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물 파손
“내놔.”
여기서 문제.
다짜고짜 숨을 헐떡이며 찾아온 사람이 한 이 말에‘아, 여기요.’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저한테 뭐 맡겨놓은 거 있으셨습니까?”
“시치미 떼지 말고 빨랑! 지금 선생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못됐어! 의사가 이런 짓해도 돼?”
이번엔 비난쇄도다. 누가 보면 돈을 떼어먹었다던가, 사기 연애를 했다던가 하는 줄 알겠다.
“아니, 뭔지나 알아야….”
“쇼핑백!”
아아. 그제야 연우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 쳤다.
‘아아?’연우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형욱의 미간에 홱 주름이 졌다.
“내놔.”
“지금 없는데요.”
“버렸지, 버렸지, 버렸지!!”
“집에 있습니다.”
“집…! …그래? 우리 연우네 집에 있다는 거지? 내 소중한 쇼핑백이.”
핸드폰 액세서리는 다 뺀 박스와 직원이 설명하는 내내 낙서장으로 전락한 제품설명서가 들어있던 쇼핑백이 언제부터 소중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 함께 샀던 핸드폰의 쇼핑백을 말하는 거라면 연우에게 있었다.
어제 정조를 지키기 위해 달리던 차문을 열었던 연우는, 때마침 오토락이 해제되어 있던 차에서 튕겨져 나왔다. 다행히 재빨리 피형욱이 몸으로 감싼 덕에 다친 부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단지 형욱이 너무 세게 감싸느라 오그라들었던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고 당기는 것 외엔 지극히 정상이었다. 문제는 형욱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근처의 병원에 전화를 넣으려던 연우의 핸드폰을 이 진상 조폭 보스가 부러뜨리면서 시작됐다.
빨간약은 아픔을 멎게 하는 만병통치약이라며 죄 없는 조직원들까지 시켜 눈을 반짝반짝 빛내게 해서 억지로 자기 집에 데려가더니 느닷없이 방심한 틈을 타 덮치려고 했다. 대뜸‘자자.’고 하기래 ‘자지 말고 사귀자.’했더니, 그 말에 신이 나서는 연애의 시작은 핸드폰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알 수 없는 논리를 내세워 멀쩡한 자신의 핸드폰은 냅두고 그대로 연우의 손을 잡고 폴짝거리며 핸드폰 가게에 가서 무려 커플 폰으로 맞췄다. 싫다고 했는데도 요금제도 강제로 커플 요금제로 가입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연우가 했던‘자지 말고 사귀자.’는 말의 뜻은 안타깝게도 피형욱의 의도와 달랐다. 자지 말고 친구로 지내자는 의미로 돌려 말한 것이었는데, 문자 그대로 직역한 유기농 초고급 블랙 깍두기께서 제멋대로 오바하신 것 뿐. 연우의 죄는 없었다.
그런데 집으로 바래다준다며 걷던 길에―멀쩡한 차 냅두고 사귀자는 말에 정신 팔려 뛰쳐나오느라 차를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사진을 찍는 둥, 길 가는 사람에게 괜한 해코지를 하는 둥 시끄럽기에 입 좀 막으려고 하던 차에 마침 눈에 띈 별 다방에 들어가자고 한 게 다다.
‘그걸 또 오해해서는 모텔에 가는 줄 알았다고 투정을 부렸지.’
과연 그 덩치에 투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목울대를 만지는 바람에 얼굴에 커피를 뿜었고, 화장실에 끌려갔다가 닦아준답시고 가까이 얼굴 들이밀었더니 키스 당했다.
그래. 처음 키스 당한 것도 아니고, 키스 자체는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형욱이 연우의 몸을 더듬으며 더 깊은 단계로 넘어가려고 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짧은 몸싸움 비슷한 것이 오갔고, 소란을 듣고 온 직원이 들어온 틈을 타 연우가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급한 마음에 그만 쇼핑백을 둘 다 들고 와버렸는데, 조직원들에게서 압수한 핸드폰이 모두 연우의 쇼핑백 안에 들어있었고, 형욱의 것은 잡동사니뿐이었다. 처음부터 급한 마음에 연우의 것에 잘못 넣은 게 원인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 자기가 잘못한 거면서, 번번이 책임은 남에게 떠넘기려는 태도에 연우는 조금씩 화가 나고 있었다. 화라고 할까. 조금 넌덜머리가 났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형욱은 자연스럽게 얻은 연우의 집에 갈 기회에 마냥 들떠 있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연우를 결국 놓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조직원들의 핸드폰이 들어있던 쇼핑백이 함께 없어진 걸 알고 얼마나 애들을 족쳤던가. 망을 보고 있었으면서 가는 걸 그대로 내버려두냐고 당장 발기부전 테스트하게 만들 거라고 엄포를 놓고 왔었는데.
