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백사파 백건우
“내가 선생 희한하다, 희한하다 했는데 말이야. 진짜 희한한 것 같애.”
“아이고! 의사 총각 왔으면 싸게싸게 시키소!”
정체불명의 사투리를 구사하는 아주머니가 백건우의 등짝을 척 후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세상에선 빈 통장이 가장 무서울 씩씩한 아주머니를 보며 연우는 자신을 대신해 희생한 백건우 대신 주문을 시작했다.
“여기 막창이랑 소주, 맥주 주세요.”
“아, 애들 건 됐….”
“돈 있는 양반이 이런 데까지 와서 돈 아끼는 거 아녀!”
팡! 다시 등짝을 얻어맞았다.
손을 내밀었던 자세 그대로 천천히 팔을 내밀며 순순히‘네…. 그렇죠.’하는 모습이 정말 의외였다. 백건우라면 아무리 상대가 순박한 아주머니라고 해도 참을 것 같지 않았는데.
사실 이곳이 사람도 많고, 일단 자주 와서 눈도장도 찍은 곳이라 무슨 일이 생기면 적어도 신고라도 해줄 것 같아 고른 것이었지, 백건우 일행이 이곳에서 얌전히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백건우의 조직원들은 한참 조그마한 뽀글머리 아주머니에게 꼼짝도 못하고 당하는 보스의 모습이 신기한지 몰래 키득거리기에 바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몫으로 나온 안주와 술들을 보고 신이 나서 금세 달려들어 시선은 모두 분산되고 말았지만.
“선생은 맥주? 어차피 이미 술 마셨는데 소주 하지?”
“소주는 잘 안 받아서요.”
“그거 아쉽네.”
“뭐가 아쉽습니까.”
불안했지만 궁금한 건 피해가는 법이 없는 연우가 맥주를 받으며 물었다.
“선생 소주 마시는 모습. 섹시할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었거든.”
“토하는 걸 보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하핫!!!”
별로 딱히 웃긴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뻥 터졌다. 포장마차의 조그만 조리대에서 막창을 썰던 아주머니도 이상했던지‘저건 속알맹이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선 살짝 돌은 것 같어야.’하고 중얼거리며 막 잘라낸 막창들을 대충 손으로 쓸어 담아 연우의 테이블에 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어이구야.’매일 서서 장사하느라 관절에 무리가 가는지, 무릎을 두드리며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를 쳐다보던 연우가 맥주를 조금 넘겼다. 역시 아까 거기서 생맥을 두 잔이나 먹었더니 슬슬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놓고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는 백건우를 알면서도 연우는 바른 젓가락질로 능숙하게 막창을 집어먹었다. 꼬들거리는 것을 씹어 먹으며 그는 예의상 백건우에게 권했다.
“막창 싫어하십니까?”
“아니. 잘 먹어. 그런데 지금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
설마.
“왜 그런지는 안 궁금해?”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니겠지.
분위기를 빨리 바꾸고 싶은 속마음처럼 연우는 맥주를 넘겼다.
“선생이 먹는 걸 보니까 남자 고추 잘 물게 생겨서.”
…귀를 닫을걸.
귀에도 마개가 달려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못들은 척, 이미 부른 배에 기계적으로 막창을 계속 집어넣고 있던 손을 백건우가 잡았다.
“피형욱이랑은 헤어졌어?”
“아뇨.”
아직 헤어진 건 아니었다.
“그럼?”
“아무튼 헤어진 건 아닙니다.”
흐응―.
예리한 남자가 다 알 것 같다는 것처럼 손을 놔줬다.
“아무튼 만나는 건 아니네. 지금은.”
연우의 말투를 따라하며, 반론을 제기하기 전에 냉큼 못 박았다.
휘익~. 간발의 차로 잔소리를 막은 백건우가 승리의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나한테도 기회는 있는 건 아닌가?”
“전 원래 남자한테 끌리지 않아서요.”
“피형욱이랑도 그랬으면 나랑도 할 수 있지. 나 그 누구냐. 얘들아. 나 누구 닮았단 소리 듣더라?”
