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핸드폰 상봉
“보스!!”
객실로 급히 옮겨진 피형욱이 어깨를 짓누르며 누워있는 것을 보고 룸으로 들어오던 쌍칼이 한걸음에 침대로 달려왔다. 다행히 형욱이 빈틈없이 감싼 덕에 이 간호사는 상처 하나 없었다. 게다가 모처럼 간호사라는 직함에 걸맞게 응급 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비록 처음 해보는 응급 치료라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긴 해도.
“연우, 는―,”
총알이 관통한 어깨를 짓눌리는 바람에 발음이 샜다.
날이 선 눈으로 이 간호사를 노려본 형욱은 다시 쌍칼을 쳐다봤다. 아무 대꾸도 못하게 파리한 낯을 확인하자 그는 이를 악물며 욕을 뇌까렸다.
“죄송합니다, 보스!”
선생님을 지키지 못한 손목을 잘라달라며 무릎 꿇은 채 단도를 들고 설치는 쌍칼은 쳐다도 보지 않고 형욱은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방심했다. 처음부터 놈들이 연우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설마 코앞에서 일부러 그를 빗맞게 저격하고, 진짜 목적인 연우를 납치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긴, 그래야 이름처럼 간사한 뱀새끼들이지.
부드득. 낮게 이를 갈며 형욱은 침대 아래의 쌍칼을 내버려두고 도끼를 불러들였다.
“네 놈은 당장 백사파 놈들을 수배해. 어떤 수를 써서든 연우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만 주력해야한다. 알겠어?”
“예, 보스.”
“시간이 초과될수록 우리한테만 불리한 결과를 낳게 될 거야. 어서 서둘러!”
“명심하겠습니다. 니네들은 날 따라와라.”
뒤에 있던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나가려던 도끼를 형욱은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잠시 할 말을 고르는가 싶던 입에서 그가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부탁한다니. 보스께서 그런 말을.”
발걸음이 오늘따라 무겁다.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그의 가슴이 진동했다. 별 중요치 않은 전화나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던 도끼가 멈칫했다.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줄줄이 머리를 박을 뻔했던 뒤의 부하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왜 그러십니까, 형님 하고 물었지만 도끼는 쉿,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형욱의 룸 옆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조용히 돌아가 문을 닫고 부하들의 입을 단속시켰다.
발신자는 쌍칼.
얼마 전 분실한 녀석의 핸드폰으로 온 문자였다.
? ♂ ?
“선생. 그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는데.”
남자는 일일이 0000부터 번호를 누르고 있는 연우를 한심하단 듯이 내려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백사파 1대 보스인 백건우에게 단사파 3대 보스인 피형욱이 최근 진심으로 빠진 사람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달 정도 전의 일이다. 어느새 형욱과 연우가 만난 지도 2달 정도 되가니 꽤 따끈따끈한 최신 정보였지만 처음에 그는 그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겨우 1달 만나는 걸 가지고 진지하다느니 한다면 세상에 모든 커플이 모두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는 소리나 진배없지 않은가.
별 시답지도 않은 정보로 귀만 버리게 한다며 정보제공자의 손을 손수 부러뜨려놓고 그는 얼마가지 않아 후회했다.
그의 두 눈으로 직접, 피형욱과 그 상대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길거리에서 자기와는 정반대의 남자의 손을 꼭 붙잡고 똑같은 핸드폰 회사의 쇼핑백을 들고 룰루랄라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정말 낯설었다.
‘그 천하의 피형욱이 말이지.’
백건우는 피형욱이 태어날 때부터 곁에 있었던 남자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단사파 2대 보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그는 오른팔이 되기 전, 보스의 아들을 돌보는 일을 했었다. 그 일은 일견 쉬워 보이지만 험난한 조폭의 세계에서 아직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약한 아이들은 쉽게 표적이 되곤 했기 때문에 그만큼 무척 중한 일이었다.
그가 담당한 것은 형욱 외에도 장남을 맡았지만 유독 신경이 쓰였던 것은 피형욱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피형욱은 아직 갓난아이였다. 그저 똥오줌도 못 가리고 기저귀를 찬 아이인데도 그는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다른 아이들처럼 침을 흘리거나, 시끄럽게 소리 내지 않았고 잘 먹고 잘 잤다. 가끔은 이 애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조용했다. 어린 아이를 인형도 아니고, 기계에 비유한다는 게 좀 그렇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만큼 아이는 인간으로서의 정이 부족해보였다.
‘하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지.’
