 받어.”
시끄러운지 유현이 놈이 내 허벅지를 걷어찼다.
귀찮아서 데굴데굴 굴러가 발로 핸드폰을 끌어당겨 받았다. 발신자가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말이다.
“여보세요?”
“나야.”
“……뭐냐?”
상대는 윤경헌이다. 이놈이 웬일인가 싶어서 용건을 묻자 곧 놈은 곧 기가 차다는 한숨을 내쉰다.
“차 내놔.”
“아…….”
그러고 보니 삼일 째 되는 날 바로 갖다 준다고 했는데 깜빡했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이기도 귀찮다.
“내일 주면 안 될까?”
“안 돼. 지금 내놔.”
“씨댕……내일 준다니까. 지금은 꼼짝도 하기 싫단 말이다!”
“그건 니 사정이고. 분명히 오늘아침까지 갖다 준다고 했잖아.”
귀찮다는 포스를 마구 풍겨댔다. 하지만 경헌이 놈은 당장 갖고 오라며 지랄이다.
쓰벌 새끼, 차 한 번 빌려줬다고 더럽게 유세다. 그 멋진 외제차도 아니고 쓰다버린 국산가지고 말이다.
“아, 귀찮아!”
“가지고 와!”
“못 움직인다고! 필요하면 니가 가지러 와!”
“이…… 뻔뻔한 자식.”
“난 죽어도 못 가니까 아쉬운 니가 오든지.”
“이 새끼, 너 기다려! 금방 갈 거니까!”
결국 배 째라, 등 따라, 소금 뿌려라 작전이 먹혔다. 윤경헌이 직접 행차하신 댄다.
핸드폰을 옆으로 휙 던지고 다시 뒹굴 거렸다. 유현이놈은 이미 잠들어 있다.
저 잠만보 같은 새끼, 하지만 나도 잠이 온다. 경헌이 놈이 알아서 오려니 하고 누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