기억을 더듬다가 안 되겠던지 뒤에서 이미 막창을 세접시째 비운 조직원들을 돌아보다가 쯧, 혀를 찼다. 왠지 애들 좋을 짓을 한 것 같았다.
조직원 하나가 기름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닦으며‘비입니다, 형님.’하고 거들었다.
“그렇지. 비. 내가 비 닮았단 소리 들어서 인기 좋아.”
“좋으시겠습니다.”
“세상 참 좋아졌단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같이 눈 작은 놈들은 죄다 소도둑놈이란 말 듣고 살았거든? 비가 우리 눈 작은 애들 사이에선 영웅이야.”
“그렇군요.”
하는 말에 그저 네, 네. 대꾸만 해줬다.
그걸 눈치 채고 백건우가 갑자기 사납게 눈매를 굳혔다. 비를 닮았다더니 살모사 같았다.
“나한테 집중 좀 하지?”
“하고 있습니다만.”
“선생 말이야.”
백건우가 자세를 고쳤다. 막창을 잘 먹는다고 해놓고, 그는 아직까지 한 젓가락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난 피형욱이랑은 다르거든? 걘 어려서 봐줘가며 재롱떠는지 몰라도 난 이미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 남자야. 놈이랑은 달라.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참을성 있게 봐줄지 나도 모르는데? 이렇게 막 소홀하게 굴어도 되나?”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걱정하실 텐데?
멋대로 어깨를 쓰는 손을 연우는 잡아서 내렸다.
“형제들은 모두 검찰에 있어서요.”
“거짓말.”
“농담 따먹기는 제 취미가 아닙니다.”
“뭐하는데. 검찰청 경비?”
자기가 말해놓고 대박이라고 생각하는지 푸핫! 웃는다.
“큰 형님은 검사시고, 작은 형님은 판사이십니다. 두 분 다 서울 검찰청에 계십니다.”
“……어이. 농담에 죽자 살자 덤비면 어떡해.”
현 정권이고 뭐고 죄다 농담을 모른다며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따라놓고 고사만 지내고 있던 소주를 꺾어 마시고 막창을 쑤셔 넣었다.
연우는 처음으로 형들이 경찰청이 아니라 검찰청에서 일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피형욱씨에 대해서 하신 말. 취소하십시오.”
“뭘.”
잔뜩 우겨넣은 막창 때문에 발음이 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물을 한 모금 넘긴다.
“어려서 잘 모른다는 말말입니다. 취소하세요.”
“하. 싫다면?”
백건우가 물었다.
“무서운 꼴 보게 될 겁니다.”
“누가. 선생한테? 하하! 이제 보니 농담 따먹기 할 줄 아는구만!”
건배하자며 들이민 소주잔을 연우는 말없이 물끄러미 내려봤다.
“제가 아니라 피형욱씨한테 말입니다.”
“뭐?”
안 그래도 작은 눈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분 꽤 무섭거든요. 백사씨보다.”
그리고 내밀어진 소주잔을 피해 잔에 있던 맥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제가 계산할 테니 드시다 가십시오.”
“잠깐….”
“아주머니. 이 분들 좀 잘 부탁드립니다.”
백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후다닥 계산을 마치고 웃돈까지 얹어준 연우가 포장마차 천막을 들추며 나갔다.
“씨발, 뭐하고 앉았어! 안 붙잡아?!”
“어, 예! 보스!”
먹던 막창도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장마차를 나가려던 남자들이 일제히 멈춰섰다. 입구를 떠억하니 막고 선 아주머니가 눈알을 번뜩거렸다.
“니들―. 와 우리 아들 괴롭히는데?”
“아들이요?”
“여기 와서 처묵고 하면 다 내 아들이지, 아니나!”
“저기, 아주머니.”
백건우는 오늘 하루 이래저래 피곤한 미간을 주물렀다.
“고향이 대체 어디십니까?”
“서울이다. 와! 꼽나!”
서울…….
포장마차 안의 모두가 일제히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튼. 우리 계산도 다 했으니까 그만 가볼게요. 예?”
이런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조폭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한의 아주머니들을 상대하기엔 오늘 그는 너무 피곤했다.
적당히 둘러대고 피해가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날렵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백건우라고 해도 이젠 슬슬 한계에 달했다.
