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진짜 납치 2
한창 항소심건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소연호의 핸드폰에 미미한 진동이 울렸다. 액정이 밝힌 발신인은 [개판사 소연한].
이놈이 또 뭘 약 올리려고 전화한 거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소씨 가의 맏형이자, 검사라는 이유로 전화를 피하지 못하고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았다.
제발 판사 동생이 검사 형 끌고 강남에 텐프로 보러 가잔 이야기는 하지 마라. 속으로 빌면서.
“무슨 일이야.”
[완전 큰일 터졌어, 형!]
“넌 항상 큰일이잖아.”
법정에선 꽤 침착한데 이상하게 내려와서 판사복만 벗으면 애가 좀 정신이 분열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언제나 있는 그 정도겠지. 싶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쪽 어깨로 핸드폰을 받치고 서류들을 넘기던 연호가 갑자기 낯을 찌푸렸다.
“뭐? 연우가 사라져? 납치? 무슨 소리야.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증발을 해. 아니, 침착하게 정리 좀 해보자. 네가 보기에 납치란 거야? 그냥 어디 간 것 같지 않고?”
[병원이고 집이고 지문 하나 없이 깡그리 빈 상태라고! 알아보니까 간호사도 실종됐대! 내가 마지막에 그 놈이랑 통화했었는데 연우 핸드폰이 병원 접수대에―….]
“그 놈.”
헉.
연한은 잠시 자신의 주둥이를 손으로 막았다. 나 혼자 알고 내내 골려먹다가 해결하려고 했는데. 꼴에 검사라고 예리한 연호의 레이더를 생각하지 못했다.
아…. 소연한. 이 바보 멍충이.
[그, 러니까―, 그게….]
“넌 짐작 가는 놈이 있는 거지?”
마우스를 움직여 잠시 잠자고 있던 모니터를 깨운 연호가 기본 바탕화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꿀꺽.
이 새끼 이렇게 예리한데다 독기까지 품고 있는 게 여태 한번을 못 이겼지.
본인이 이기지 못하게 막은 거란 의식은 일체 없는 소연한은 결국 사실대로 불고 말았다. 어차피, 그의 도움이 필요하던 차였다.
[피형욱이라고. 21살이야. 단사파 보스고. 요새 연우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걸 알았는데, 아마 그 놈이 데려간 것 같아. 이 놈 어디로 갔는지 좀 알아봐줘.]
기다려봐.
키보드 자판을 몇 개 두드리자 흔치 않은 이름 덕택에 검색 결과가 적었다. 그 중에 가장 열람수가 많은 것을 클릭하자, 피형욱의 정보가 화면을 차지했다.
“특급 관리 대상…. 정말 단사파 보스네. 18살에 단사파와 백사파로 분열되는 와중에 일어난 싸움에서 형제들 다 죽이고, 조직원들 포함 최소 백 명은 죽였다고 돼있군.”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성이지.
피 씨라는 성에 원래부터 유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조직의 보스, 그것도 정말 피를 뿌리고 다니는 사내가 성마저 피 씨라니.
“넌 어떻게 된 애가, 동생이 그런 저질 쓰레기랑 놀아나고 다니는데 알면서 그런 걸 방치하고 있어. 어?”
[아니, 그게….]
옷을 챙겨 입는 걸 보고 부탁한 차를 내오던 여직원이‘어머, 벌써 퇴근하시게요?’하고 말을 붙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노트에 뭐라고 글을 끄적거린 연호는 이미 피형욱에 대한 정보를 모두 토해낸 프린터기 앞에서 A4용지 15장을 샅샅이 훑었다.
“나 먼저 나가지.”
“수고하셨어요.”
뒤에서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연호는 문 앞의 명패 상태를 퇴근으로 옮겨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뻔하지. 또 혼자 실컷 놈이 지칠 때까지 갖고 놀다가 해결할 셈이었겠지. 옛날부터 네 수법은 뻔했어.”
[형, 수법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난 그냥 좀 더 신중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시끄러워.”
연호는 말을 잘라먹어버렸다.
“새로 보고된 바에 따르면, 피형욱이는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주최하는 모임 때문에 인천항을 출발해서 상하이로 갔다. 전 세계의 거물 조폭들이 모이는 자리야.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할 수 있어.”
대체 동생이란 것들이 하나같이 정말…!
지하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일일이 인사를 다 받아주고 차에 올라탔다. 내비게이션으로 인천 국제공항을 입력했다.
[그, 그럼 우리 연우는 어떻게 되는 건데.]
바보처럼 묻는 말에 출발 준비를 마친 차의 액정에 불빛이 들어왔다.
“어떻게 되긴, 찾으러 가야지.”
나오면서 여 직원에게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 티켓과 단사파가 묵고 있다는 호텔의 예약을 부탁해뒀다.
와, 역시 소 검사….
바보처럼 감탄하는 판사 동생에게 그는 험악하게 뇌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녀석은 여기 있어. 인터폴 측에 지원 요청을 해야 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르니까. 상하이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겠다.”