피형욱의 모친은 일본 야쿠자 보스의 셋째 딸로, 어릴 적부터 조직의 생활이 몸에 베인 무서운 여자였다. 그녀는 우연히 담합을 위해 일본에 왔던 단사파의 2대 보스를 만나게 됐고 사랑에 빠져 그가 일본에 체류하던 동안 아이를 가지게 됐다.
하지만 이미 남자는 한국에 부인은 물론, 아이들까지 있었고 조직의 뒤를 이을 아이는 충분했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 야쿠자 보스의 딸은 단사파 내에서도 불편한 존재였다.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형욱의 부친은 결국 그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반대 의견을 무시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살벌한 집안의 분위기와 보스의 여자들, 그리고 그녀들의 아이들의 시샘은 제아무리 야쿠자의 자식으로 자란 강인한 여자라고 해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산달을 모두 채웠고, 마침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험한 생활을 이겨냈던 그녀가 극심한 산고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다 죽어가던 그녀는 아이와 산모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지체 없이 스스로 아래에 손을 넣어 아이의 다리를 붙잡아 꺼내고 죽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간신히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게 그녀가 한 마지막 행동이었다.
그렇잖아도 위험한 여자가 낳았는데 지켜줄 어미도 없어졌으니 형욱은 나면서부터 철저하게 방치됐다. 아이는 제가 엄마를 죽이고 나온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을 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본처가 죽고 호적에 오르게 된 두 번째 부인이 그를 챙겨주었지만 그 전까지는 엄마도 없는 피형욱을 신경 쓰는 사람은 집안에서 보스가 고작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또 하나의 지원군으로 나타난 게 백건우였다.
“후…….”
오랜만에 신기한 사람을 봐서 그런가.
구석에 처박아두고 있었던 옛 생각이 났다. 자신을 키워준 보스와 그의 여자를 함께 죽이고, 친자식처럼 키웠던 보스의 아이들까지 직접 죽이던 백건우를 향해 피형욱은 말했었다.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이지 않게 숨어 다니는 게 좋을 거야. 그게 키워준 정으로 해주는 내 마지막 경고다.’
부모도, 조직도, 돈도 아무 것도 없이 단순한 미성년자에 불과한 아이가 내뱉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참 무시무시한 협박이었지만 어차피 백건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를 죽이려고 사람을 풀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에 그가 예전의 단사파 멤버들을 모아 기어코 부흥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 있던 야쿠자인 그의 외할아버지가 도움을 준 것이다.
“선생, 아직 멀었어?”
“이제 천 번 깼어요.”
“모르는 거 아냐? 기술자라더니. 공고생이었는데 의대 붙어서 신문에도 나왔었다고 했잖아. 그거 다 뻥 아냐?”
“인터넷 찾아보시면 나옵니다.”
“인터넷…. 관두자. 하던 거 계속 해.”
언젠간 나오겠지. 9999까지 하면 안 나올 건 뭐야.
어차피 그전까지 이 남자는 백건우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옆에서 조직원들이 저렇게 멋대로 하게 내버려둬도 좋은 거냐고 불안해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머리통을 쥐어박아주고 백건우는 담배를 즐겼다.
사실은 저 무심한 남자가 남의 핸드폰―그것도 조폭의― 암호를 풀겠다고 열중해 있는 걸 보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신기한 남잘세.’
피형욱도 그랬지만 소연우라고 하는 저 비뇨기과 의사도 제법 신기했다.
“선생 피형욱이랑 만나게 된 거, 정말 비뇨기과가 처음이었어?”
“예. 선생님 한 분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뭐 때문이었는데?”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서 그랬는지 피형욱은 어릴 때부터 부모가 물려주신 몸은 소중히 해야 한다고 우겨, 또래 친구들이나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다. 문신은 기본이고, 하다못해 귀를 뚫는 것도 싫어해서 귀걸이를 한 여자들은 사귀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충 비뇨기과까지 왜 데려갔는지는 예상이 갔지만 굳이 물어보는 건 형욱이 아니라 이 남자, 순전히 소연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봐도 좋았다.
“음낭에 보형물을 넣으셨었습니다. 보통은 음낭엔 잘 안 넣으시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음낭과 성기의 비율이 맞지 않아 평소 고민이셨다고 합니다.”
“푸핫! 뭐야, 그거. 그런 거 말해도 되나? 환자들의 비밀이잖아.”
“이렇게 된 거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이대로 두 번 뵙지 않게 될 지도 모르는데.”
“호오.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피형욱이 반드시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건가.
지레짐작하고 코웃음을 치던 백건우에게 연우는 한방 먹였다.
“그 반대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눈도 가리지 않았으니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뭐….”
백건우가 잠시 당황한 사이였다.