“야, 이 쭈그렁 할망구야. 안 비켜?!!”
“지금 누구한테 씨부려쌌노!!!”
분노한 그녀의 짧은 팔이 냉큼 뜨겁게 찐 막창 한 줄을 집어들더니 인정사정없이 백건우의 목 주변에 감았다.
“어디 더 씨부려봐라! 니는 니네 에미한테도 그러드나! 아!”
“이, 이거, 풀어…, 컥! 썅, 니네, 뭐해…!”
목에 막창을 칭칭 감고 있는 백건우의 모습은 정말이지. 커다란 보아뱀에게 잡힌 하얀 실뱀처럼 보였다.
“하아.”
피곤하다….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연우는 씻는 것도 까먹고 바로 누웠다. 오늘 하루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아무리 세상사에 무심한 그라고 해도 정신이 없었다.
“오라는 사람은 안 오고….”
무심결에 툭 튀어나온 본심에 연우는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곧 쓸쓸하게 핸드폰을 뒤적였다.
최근 1달 동안 온 연락이라고는 가족들과 건물주인, 이 간호사가 전부다. 피형욱이라는 글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젠 찾기 어렵게 되버렸다.
“…….”
자음으로 검색하지 않고 일일이 피형욱이라는 글씨로 검색해서 찾아낸 전화번호를 띄워놓고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던 손이 꾸욱 버튼을 눌렀다.
잠금 모드로 돌아가 불이 꺼진 핸드폰을 협탁에 얹으며 연우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쩐지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을 것 같더라니.”
“여어. 선생.”
결국 지난밤의 여파로 병원에 늦게 출근하고 말았다. 이 간호사에게 미리 말을 해두긴 했지만 목욕을 하거나 옷을 입는 내내‘손님도 없는데 쉴까.’하는 무기력한 생각이 자꾸 들어 그걸 다그치고 나오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그런데 병원 문을 밀고 들어오자마자 보인 건 꺼먼 뱀 새끼들. 별로 반가운 손님들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아침은. 이제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아 점심 먹었어? 해장은 다 했나?”
친근한 척 말을 거는 백건우를 보고 이 간호사가 급히 연우의 귓가에‘어제 저 분들 만나셨어요?!’하고 속삭였다. 만나긴 만났다. 만났는데 별로 알맹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
“지금부터 진료 시간이라서요.”
뒷말은 생략했지만 그만 나가달란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기분이 나빴어야 정상인데 백건우는 그냥 피식 웃어넘겼다.
“왜 이래. 명색이 보호자 자격으로 온 거야.”
“보호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낯익은 상황에 연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백건우의 손짓 하나에 그의 등 뒤에 서있었던 병풍 조직원들이 일제히 아랫도리를 깠다.
“대박이지.”
하나 같이 성기가 실해보이도록 뭐를 달고 있었다.
“……전 제거술은 안합니다만.”
이놈의 조폭들은 제거술은 안한다는데 자꾸 이런 애들만 데려오지.
“안한다고?”
백건우가 당황하자 비장한 표정으로 아래를 깠던 조직원들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허겁지겁 바지를 끌어올리기에 바빴다. 개중에는 접수처의 이 간호사를 연신 힐끗대며 거의 울기 일보직전인 남자도 있었다. 도리어 조직원들이 어쩌실 거냐고 항의하자 백건우는 궁지에 몰려버렸다.
“단사파 애들한텐 해줬잖아. 지금 차별해?”
“어쩔 수 없이 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원래 제거술은 이런 개인 병원에서 하기 어렵고요.”
원래 보형물의 삽입은 쉽지만 제거는 대부분 시술이 잘못되거나 치기에 넣어선 안 되는 칫솔 등을 넣어 상태가 심각한 것이 많다. 그런 것들은 일반 개인병원이 아니라 큰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다들 보형물 삽입술만 하고 제거술은 꺼리는 것이다.
이게 아닌데.
계획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버린 백건우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저 서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찰실에서 환자가 있건 없건 언제나처럼 바로 수술로 들어갈 수 있도록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진료 준비를 마치고 다시 나왔을 땐 또다른 손님이 있었다. 여전히 반갑지 않은.