헤죽.
제 딴엔 보는 시선 없이 몰래 웃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연우는 다 봐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피형욱은 금세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고치고 연우가 앉아있던 의자에 팔을 걸치며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 퇴근하고 같이 갈까?”
“오늘은 차트 정리가 있습니다.”
“내일도 괜찮지 뭐.”
“내일은 세미나 때문에 출장가야 합니다.”
“그럼 모레….”
“모레는 약속이 있고요.”
부글부글. 혈압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것만 같다. 형욱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못 본 척 태연하게 컴퓨터를 만지는 연우의 의자를 자신을 향해 아예 휙 돌렸다.
“소연우.”
“예.”
“너 나 피해?”
“많은 환자 분을 손수 끌어 와주시는 분을 제가 피할 수는 없죠. 어차피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는 게 의사와 보호자의 관계 아닌가요?”
허. 이거 진짜 뭐가 꼬였나보네.
분명히 피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저는 아니라고 잡아떼니 더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의사 선생이 이러면 나도 수가 있지.
피형욱의 입술이 비열하게 올라갔다.
“그래. 우리 연우 말이 맞지. 의사랑 보호자는 피하려고 해도 할 수 없어. 해도 안 되지. 안 되고말고.”
얘가 또 어쩌려고 이래.
느닷없이‘어이쿠, 어이쿠 내 새끼. 말도 잘 한다.’강렬하게 호응을 하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감은 안 잡힌단 표정이다.
그러니까 선생이 실수한 거라니깐?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건드리길.
피형욱은 방향을 틀어 의자 뒤로 돌아가 최근 급증한 병원 일로 딱딱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힘껏.
솔직히 그는 좋은 말로라도 안마를 잘한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렇잖아도 손도 솥뚜껑만한데 그 손으로 해봐야 얼마나 잘할까. 그저 잡고 쥐어 비트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 연우, 시원해? 아유. 아주 좋아 죽네?”
“그만, 하세요.”
“뭘 그만해. 이렇게 딱딱하게 뭉쳤는데.”
이번엔 아예 팔꿈치를 세워서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에 대고 짓눌렀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몸을 억지로 앉히고 피형욱 식 제멋대로 안마는 계속 됐다.
흥. 네가 이래도 실토하지 않을 거냐? 여태까지 내 안마 고문을 피해간 사람은 없었다고?
그러나 요리조리 몸을 혹사시키는 안마에도 소연우는 필사적으로 입술까지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처음엔 입을 열게 하는 데에만 주력하느라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형욱은 모니터에 비친 모습을 보고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뭐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왠지 말도 못하는 짐승을 괴롭힌 것처럼 영 마음이 찜찜해졌다. 결국 자의에 의해 안마 고문을 중단하자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얼마나 눌렸는지 아마 옷을 벗어보면 분명 빨갛게 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어깨 내밀어봐.”
“이제 충분하지―,”
설마 또 하려는 건가 싶어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린 연우가 아, 탄성을 뱉었다.
그게 아냐, 바보. 타박을 하면서도 찬찬히 어깨를 주무르는 커다란 손은 온기도 있어 제법 시원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안마에 처음엔 긴장을 풀지 못했던 연우도 점차 부드럽게 몸이 풀렸다. 이렇게 편하게 안마를 받고 있으려니 그간의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편안하게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이더니 의자를 움직여 형욱의 손길을 피했다. 안마를 받다 말고 갑자기 기행동을 보이는 연우를 의아한 눈으로 형욱이 지켜봤다. 그렇게 안마를 아프게 했었나 솔직히 찔리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너 민증 까봐.”
“뭐?”
난데없는 반말에 형욱은 일순 당황했다. 게다가 민증이라니?
말의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형욱의 앞에 보란 듯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연우의 것에는 선명하게 77로 시작되는 주민등록 번호가 찍혀 있었다.
