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헤라 황태녀 전하. 저와 같이 벨라디의 이브닝드레스를 준비하지 않겠어요?
바로, 벨라디의 또 다른 절친인 시온이었다.
헤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글라 소공작님은 따로 준비하실 줄 알았는데요.
다들 헤라가 본인의 신분을 이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거라 예상했다.
평소 헤라가 보여 주었던 곧은 모습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으나, 시온만은 다르게 생각했다.
-승자가 뻔한 승부에서 굳이 필패를 선택할 필요 없으니까요.
가지고 있는 무기를 그냥 놔둘 정도로 헤라를 어리숙하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시온은 본인의 안경을 쓱 치켜올리며 온화하게 말했다.
-벨라디가 선호하는 디자인은 제가 전부 꿰고 있답니다. 전하께서 벨라디의 사이즈만 알아 오시면,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거예요.
마침 디자인으로 고민이 많았던 헤라였다.
거기다 시온이라면 믿을 만한 자였으니, 그녀는 흔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저희, 잘해 봅시다.
-가장 완벽한 드레스를 만들어 봐요, 전하.
그렇게 헤라&시온이라는 색다른 동맹이 탄생한 것이다.
‘가출이라는 명목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앨턴가에 잠입했어.’
본인이 생각해도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딱 오늘 제 오라버니가 성질을 돋우고, 딱 오늘 모스틴에게 네시아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때 후딱 새언니의 사이즈를 알아내야지.’
헤라는 히히 웃었다.
‘아글라 소공작이 원단을 잘 구했나 몰라.’
다들 시온이 남부로 내려간 게 새 무역로를 뚫기 위함이라고 알지만, 그건 반만 맞았다.
마갈라 제국의 속국인 칸 공국의 비단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소식을 입수한 시온.
시온은 그 비단을 위해 칸 공국과의 새 교역로를 연결하러 떠난 것이다.
‘소공작이 저리 열심히니, 나도 힘내야지!’
그렇게 결심한 헤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고 들렀던 저택이라, 구조는 얼추 파악하고 있었다.
벨라디가 몇 번 자신의 드레스 룸을 공개해 새로운 바지와 와이셔츠를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흠, 그래도 드레스 룸에 몰래 들어가기는 좀 그러니까……. 스티아의 도움을 구해 볼까?’
도로시가 방금 벨라디의 곁에 있는 걸 봤으니, 스티아는 다른 곳에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헤라가 스티아를 찾아 저택 5층을 서성일 무렵이었다.
달칵-.
저 앞의 방문이 열렸다.
‘스티아인가?’
헤라가 싱긋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을 때.
“헉…….”
방을 나온 건 스티아가 아닌, 거대한 호랑이였다.
어슬렁거리며 방을 나오던 맹수와 헤라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저렇게 큰 짐승은 미처 처음인지라, 헤라의 숨이 가빠졌다.
“아, 아…….”
헤라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눈을 굴렸다.
‘앨턴 공작가에서 애완용 호랑이를 키우고 있었나?’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이 가문과 잘 어울리는 반려동물이긴 했다.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수도 한복판에서 갑자기 맹수가 등장할 리 없어.’
그렇게 헤라가 개연성을 찾을 때, 도리어 호랑이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봐, 진정해라. 이 몸은 전혀 사납지 않다. 아주 점잖고 매너 있지.”
“호랑이가 말을 해?”
원래 그런 동물이던가?
헤라가 본인의 지식을 의심하는 사이,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몸은 평범한 미물이 아니기에 인간들과 대화도 할 수 있다.”
“넌 누군데?”
“이 몸은.”
여기까지 말하던 검은 털의 호랑이, 타우딘은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끄응-, 이 몸이 이런 실수를…….’
벨라디는 새 검법을 만드는 동안, 타우딘을 부르지 않았다.
타우딘은 그동안 상당히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벨라디와 계약하기 전에는 그 긴 시간을 마물의 숲에서 홀로 보냈고, 단 한 번도 그걸 무료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래서 인간과 계약하기 싫었는데.’
인간과 계약한 정령은 시간의 흐름을 인지해 버리고 마니까. 하지만 그들의 계약자는 결국 자신들을 놔두고 죽고 마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타우딘은 이미 벨라디에게 매료되었는데.
그래서 타우딘은 하염없이 벨라디를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자기를 불러 줄 그때를.
그리고 오늘!
타우딘은 벨라디의 검법 개발이 드디어 끝났음을 깨달았다.
진작 정령검과 자신의 기운을 동기화한 덕이었다.
‘그래서 헐레벌떡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검법도 완성했으면서 냉큼 자신을 부르지 않는 벨라디가 얄미워, 이번만큼은 몸소 찾아온 것이다.
만나면 잔소리를 아주 한 바가지 퍼부어 줄 생각이었는데, 거기에만 집중하느라 이렇게 사람을 마주칠 가능성은 생각하지를 않았다.
-타우딘, 내가 지정한 사람 외에 다른 이에게는 네 존재를 들키면 안 돼.
-딱히 상관은 없다만.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알고 싶어?
-모르고 싶군.
“크오오!”
벨라디와의 약속이 생각난 타우딘이 저도 모르게 울부짖었다.
그 비통한 울음소리에 헤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간 정체를 듣기까지 한세월이 걸릴 것 같아, 헤라가 먼저 움직였다.
“괜찮아?”
“괜찮지 않다!”
“혹시 넌 정령이야?”
헤라의 물음에 타우딘이 고개를 휙 돌렸다.
“어떻게 알았지?”
“나 너처럼 말하는 동물을 알거든.”