“설마 두 분이 짜신 건 아니겠죠.”
“난 누구신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절 아십니까?
슬쩍 묻는 폼이 어젯밤의 일을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시퍼렇게 든 멍도 그냥 술 마시고 어디 부딪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으니까.
연우는 슬쩍 선배의 시선을 피하며 도로 진찰실로 돌아가고 싶은 발을 붙드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참자. 자꾸 지난 일에 사적인 감정을 대입시켜선 안돼.
“선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제 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는 뒷말이 이번에도 배재되어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런데….”
“안에서 이야기하기엔 제가 좀 그런데요.”
이 남자랑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고 싶진 않았다. 물론 저 뱀 남자와도.
곤란한데. 턱을 매만지던 선배가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가.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남들 앞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가령 옛날이야기라던가.
“…….”
연우는 눈가를 미미하게 찌푸렸다.
하는 수 없지. 푹, 한숨을 내쉬며 진찰실로 그를 안내하자 남자의 얼굴에 바로 화색이 폈다. 반면에 그보다 훨씬 먼저 병원을 찾아와 진을 치고 있었던 백건우 일행은 차별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협적으로 으르렁댔지만 이미 연우는 선배와 함께 진찰실로 들어간 뒤였다.
원장님, 저 혼자 이 뱀무리들을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혼자 남겨진 이 간호사는 쉭쉭거리며 위협하는 남자들을 피해 접수처 안으로 바짝 몸을 숨겼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요?”
“너무 각박하게 그러지 말아라. 차 한 잔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선배님과 제가 그런 사이였나요?”
“아닌가?”
“아닙니다.”
연우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별로 시덥잖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그는 평소보다도 더 여유가 없었다. 쓸데없는 이야길 할 것 같으면 그냥 내보내자. 그리고 다신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하면 되지. 결심을 굳힌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급히 입을 열었다.
“너 미국에서 한번 일해보지 않을래.”
적당한 시점에서 남자를 내쫓을 궁리만 하고 있던 연우가 돌아보던 그대로 몸을 굳혔다.
“미국, 이요?”
“그래. 내가 지금 미국에서 비뇨기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쪽 과 병동을 키우게 돼서 새로운 인력이 필요해. 난 널 추천하고 싶다.”
저는,
하려던 말이 목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 내 이름은 기억하고 있냐?”
“아뇨.”
그럴 줄 알았지. 선배는 한숨을 쉬었다.
“한승철.”
선배의 이름을 듣는 순간, 사소한 기억 하나하나까지 잊혀졌던 것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이번엔 기억해둬. 다음에 대답 들으러 올 때까지.”
한승철이 병원을 나가고 난 뒤에도 연우는 꽤 오랫동안을 혼자 멀거니 서있었다.
? ♂ ?
기다란 테이블 위에 빈 양주병들이 빼곡했다. 모두 가게가 문을 열지 않는 이른 시각부터 룸을 점거하다시피 한 형욱 혼자 다 마시고 남은 병들이었다.
누가 말리고 싶어도 괜히 어설프게 끼어드는 날엔 저 빈 병들로 하나씩 머리를 얻어맞고 머리에 병조각으로 꽃꽂이를 하게 될까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너가 해봐. 그럼 니가 해.
조직원들 사이에서 치열한 눈빛 공방이 오고가는 사이 또 양주 한 병이 동이 났다.
“더 갖고 와.”
“보스, 이미 많이 드신….”
“아님 니 몸으로 술을 담글래.”
“…가져오겠습니다.”
결국 총대를 매봤던 한 녀석이 조용히 룸을 나갔다.
후아. 술기운이 가득한 숨을 뱉으며 옆에서 얌전히 술시중을 하던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주물럭거렸지만 별로 성에 차보이지는 않았다.
대체 의사 선생님이랑은 왜 깨지신 거야? 아냐. 깨진 게 아니라 차였다던데.
조직원들 사이에서 분분한 의견이 오갔다. 여러 가지 추론이 많았지만 분명한 건 아직 헤어진 건 아니라는 사실.