바보 판사 동생이 뭐라고 계속 떠들건 말건 용건이 끝난 연호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부릉―, 서울지방검찰청을 빠져나가는 연호의 차는 다른 차들 사이에 흡수되어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 ♂ ?
“쌤. 겁나지. 겁나지.”
“이런 거 봤어?”
“캬캬캬! 저거 완전 쫄은 거 봐라. 아마 거시기까지 쪼그라들었을 거다.”
의자 뒤로 팔이 묶여있는 연우의 앞에서 웃통을 훌러덩 벗고 승천하는 용이라던가, 포효하는 호랑이, 해골 등등의 문신을 깍두기들이 뽐냈다. 원래는 납치된 게 아니라 문신 바디빌딩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문신이란 게 자기만족이 아니라 남한테 보여주려고 한 거였구나.
이 정도 감흥을 느낀 거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문신이라고 해봤자 그림이고, 게다가 근육으로만 꽉 찬 몸이 아니라 살이 더 많을 정도라 괜히 더 무섭게 분위기를 애써 조장하려고 문신을 박은 것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피형욱의 몸을 봤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는 문신 하나 없이 깨끗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몸을 빼곡하고 성실하게 채운 치밀한 근육들이 아름답고 무섭게 만들어주었었다. 사람의 몸이란 게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정반대의 감탄을 하게 만드는 신비한 몸이었다.
그런데 이번 총격으로 그 신비한 몸에 씻을 수 없는 흉이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해졌다. 어쩌면 흉만 남는 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처음으로 해부 실습을 했을 때도 이렇진 않았었는데.
만약 그때 이런 현기증을 느꼈더라면 의사도 되지 못했을 거고, 피형욱을 만나 이런 일을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의사가 돼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형욱을 만나 조금씩 달라질 수도 없었을 테니까.
비록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달갑지 않지만.
‘그는 무사할까.’
피형욱도, 소연우도 무사해야 나중에 만나 뭐라고 투정이라도 부릴 수 있었다. 둘 중에 하나만 생사의 길이 갈려도 얼굴도 못 보고 영정 사진 앞에서 투정을 부려야 할 판 아니던가.
앞에 무시무시한 조직원들을 놔두고서도 태연하게 다른 생각에 빠진 연우를 뒤늦게 알아차린 남자 하나가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가 나면서 이마가 따끔거렸다.
“뭐야….”
남자가 불퉁거렸다.
“재수 없게. 반지에 피가 묻었잖아.”
재수 옴 붙었다며 싸구려 손수건으로 커다란 알이 박혀있는 반지를 벅벅 닦았다. 아마 아물고 있었던 이마의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다. 하필 맞아도 거길 맞나….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시야를 방해했다. 어차피 이 정도 상처로 죽진 않지만 손이 묶여있어 피를 닦지도 못해 눈도 뜨지 못하는 상태라 영 불편했다.
“하나 부탁 좀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잡담을 하던 조직원들이‘뭐야, 저거….’하고 중얼거렸다. 엄연히 납치당했고, 험악한 분위기에 혼자 손발이 의자에 묶여 있는데도 태연한 게 영 못마땅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래봬도 연우는 나름 동요하고 있었다. 일단 피형욱의 생사,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도 없고 핸드폰 하나 없이 납치된 자신을 그가 무사히 찾을 수 있을 것인가와 어떻게 해야 위치를 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 영화 같은 거 보면 주인공들은 잘만 위기를 모면하던데.
한동안 저들끼리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가늠 해보는 것 같더니, 어차피 묶여 있는 데다 몸수색에서 핸드폰도 나오지 않았으니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았나 보다.
“부탁이 뭔데.”
이 남자가 여기선 제일 높은 건가.
아까 다른 사내들이 문신 자랑 대회를 하고 있을 때도 홀로 거리를 두고 있었던 남자다.
연우의 눈에 남자의 가슴포켓 쪽에 달린 뱃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뱃지였다.
“설마 파 이름이 백사파 같은 건가요?”
말하면서도 설마 했는데.
“대단하군. 맞아.”
정답이었다.
그냥 흰 뱀이 있기래 물어본 것뿐인데. 역시 우리나라 조폭의 한계는 순수 한글 아니면 간단한 한문인가.
“그래서. 부탁은?”
남자가 재촉했다. 만약에 한번만 더 같은 말 하게 만들었다간 다신 입 벌릴 수 없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처럼 돌려서 들렸다.
그 사이 피가 또 흘렀다. 처음보단 조금 덜 흐르기는 했지만 찝찝한 건 찝찝한 거였다.
“피 좀 닦아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여기 오래 있을 거라면 좀 편하게 있고 싶은데요.”
뭐 이런―….
남자들의 얼굴에서 같은 생각이 나타났다. 기왕 있을 거 좀 편히 있겠다고 닦아달라고 한 건데. 그게 뭐 저렇게 경악한 표정을 지을 만큼 이상한 건가.