헙. 갑자기 합죽이가 됐는지 할 말을 잃고 슬금슬금 진찰실을 빠져나가려던 형욱의 옷이 붙잡혔다. 평소 잡으랄 땐 안 잡고 꼭 이럴 때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민증은 왜. 여기가 무슨 경찰서야?”
“나 아까 다 봤어.”
“뭘. 뭘 봤는데.”
내 거시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평소처럼 농을 쳤지만 어째 표정만 더 살벌해졌다.
“장난치지마. 너 아직 20대지.”
“20대인 게 뭐가….”
“거기다 스물 하나지.”
아, 맞다.
어떻게 정확한 나이를 알았나 싶었는데. 어젯밤 같이 갔던 핸드폰 대리점에서 가입할 때 무심코 실명과 주민번호를 기재했던 기억이 났다.
씨팔.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랴 싶지만 품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커플 폰이 왠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벌써 들키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
“그게 진짜 내 건 줄 알아? 나 정도 거물이 되면 짭새들 추적을 피해서 가짜 몇 개 정돈….”
“그럼 전 다른 사람과 커플 요금제가 되어 있단 말입니까?”
“다른…, 아니, 또 왜 존댓말을 쓰고…,”
“대답해주세요. 대답에 따라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뻔뻔하게 올라있던 신분증 옆으로 어제 샀던 핸드폰이 슥 자리를 잡았다.
피형욱의 미간이 깊게 패이더니 픽, 웃었다. 기분 더럽게 나쁠 때 짓는 비열한 웃음이었다.
“선생. 지금 나 엿 먹여?”
“엿 먹인 건 선생님이십니다.”
“기껏 주입시켜놓은 형욱 씨도 말아 드시는구만.”
참나.
뭐가 그렇게 기가 막힌 지 병원의 하얀 천정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토했다. 볼록 튀어나온 목울대는 연우의 것에 비해 더 각이 져서 그런지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그곳에서 시선을 뗀 연우는 테이블 밑에 놨던 쇼핑백도 마저 올렸다.
“조직원 분들의 핸드폰도 같이 있습니다. 사진은 지웠고요.”
“뭐?”
“조직원 분들의 핸드폰도 같이 있습니다. 사진은 지웠고요.”
“마지막에. 뭐라고?”
바짝 테이블을 넘어 들이밀어진 얼굴을 연우는 어설프게 피하지 않았다.
“지웠습니다. 깨끗이.”
하,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는 피형욱의 표정은 처음 보는 낯선 것이었다. 그렇지만 막연하게 그게 어떨 때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적어도 기분이 좋을 때 저런 얼굴을 하진 않겠지.
할 말이 없는 건지, 기분이 나쁜 건지. 검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정신 사납게 진찰실 안을 왔다갔다거리더니 연우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래서. 이제 내 이름도 안 부르고, 다시 존댓말 놀이하시겠다?”
“한 번도 선생님을 대상으로 논 적 없습니다. 선생님께선 그저 환자의 보호자….”
쾅!!!
“선생 그거 알아?”
……방금 저 주먹 아래서 커다란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벽을 누르고 있던 주먹이 치워지자 콘크리트가 부스스 흩어졌다.
“선생 완전 짜증나.”
그 말을 끝으로 피형욱은 문을 거칠게 밀치고 나가버렸다. 진찰실 안에서 들린 연이은 소음에 불안에 떨고 있던 이 간호사의 비명이 이어졌다. 또 뭔가를 부순 모양인지 험한 소리가 났다. 얼마나 문을 세게 밀쳤는지, 출입문에 달린 종이 시끄럽게 울었다.
하아.
긴장이 풀린 연우가 테이블 위에 걸친 팔에 얼굴을 묻었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저 조폭이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고 횡포를!”
당장 경찰 부를까요? 우린 버는 거에 비해 세금 많이 내는 민주 시민이니까! 이럴 때만큼은 경찰도 민중의 지팡이가 돼줄 거예요!
팔을 걷어붙이며 흥분하는 이 간호사를 간신히 진정시켜 내보내고, 조용해진 진찰실에 혼자 남은 연우의 시선이 바로 닿는 정면의 벽을 봤다.
“…또 빨간 약 바르겠네.”
후, 한숨을 쉬며 동그랗게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근처의 보수 공사를 해주는 곳에 전화를 넣고, 컴퓨터 전원을 껐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도 괜찮겠지. 아마 이 간호사도 모처럼 조기 퇴근으로 신이 나서 남자친구와 데이트 약속을 잡을 것이다. 그럼 나는 필라테스를 했다가, 들어가는 길에 장을 봐서―….