연우는 핸드폰으로 접속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확인한 자신의 위치를 문자 메시지로 도끼에게 전송하고 냉큼 종료 버튼을 누르고 일부러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우악! 이 새끼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
바로 멱살을 움켜쥐며 으르렁거리는 남자에게 연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두 팔을 들어보였다. 사실은 당황한 척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예전부터 연기는커녕,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풍부한 표정이 중요한 영어 회화에서도 발음은 정말 좋은데 표정이 영 딱딱하다고 주의를 받았던 터라 남들 보기엔 그저 무감해 보이기만 했다. 딴에는 부단히 노력한 거였지만.
“너 일부러 그런 거지! 형님, 이 새끼 말 믿지 마십시오. 옛날부터 가방끈 긴 새끼들 말 믿는 거 아니라잖습니까. 머리에 든 거라고는 죄다 약아빠진 것 밖에 없는 놈들이라고요!”
“머리에 든 게 여자뿐인 네 놈보단 나으니까 그 손 놓고 핸드폰이나 갖고 와.”
“보스!”
억울한 듯 항의하는 남자에게 백건우는 가차 없이 품에서 총을 꺼냈다. 실탄이 장전돼 언제든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진짜 총이었다.
“아니면 네가 저 핸드폰처럼 머리 박을래.”
“……잘못, 했습니다.”
두 번 말대답하지 않고 순순히 붙잡고 있던 멱살을 내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어 공손하게 백건우의 손 위에 반납한 남자가 연우를 노려봤다.
남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돌려받은 백건우는 다시 폰을 켜보더니 처음과 변함없이 암호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선생. 어디까지 했다고?”
“1800번까지….”
“아, 내가 말 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도중에 말을 잘라먹은 백건우가 대뜸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남자의 재킷 안에 숨었다가 다시 나타난 손에는 다른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액정에 노랗게 불이 들어온.
“이거 대포 폰을 만들어놨었거든.”
창백하게 질린 연우의 얼굴을 보고 백건우는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대포 폰을 뒤적거려 발신 목록 확인까지 모두 마친 그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핸드폰을 부하에게 던져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권총이 그의 손아귀에 남아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줘서 고마워서 어쩌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도 선생 네 병원으로 환자 좀 보내줄게. 아마 뒤져보면 우리 조직 안에도 많을 거야.”
“…감사합니다.”
끼릭. 잠금장치가 풀린 총구가 연우를 향해 섰다.
“선생 참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게 됐네.”
“저도 그렇습니다.”
“호오. 그럼 피형욱한테서 나한테 옮겨 타려고?”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하. 즐겁게 웃으면서도 백건우는 총을 놓지 않았다.
“진짜 재밌어. 시간만 되면 나도 참 괜찮은 남자라는 거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거 안타깝게 됐습니다.”
“그래, 그런 시크한 것도…. 난 나쁘지 않거든.”
두 팔을 들어 올려 항복 자세를 취한 채로 서있던 몸을 노리던 총이 잠시 느슨해졌다. 그리고 팔이 다시 올라왔을 땐,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끌어안은 연우에게 입술을 겹치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공격을 당한 연우가 입을 다물었지만 백건우는 입술을 콱 깨물어서 강제로 벌리려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강하게 다문 입술을 열진 못했다. 결국 이리저리 지분거리기만 하고 피맛 나는 입술만 핥다 끝이 나버린 키스를 관두고 백건우는 두 팔을 놨다.
“진짜 못 당하겠다.”
픽, 웃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때 저만치서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연이어 터지는 총소리를 피해 부하들이 백건우를 급히 감쌌다. 부하 중 하나가 연우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함께 끌고 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백건우는 그 손을 놓게 했다.
“보스!!”
“선생은 내버려둬. 걸리적거리기만 한다.”
“하지만 피형욱일 막으려면!”
“그 놈이 인질 붙잡아뒀다고 고분고분 굴 놈 같아? 철수해!”
게다가 이미 놈의 머리엔 불이 붙었다고.
분명 방금 전 들렸던 첫 총소리는 피형욱의 것이었다. 급히 부하들이 차를 끌고 오는 중에도 멍하니 제자리에 방치된 연우를 돌아본 백건우가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선생, 선물이다.”
품에 던져진 쇼핑백은 병원에서 사라진 바로 그것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놓고 당황한 연우의 표정을 보고 백건우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다음엔 봐주지 않을 테니까. 고추 얌전히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어.”
다음에 만날 땐 아래 벌거벗고 고추끼리 상견례라도 하자는 걸까. 훌쩍 차에 올라타 사라지는 백건우의 뒷모습을 쫓으면서 연우는 품에 안겨있는 쇼핑백의 안을 확인했다.
