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
「헤라에게.
헤라,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이젠 절대로 공부 더 하라고 닦달하지 않을게. 넌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괜히 기운 빠지게 잔소리하지도 않을게. 내 사사로운 욕심으로 빨리 황위를 물려주려고 무리한 일정을 주지도 않을게.
그러니 제발 날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벨라디에게도 잘 말해 주면 안 돼?
이렇게 벨라디를 못 만나는 건 내게는 너무 가혹한 벌이야. 매일 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어.」
과장이 아니라, 킬리언은 정말로 그리움과 서러움이 가슴에 사무치고 있었다.
살짝 축축한 눈으로 편지를 쓰던 킬리언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며 벨라디는 느긋이 기다리자 했지만,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발악한 건 자신이다.
거기에 휘말려 헤라가 피해를 본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두에게 저택 대문을 활짝 열었으면서, 자신에게만 출입을 금지할 수 있나!
며칠 전, 서둘러 벨라디에게 보냈던 아이닝이 아연실색하며 돌아왔을 때.
킬리언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나만 이렇게 매달리지. 나만.’
벨라디는 언제나 빛나고, 고아하고, 품위 있는데, 언제나 자신만 그녀 앞에서 유치해지고 멋없어진다.
킬리언도 본인의 이 찌질함이 싫었다.
그는 헤라에게 쓰고 있던 사죄의 편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시선을 옮겨 벨라디에게 보낼 반성문까지 바라봤다.
잠시 이를 응시하던 킬리언은 홧김에 편지와 반성문을 집어 들곤 활활 타고 있는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이제 나도 몰라.’
몇 번을 보내도 답이 없는 편지를 쓰는 것도 서러워서 못 하겠다.
눈물은 어느새 원망이 되어 버렸다.
킬리언은 축 처진 채로 소파에 엎어졌다.
타닥타닥
편지와 반성문은 어느새 흔적도 남지 않고 타 버린 채다.
‘벨라디…….’
멍하니 있으려니, 다시금 벨라디 생각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킬리언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아서, 원망스러움에 토라져도 금방 그리움으로 휘날리고 말았다.
‘하, 이 머저리 같은 놈.’
싱숭생숭하게 벽난로를 바라보던 킬리언은 결국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래, 난 원래 머저리야!’
속으로 그렇게 외친 킬리언은 다시금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리고 하얀 종이 위에 단정한 글씨체로 다시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경애하는 벨라디 앨턴 공작님께.
오늘 하루만 몇 번째 편지를 새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속해서 쓰다가 태우고. 쓰다가 태우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다시 펜을 잡습니다.
그만큼 당신이 밉고, 그만큼 당신이 보고 싶어요.」
눈물 젖은 반성문을 쓰던 때였다.
누군가 다급히 킬리언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폐하!”
시종장의 목소리에 킬리언이 힘없이 들어오라 일렀다.
그러자 서둘러 들어온 시종장이 자신에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폐하! 축하드리옵니다!”
“왜 호들갑이야?”
“앨턴 공작가에서!”
그 말에 물에 푹 젖은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져 있던 킬리언이 번쩍 눈을 떴다.
“공작가에서?”
“연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초대장……!”
지금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네시아 앨턴 귀국 축하연인가?!
그 초대장을 드디어 나에게?!
이어지는 시종장의 말에 킬리언의 얼굴이 햇빛 가득 받은 꽃처럼 화사해졌다.
“그리고 앨턴 공작님의 편지가 함께 도착했사옵니다!”
“다, 답장이구나!”
킬리언이 헐레벌떡 시종장에게서 벨라디의 답장을 낚아챘다.
종이에 향수를 뿌렸는지, 그녀가 좋아하는 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벨라디의 편지를 혼자서 읽고 싶었던 킬리언은 서둘러 시종장을 내보내고, 조심히 봉투를 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붉은 여우, 킬리언.」
“벨라디…….”
연인이 자신을 부르는 애칭만으로도, 킬리언의 애간장이 사르륵 녹아 버렸다.
그는 애틋한 마음으로 벨라디가 적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요. 그동안 연회를 준비하느라 바빠서……라고 말하면 핑계겠죠?
사실은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연회 준비에 몰두한 거예요. 이거라도 안 하면 당장 황궁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거든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그럼 만나면 되지!”
하며 제자리에서 펄쩍 뛸 수도 있겠네요.」
실제로 킬리언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럼 만나면 되지!”
「하지만 들어 봐요.
난, 한 번은 나 자신도 혼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자유가 되기 위해 헤라를 재촉하는 것, 어느 정도 알고 있었거든요. 그걸 말릴 수 있었는데, 굳이 말리지 않았고요.
헤라도 공부를 좋아하니, 서로에게 좋은 거라 여겼지만…… 내심 저도 하루빨리 당신과 함께하고 싶었던 거죠.
헤라가 이곳으로 가출한 날, 새삼 내 욕심을 느꼈어요.
그 아이의 얼굴에 벌써 고단함이 서려 있더라고요.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사실, 일반적으로 봤을 땐 헤라가 아직 황위를 이어받을 나이는 아니잖아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보통 내 나이 무렵에나 즉위식을 올리니까.