“…….”
퇴근 이후의 일정을 그리며 움직이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나 먼저 퇴근할 테니까, 정리하고 가요.”
“벌써 들어가시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진심을 담아 배웅을 한 이 간호사가 불 확인을 하기 위해 진찰실에 들어갔을 때 테이블 위의 쇼핑백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게 얼마만의 일이지.’
결국 필라테스는 건너뛰고 마트에 들러 장만 봤다. 그것도 귀찮아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집에 맥주가 없던 게 생각나서 들렀다.
MAX 맥주 캔 8개입짜리 2개를 망설임 없이 카트에 담은 주제에, 박스에 담아 차에 싣다가 잠시 멍해졌다. 왜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이렇게 많이 샀지. 어차피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누구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키핑이라고 해도 너무 많지 않나.
‘역시 다시 환불하러 가자.’
돌아가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 아무렇지 않게 박스와 출근 가방을 품에 들고 현관에 내려놓은 뒤에 아, 환불 안했다. 하고 중얼거렸다.
“뭐. 어쩔 수 없나….”
어차피 내일은 손님도 없을 거고,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갑자기 바빠졌었으니 이 간호사에게 휴가를 주는 것도 좋겠지.
“그럼 난 뭘 하지…….”
푸쉿. 가스를 배출하며 하얀 거품이 열린 풀탑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안주는 맥주를 사며 사은품으로 받은 마른안주용 과자가 전부. 입안에 털어 넣기가 무섭게 바삭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녀석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톡 쏘는 탄산이 가득한 맥주를 쓸어 넣었다.
“크――….”
죽인다.
제법 전망이 괜찮은 5층 원룸은 주변에 높은 건물 없이 주택가라 그런지 시야가 탁 트였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혼자 살기엔 너무 넓었다. 아무리 비뇨기과에 대한 애착이 없다고는 해도, 전공 서적들이 많아 처음 계약할 때부터 일부러 좀 큰 집으로 알아봤다. 이곳에서도 벌써 1년째 살고 있는 거라 꽤 잔정이 들었었는데.
“다른 곳을 알아볼까.”
생각하고 나니 쉬는 동안 할 일이 생겼다. 마시던 맥주 캔을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어느새 스케줄러 1장에 빽빽하게 일정을 적고 나니 한결 후련했다. 학생시절 자주 만들었던 빽빽이 노트처럼 돼버린 스케줄러를 안주 삼듯, 만족스럽게 보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테이블에 두었던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오며 전화가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워낙에 시끄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라 진찰이 끝나면 무음에서 진동 모드로 바꿔놓은 상태였다. 쏟지 않도록 캔을 테이블 위로 원위치 시킨 다음 핸드폰을 집은 연우의 눈썹이 위로 쫑긋 올라갔다.
“여보세요.”
[나다.]
“어쩐 일이세요.”
[지금 좀 급히 와야겠다.]
다짜고짜 자기 용건만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했다. 답답한 마음에 소파에서 일어나 커다란 창이 있는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긴 연우는 갑자기 몇 년 전에 끊은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무슨 일이신데요. 저도 바빠요.”
거실에 홀로 방치되어 있는 스케줄러를 한번 돌아보며 퉁명하게 말했던 연우는 핸드폰 안에서 흘러온 말을 듣고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말을 다 끝맺기 전에도 상대편에서 일방적으로 끊었음을 굳이 알려주고 있는 액정을 보다가 이제 막 판을 벌린 참에 버림받게 된 맥주들을 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술 마셔서 차도 못 갖고 가는데.”
전화 줄 거였으면 조금만 더 빨리 주지.
짧게 중얼거리면서도 이미 연우는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대충 불을 끄고 문을 닫자, 현관의 도어락이 자동으로 잠겼다. 주인이 나가고 나니 집안은 조용하다 못해 음산해보이기까지 하다. 불이라고는 저 멀리 보이는 대형 마트의 간판과 달빛이 고작인 거실, 테이블 위에 방치되어 있던 스케줄러와 맥주 캔 사이에서 갑자기 노란 불빛이 번뜩 눈을 떴다.
부웅. 부우웅.
여전히 요란하게 깝치며 몸을 떠는 핸드폰 액정에는 [피형욱]이라고 무미건조하게 저장된 이름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