상하이에서 연호와 단 둘이서 이야기했을 때, 그는 형욱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둘이 사귀는 걸 당장 반대하지는 않지만 시간과 거리를 둬서 신중히 생각해보라는 게 그것이었다.
처음엔 형욱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성격상 남의 말대로 따르는 타입이 아니라 제멋대로 하는 제왕 스타일이라 연호가 말하는 대로 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봐버렸다. 불투명한 욕실 문 너머로 초조해하고 있는 실루엣을.
어쩌면 연우도 이 관계에 대해 연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 겪어보는 쾌락에 몸을 열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완전하게 마음을 보인 것도 아니었고, 언제든 형욱에게서 몸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아…. 또 비었네. 더 갖고 와라.”
“그만 들어가시죠. 벌써 날이 밝았습니다.”
“뭐냐. 쌍칼이냐.”
그렇잖아도 아무리 빈속에 술을 들이부어도 계속 얼굴이 생각나 죽겠는데. 가장 생각나게 만드는 놈이 얼굴을 들이미니 아주 3D 입체로 떠올랐다. 쌍칼은 처음으로 병원에 데려갔던 조직원이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데에 여러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라 최근엔 거의 기피하고 있는 인물 NO. 1이었다.
저리 꺼지라며 휘휘 흔드는 손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그가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형욱을 들춰업었다. 신장 190을 훌쩍 뛰어넘는 형욱은 부축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힘에 부쳤다.
“문 좀,”
그러니 아무리 쌍칼이라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쌍칼도 몸이 좋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보스 정도는 아니었다. 이 얄미운 남자는 체구조차 조폭 보스가 될 것처럼 점지 받아서 태어난 남자였다.
“진짜. 남의 연애사에 껴서 이게 무슨 꼴이냐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흔치 않게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어린 보스가 안타까워 혀를 찼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직접 손을 봐주는 건 어떨까요.”
“안돼. 보스가 우린 나서지 말라고 하셨다. 직접 해결하고 싶어하시니까.”
“하지만 요새 그쪽 소문이 안 좋습니다.”
“소문?”
느닷없는 말에 뒷좌석에 형욱을 눕혀놓고 조심히 문을 닫던 쌍칼이 부하를 쳐다봤다. 인적이 드문 새벽의 거리에 누가 보는 사람도 들을 귀도 없는데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손을 모아서 작게 귓속말을 했다.
“그쪽에 뱀들이 난리래요.”
뱀이라는 건 단사파에서 주로 사용하는 은어로 백사파 조직원들을 의미했다.
뭐?? 급히 고개를 들며 언성을 높인 쌍칼을 입을 부랴부랴 틀어막은 부하는 뒷좌석의 형욱부터 살폈다. 다행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술기운에도 잠귀 하난 귀신같이 밝은 보스이니 언제 일어날지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보스가 깨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거의 울 기세다.
“그게 정말이야? 뱀들이 돌아다닌다는 게?”
“그쪽 구역 애들한테 들은 이야기니까 확실합니다. 전에 보스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대요.”
허참.
이건 또 무슨 꿍꿍이속이지. 가늘게 눈을 접으며 골똘히 생각에 빠진 그에게 부하는 더 조심스럽게 정보를 건넸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애들이 다 다리를 어기적거렸다고 합니다.”
비뇨기과 병원에서 어기적거리며 나올 일은 뻔했다.
“수술 시켰군.”
이미 경험이 있는 숙련자로써 쌍칼은 부득, 이를 갈았다. 그 참신한 아이디어를 도용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히 형님이 잠시 거리를 둔 사이에.
누가 뱀 새끼 아니랄까봐 방법이 치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섣불리 알렸다간 조직 간의 항쟁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은 백사파를 쳐부술 정도로 예전의 단단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단사파로서는 괜히 나섰다간 역으로 당할 여지가 컸다.
“애들 좀 모아 놔라. 머리 좀 짜내야겠다.”
그래도 이대로 의사 선생님을 놈들에게 눈뜬 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빼앗기는 날엔 평생 이 지옥을 되풀이하게 될 테니까.
“형수님 다시 모셔와야지.”
계속 이대로 살고 싶은 생각은 아무리 피형욱을 오래 모신 쌍칼이라고 해도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