하나둘셋…. 분명했다. 피형욱의 조직원들이 갖고 있던 핸드폰과 디자인도, 숫자도 딱 맞았다.
그런데 이걸 왜 다시 돌려준 거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있던 연우의 등 뒤에 갑자기 커다란 충격이 닿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바닥을 나뒹굴 뻔했다가 간신히 추스르고 돌아보는 몸이 익숙한 체온에 안겼다.
“연우야…!”
피형욱이었다. 그의 어깨에 코를 박고 있던 연우는 또 다른 익숙한 냄새를 맡고 내내 안고 있으려는 팔을 풀고 다짜고짜 셔츠를 끌어내렸다.
“연우야, 아무리 만난 게 반가워도 이건….”
“다쳤잖아요.”
“아아. 괜찮아. 이 간호사가 급한 건 막아줘서,”
“이런 몸으로 왜 싸돌아다녀요, 왜!”
아니, 님아가 납치됐잖아요….
원래는 만남의 광장 자리 좀 가지고, 백사 새끼랑 키스했던 것에 대해 추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피형욱의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연우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회수해 물건을 확인하며 조직원들은 귓구멍을 오픈해뒀다.
“사람이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위험하다고 했던 게 누군데. 그러고 어떻게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겠다고. 아무리 깍두기여도 그렇지 그렇게 묵은 내 폴폴 풍겨서 뭘 하냐고요!”
“아니, 깍, 묵…. 참나. 내 어디서 냄새가 난다고 그래! 나 목욕 잘하거든?!”
“누가 지금 그런 말 하고 있는 줄 아냐, 이 머저리 블랙 깍두기야!”
터졌다. 결국엔 반말이 터졌어.
애써 외면중인 조직원들의 눈이 전쟁 중의 전보처럼 서로 바삐 오갔다.
“이게 진짜, 오냐오냐 하니까…!”
처음엔 당황해서 말을 잃었던 피형욱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번쩍 팔을 올렸다. 뒤에서 이를 어쩌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 간호사가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역시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입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에겐 들리지 않도록 등진 채로 중얼거린 조직원들은 조용히 자리를 정리했다. 공안들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하는데. 아무래도 보스가 분위기를 탄 것 같았다.
“저기요, 보스….”
우리 이제 가야 하는데요.
뭐 필요한 게 있는 애 마냥 방치된 차를 가리키던 조직원의 말에 겨우 입술을 놔준 형욱이 도로 터져 피가 나오고 있는 입술을 빨며 쯧, 혀를 찼다.
“아무한테나 주둥이 내밀고 말이야….”
노골적으로 키스의 전적인 책임을 떠넘기는 말투에 키스로 잠시 안드로메다로 여행 갔던 소연우 시크 레이더가 돌아왔다.
“주둥이 내밀고 돌아다닌 적 없습니다만.”
“그래? 애들한테 물어볼까? 선생이 어쨌는지?”
바람난 마누라 추궁하는 남편마냥 피형욱은 이제 그만 소모적인 말싸움은 끝내고 차에 올라타려는 연우의 앞을 사사건건 막았다. 번번이 실패에 그치자 극도의 긴장감이 풀리고 피로가 쌓여있었던 연우도 좋게 말할 턱이 없었다.
“적어도 누구처럼 끌어안고 호호거리지 않았어요.”
“호호…. 내가 언제 누굴 끌어안고 호호거렸다고 그래!”
“선생님들께 여쭤볼까요? 어디의 누가 그러셨는지?”
“그래. 물어보자. 물어보자고. 허! 마침 잘됐네. 이제 누가 거짓말쟁이인지 판가름이 나겠어. 내가 맞으면 어쩔래? 뭐 걸 거야.”
사실이면 사실로 끝나는 거지 또 뭘 걸란 소린가.
조직원들이 미는 대로 떠밀려 간신히 차에 탄 뒤에도 둘은 계속 아웅다웅거렸다. 저렇듯 험악하게 싸우니 차 안의 아무도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정말 저 둘이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시선만 회피하고 있었다.
“정 그렇게 뭘 거시고 싶다면 좋습니다. 이 차 주세요. 제 말이 맞으면.”
“받고!”
…움직이는 도박장이 된 건가.
왠지 차 안의 모두가 그대로 두 사람이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코인이 된 것 같았다.
호탕하게 외치는 피형욱에게로 모두의 이목이 지목됐다. 시가 3억 짜리의 차를 걸었다. 그럼 그 대가로 과연 그는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마침내 억만의 세월동안 굳게 다물려 있는 것 같았던 입술이 열렸다.
멀쩡히 잘 달리던 차가 비틀, 한쪽으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