“싫으시면 손을 앞으로 묶어주시기만 하는 거라도 안 되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닦을 테니까―.”
“됐어.”
어깨로 어떻게든 닦아보려는 연우의 행동을 중단시키고 남자는 직접 손수건을 갖고 다가왔다.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리려고 했지만 연우가 무슨 시한폭탄도 아니고. 조폭과는 무관한 남자가 손발이 다 묶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남자는 턱까지 흘러내린 피를 꼼꼼히 닦아줬다. 혹시 거칠게 해서 상처가 도로 터지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을 모두 불식시켜주는 조심스런 손길이었다.
“이제 됐나?”
손수건을 접으며 다시 뒤로 물러나는 남자에게 연우는 순순히‘됐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했다. 고마웠으니까 인사를 한 것뿐인데 남자의 표정은 또 묘해졌다. 이미지와 달리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남자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이마에 손이 닿아서 조금 놀랐다.
남자는 피 때문에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뒤로 걷더니 피를 뻐끔거리는 상처를 확인하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전에 다친 상처를 보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이마를 다쳤었습니다. 그게 조금 찢어진 것뿐일 겁니다.”
“그런 것 같군. 하필 상처부위를 건드렸네.”
그냥 그런 것 같네. 라고 말한 것뿐인데 내내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하던 뒤의 사내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역시 이 남자가 실세인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될 지도 이 남자가 정하는 건가.
“…뭐야, 그 표정은.”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나. 남자가 불쾌해했다.
연우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눈은 안 가려도 되는 겁니까.”
“눈을?”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낯을 찌푸린다.
“보통 납치 같은 거 해오면 눈을 가리지 않습니까? 안대라던가, 포대자루라던가―,”
“그런 곳에 갇히고 싶나, 선생?”
“아뇨.”
갇히고 싶을 리가 있나.
“그럼 조용히 있어. 얌전히만 있으면 우리도 더는 거칠게 대하지 않을 테니까.”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됩니까.”
막 돌아서려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직―, 남자의 구두 아래에 깔린 모래가 바닥에서 울었다.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에 조금씩 색이 더해졌다.
“정말 궁금한 것도 많은 선생이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무서워서 오금을 지리던데.”
“저도 그게 희한합니다. 생각보다 덜 긴장되네요.”
“거짓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상황에.”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보통은 크게 동요를 보이며 두려워하거나 살려달라고 큰 소리를 치기 일쑤다. 조폭 생활 이십여 년 만에 이런 인질은 처음이다.
가만히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소연우의 눈을 마찬가지로 지지 않고 바라보는 남자에게 연우는 입을 열었다.
“저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핫! 여태껏 살 수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선생이 처음이군.”
영광이라고 해줘야 하나.
연우는 말똥말똥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밌는 선생이로네. 왜 피형욱이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 처음엔 놈이 진심인 상대가 남자라기래 드디어 미쳤구나, 생각했었는데.”
“형욱씨가 좀 이상한 분이긴 해도 미치진 않았습니다.”
“피형욱을 미친놈이 아니라고 감싸는 것도 희한하네.”
주변의 사내들이 남자의 말에 키득거렸다.
그렇구나.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이 남자들, 백사파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피형욱이 있는 단사파와 적대관계의 조직인가 보다. 혹시 전에 연한이 말했던, 피형욱이 피를 불렀다던 그때의 일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연우는 지레짐작했다.
조직의 일이라는 게, 쉽게 원한 관계가 쌓일 수 있다는 건 어렴풋이 매스컴을 통해 알고는 있지만 그가 알고 있는 피형욱이라는 남자는 사소한 문제로 이렇게 멀쩡한 일반인을 괴한에게 납치되게 할 만큼 위험에 빠뜨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좀 전에 남자가‘피형욱은 미쳤다.’고 한 말에도 부정한 것이었고.
형욱은 오히려 연우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의미로는 가장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기적이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요즘 사람―또는 조폭― 답지 않게 조직원들까지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도록 했고, 그들이 수술 이후에 거동이 불편할 때에도 자신의 차로 직접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연우를 보려는 핑계 거리에 불과했지만 그 귀찮은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소화한 데에는 분명 한 치의 거짓이 없다.
피형욱 외의 다른 조폭 앞에서도 굴하는 법 없이 묶여있는 상태에서도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앉아있던 소연우의 뒤로 남자는 돌아갔다.
“엇, 보스….”
설마 보스였던 건가.
중간 정도나 예상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애들이 말릴 틈도 없이 밧줄이 풀러졌다. 내내 불편하게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자 막혀 있던 피가 확 터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묶는 것이 없는데도 아직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붉은 자국이 남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연우의 앞으로 작은 기계 하나가 내밀어졌다.
“이건―….”
연우의 기억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선생이라면 알겠지.”
이 간호사가 팔아버렸다던 조직원들의 사라진 핸드폰이었다.
“풀어, 비번.”
그것이 백사파 보스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