당신도 그랬고.
어쩌면 우리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너무 맹목적으로 달렸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생각이 드니까, 나도 벌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지금 내게 가장 괴로운 건, 당신을 못 만나는 거거든요.
우리의 만남을 막아, 당신도 혼내고, 나도 혼낼 수 있으니. 가장 효율적인 벌 아니겠어요?」
그 물음에 킬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벨라디는 현명해.’
그리고 애통해했다.
‘헤라를 힘들게 한 건 나인데, 왜 벨라디가 죄책감을……. 역시 벨라디는 너무 착해.’
남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킬리언은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그래서 며칠 참아 봤는데, 당신 편지를 보니 더는 힘들더군요.
그래서 어제 따로 헤라를 불러, 사과했어요. 킬리언이 잘못하는 건 대부분 나와 관련되어 있으니, 나도 미안하다고요.
헤라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어요.
“절대 아니에요! 저도 빨리 황제가 되고 싶으니까요! 두 사람의 결혼식도 얼른 보고 싶고!”
그 모습이 당신과 똑같아서, 둘이 새삼 남매라는 걸 느꼈답니다.
하여튼, 연회 준비도 다 끝났고 헤라와 대화도 나누었으니 이제 벌을 끝낼까 해요.
초대장을 진작 보내고 싶었는데, 답장을 쓰느라 조금 늦게 보내게 됐네요.
킬리언, 당신도 내가 보고 싶다면 오늘 밤 날 찾아와 줄래요?
기다릴게요.
사랑을 담아, 벨라디 앨턴.」
날렵한 필체와는 상반되는 부드러운 애정이 담긴 편지에 킬리언은 즉시 마법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당장 갈게요, 벨라디!’
그렇게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날.
킬리언이 돌아온 건 늦은 오전이었는데, 그 옆에는 벨라디가 함께였다.
두 사람은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네시아가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황궁에 머물며, 킬리언과 딱 붙어 있던 벨라디는 그날이 되고서야 앨턴 공작가로 돌아왔다.
물론, 옆에는 사랑의 힘으로 모든 업무를 진작 끝낸 킬리언도 있었다.
“누나!”
멜도르가 드물게 화난 목소리로 벨라디를 노려봤다.
“연회 주최자가 계속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해!”
“나 없어도 잘 돌아가도록 역할을 지정해 줬던 걸로 아는데?”
“그래도 누나가 없으면 분위기가 다르다고!”
멜도르의 투정에 벨라디는 씨익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곤 성큼성큼 연회가 열릴 연회장으로 향했다.
멜도르는 벨라디가 쓰다듬은 부분을 만지다가,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거기엔 킬리언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십니다?”
“당연하지.”
“자기 동생은 남의 집에 맡겨 놓고, 우리 누나 독차지하니까 좋습니까?”
그 삐딱한 물음에도 킬리언은 여유로웠다.
“좋다마다. 그리고 여긴 남의 집이 아니지.”
“하, 여기가 남의 집 아니면 어딘데요?”
“곧 내 집이 될 곳이니까, 처남.”
“뭐라고요?! 내 집?! 처남?!”
멜도르가 기겁하는 사이, 집사인 로버가 그에게 달려왔다.
“멜도르 님! 마탑에서 보낸 마법사들이 도착했습니다.”
“에잇! 지금은 내가 바쁘니까 그냥 넘어갑니다만, 또 그런 농담을 하면 황제라도 가만 안 넘어갑니다!”
멜도르는 이를 바득 갈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처남의 반응을 귀엽게 보던 킬리언도 연회장으로 향하다, 헤라와 마주쳤다.
남의 집에서 마주친 붉은 머리 남매는 잠시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오라버니.”
먼저 다가온 건 헤라였다.
헤라는 성큼성큼 킬리언에게 다가오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헤라?”
“오라버니가 계속 보냈던 사죄의 편지, 잘 읽었어요. 원래 편지 한 통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으려 했는데, 그 며칠 사이에 10통은 넘게 보내실 줄이야.”
“크흠.”
“오라버니의 진심을 이제 잘 알겠어요. 저도 너무 어리광을 부렸단 자각이 있고요. 제가 선택한 길이니, 제가 책임져야 하는데 말이죠.”
“헤라…….”
킬리언이 기특한 여동생을 보고 감격에 젖어 들 때, 헤라가 내민 손을 흔들었다.
“화해의 악수 해요, 오라버니.”
“그래, 헤라. 우리 다시 잘해 보자.”
킬리언은 활짝 웃으며, 헤라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손을 흔들다, 헤라의 다음 말에 굳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럼 우리 화해의 기념으로 슬슬 호칭이나 정리할까요?”
“호칭?”
“곧 제가 황제가 될 텐데, 언제까지 오라버니에게 존댓말을 쓸 수는 없잖아요. 오라버니도 계속 제게 말을 놓을 생각이세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킬리언이 멍하니 눈을 껌벅이자, 헤라가 상큼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익숙해지게 미리미리 연습하자, 킬리언.”
“……예, 폐하.”
킬리언은 이때 확신했다.
헤라는 그 누구보다도 황제의 권력을 확실히 휘두를 아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