몇 년 전, 큰오라버니가 처형당한 후.
잠시 우울해하던 헤라를 위로하기 위해 킬리언이 아이닝을 소개해 준 적 있다.
그래서 정령의 존재가 마냥 낯설지 않은 헤라였다.
그녀의 대답에 타우딘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오호라.”
맹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헤라를 살펴봤다.
“그래……. 방금은 경황이 없어 몰랐다만, 네 머리. 어디서 많이 본 색이로군.”
그 말에 헤라는 저도 모르게 제 머리카락을 감쌌다.
타우딘은 빠르게 여유를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과 혈연이구나. 그렇지?”
“그놈이 킬리언 오라버니를 말하는 거라면, 맞아.”
“아이닝을 만난 적 있나 보지?”
“그럼.”
그렇단 말이지.
타우딘이 머리를 굴릴 때, 때마침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타우딘은 터벅터벅 커다란 발을 움직여 본인이 나왔던 방으로 들어갔다.
“이리로 와라.”
“앗, 응.”
타우딘을 따라 문이 열린 방으로 들어온 헤라는 눈치껏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을 둘러보니, 벽에 걸린 커다란 정령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새언니와 너무 잘 어울리는 검이야.’
헤라가 홀린 듯 검을 보는데, 타우딘이 자리에 털썩 앉고는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이 몸은 어둠의 정령 타우딘. 단순한 호랑이가 아니다.”
“응, 그리고 벨라디 앨턴 공작님과 계약했지?”
제 존재를 유추하던 타우딘의 눈빛과 드문드문 들리는 그의 말버릇이 벨라디와 똑같았으니까.
“정령과 계약자는 점점 닮는다고 했거든.”
“눈썰미가 나쁘지 않군.”
벨라디와 제가 닮았다는 말에 은근 기분이 좋아진 타우딘이 꼬리를 살랑였다.
“네 이름이 뭐지?”
“헤라.”
정령에게는 풀네임을 말해 줘도 전부 기억하지 않는다.
아이닝을 통해 이미 이를 알고 있는 헤라는 간단히 제 이름을 말했다.
타우딘은 깔끔한 소개에 다시금 꼬리를 살랑였다.
“헤라. 이 몸이 네게 요구할 게 있다.”
“뭔데?”
“반드시 이 몸의 존재를 비밀로 해야 한다.”
“하긴……. 앨턴 공작님이 정령사라는 건 처음 들어 봐. 계속 숨기고 있었구나?”
헤라는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타우딘과 눈을 마주했다.
“그럼 내가 오늘 널 본 것도 비밀로 해야겠네? 새언니에게도?”
“눈치 빠른 아이는 싫지 않지.”
“그럼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약삭빠른 아이도 익숙하다.”
이미 벨라디에게서 다양한 걸 뜯겨 본 타우딘은 헤라의 말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원하는 게 뭐지? 이 몸이 해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주마!”
“정말? 그럼…… 앨턴 공작님의 드레스 사이즈도 알 수 있어?”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그런데 타우딘은 생각보다 더 경쾌하게 대답했다.
“벨라디의 신체 수치를 궁금해하는 것이냐? 그 정도야 쉽지.”
“진짜?”
“내 자연 친화력이 벨라디를 감싼 게 몇 번인데, 그런 것쯤이야 지금 당장도 알 수 있다.”
“딱 좋아.”
그 눈치 빠른 앨턴 공작의 드레스를 남몰래 딱 맞춰서 선물한다?
이거야말로 완벽한 서프라이즈 아닐까?
‘더불어 새언니와 오라버니에게 내 눈썰미와 수완도 자랑하고……!’
새 이브닝드레스를 보고 ‘나까지 놀라게 하다니, 역시 내 시누이야.’, ‘네가 다스리는 제국은 문제없겠어.’라고 말하는 벨라디와 킬리언이 눈에 선했다.
헤라는 뿌듯함에 활짝 웃었다.
“널 본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좋은 계약이다, 헤라.”
그렇게 앨턴 공작가 한구석에서 은밀한 계약이 진행되었다.
***
오랜만에 마사지를 받고, 느긋이 책을 읽고 있던 벨라디는 한순간 온몸을 스쳐 가는 기운에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숨을 쉬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이전의 그녀였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벨라디는 최근, 검법을 만들며 경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린 상태였다.
가히 초월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그녀의 감각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흠…….”
벨라디는 그대로 소파에서 일어나 제 침실을 나왔다.
“공작님.”
“내 정령검은?”
“항상 두던 곳에 보관 중입니다.”
스티아의 말에 벨라디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정령검을 보관 중인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방에서 작당을 꾸민 헤라와 타우딘은 이미 헤어진 후였다.
‘분명 자연 친화력이었는데…….’
그리고 자신을 친화력으로 감쌀 이는 타우딘 외에 없지.
벨라디가 잠시 정령검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야호!”
정령검에서 작은 여우가 뿅 나타났다.
“벨라디이!”
“아이닝.”
벨라디의 품에 안긴 아이닝이 냅다 그녀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벨라디에게 자신의 뺨을 마구 비빈 아이닝이 눈을 반짝이며 벨라디를 올려다봤다.
“검술 연구는 끝낸 거야?”
“나름.”
“그럼 드디어 킬리언이 올 수 있는 거지?!”
꺄하하!
아이닝이 해맑게 웃었다.
벨라디도 마주 웃었다.
“아쉽게도 힘들겠는걸?”
“헉! 어째서? 킬리언이 벨라디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나도 그렇지만…… 약속하고 말았거든.”
“무슨 약속?!”
아이닝의 물음에 벨라디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혼내 주겠다는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