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벨라디 앨턴 공작님, 멜도르 앨턴 공자. 좋은 오후입니다.”
간단히 인사한 헤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네시아 공녀가 곧 귀국한다는 말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황태녀 전하의 방문은 언제든 환영이지요.”
벨라디의 말에 멜도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시아도 무척 반가워할 겁니다.”
앨턴 남매의 상냥한 말에 헤라는 방긋 웃었다.
벨라디는 문득, 헤라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추억을 회상했다.
“정말로 많이 자라셨군요.”
“예?”
“그렇게 앉아 제 업무를 바라보셨던 때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말에 헤라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딱 이 위치였군요. 전 아무 생각 없이 앉은 건데.”
어린 시절, 한창 헤라의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때.
벨라디가 임시 가주로서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게 된 적이 있었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부하들과 의견을 나누고, 일을 지시하던 그녀를 이렇게 소파에 앉아서.
그때의 벨라디가 얼마나 큰 충격이었고, 또 얼마나 큰 동기였던가.
‘그 감정이 아직도 생생한걸.’
헤라는 수줍게 제 손에 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앨턴 공작님은 제 동경의 대상이세요.”
“과분한 말씀을.”
벨라디는 다 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옆에 있던 멜도르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벨라디가 유유히 입을 뗐다.
“그나저나 네시아가 귀국하려면 아직 며칠 남았는데. 전하께서 꽤 이르게 걸음을 옮기셨군요.”
“그러게요. 게다가 네시아가 올 때까지 저희 저택에 머무시겠다고요?”
이어지는 멜도르의 물음에 헤라가 한숨을 쉬며, 차를 한 입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탁-.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기까지 말한 헤라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깊은 숨소리가 헤라의 심란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지고하신 오라버니를 피해서 가출한 거랍니다.”
그 말에 벨라디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고, 멜도르는 눈을 빛냈다.
“폐하께서 전하를 괴롭히시던가요?”
“멜도르.”
“크흠!”
멜도르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는데, 헤라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예? 정말이에요?”
“오호라.”
헤라의 긍정에 이번엔 벨라디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전하.”
“사실 공작님 앞에서 오라버니 욕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괜찮습니다, 전하. 저희 앞에서나 폐하 흉을 보지, 어디서 그러겠습니까?”
이때다 싶어 멜도르도 다시 한번 동참하니, 헤라는 용기를 얻었다.
‘맞아, 여기는 항상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황궁이 아니잖아.’
딱 그 나이대로 돌아간 헤라는 마치 이르듯, 그동안 쌓인 불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사실 오라버니가 처음 <군주의 정석>을 내밀었을 땐, 오로지 저를 위해 만든 건 줄 알았어요.”
이때, 멜도르가 눈으로 그게 뭐냐 물었다.
벨라디는 킬리언이 만들어 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제왕학 요약본이라고 답하기 힘들어,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눈짓을 보냈다.
남매의 무음 대화를 눈치 못 챈 헤라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라버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오라버니는 툭하면 저에게 더 할 수 있다, 대견한데 조금만 더 해 봐라 이런 말만 하시고.”
“쯧쯧.”
“저런저런.”
“그러다 알게 됐죠. 오라버니가 그런 교재를 만들고, 절 응원하셨던 건 전부 제게 빨리 황위를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
“그럴 줄 알았지.”
그 말에 벨라디는 살짝 뜨끔해 입을 다물었고, 멜도르는 누나의 눈치를 힐끔 보다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를 안 아바마마께서도, 내가 살다 살다 황위가 싫다고 저리 난리 치는 황족은 처음이라며 역정을 내셨어요. 자기 때는 그 황좌를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피의 싸움을 했었다고.”
그렇게 말하던 헤라가 잠시 멈칫했다.
“물론…… 저희 대에도 그런 피의 싸움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요. 아바마마도 곧 이를 깨닫고 사과하셨죠.”
그 말에 벨라디는 이젠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황제가 되기 위해 시간까지 되돌렸던 머저리가 언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기억할 가치도 없는 패배자였기에 벨라디는 굳이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는 대신 헤라의 말에 마저 귀 기울였다.
“하여튼 오라버니의 본심을 아니, 어쩐지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그래도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오라버니의 극성은 더 심해지고.”
헤라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잔소리 폭탄이에요. 입만 열면 잔소리잔소리잔소리. 듣기 싫어, 정말.”
“푸흡!”
헤라의 음산한 중얼거림에 멜도르가 잠시 웃다가 황급히 벨라디를 살펴봤다.
벨라디는 작게 숨을 내쉬며 자기 몫의 차를 한 입 마셨다.
“폐하가 전하를 많이 힘들게 하셨군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사실 오라버니가 왜 저렇게 황위를 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지,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헤라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저도 빨리 공작님의 결혼식을 보고 싶기도 하고.”
그 말에 멜도르의 표정이 순간 돌 씹은 듯 찡그려졌으나, 헤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제 성인식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으로 오라버니에게 반항하고 싶기도 해요. 황제가 되면…… 이제 그럴 수 없으니까.”
헤라가 조심스럽게 벨라디를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제 반항에 앨턴 공작님을 이용한 것 같지만요.”
“전 괜찮습니다. 전하의 반항에 기꺼이 어울려 드리죠.”
“그 정도는 반항도 아닙니다, 전 어릴 때 사춘기가 세게 와서, 누나한테 아주 크게 혼쭐이 났거든요.”
멜도르의 말에 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라면 그랬을 것 같아요.”
“……어라?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요?”
헤라가 너무 쉽게 동의하니, 오히려 멜도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벨라디는 그런 둘의 모습에 피식 웃다가 헤라를 바라봤다.
“킬리언이 그렇게 전하를 닦달했을 줄이야. 전하만큼 믿음직한 후계가 또 어디에 있다고.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동경의 대상에게 인정과 위로를 받으니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헤라는 기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전하의 가출을 폐하는 다 알고 계신 건가요?”
“아마도요? 제가 말하진 않았지만, 프레도 공작님을 만났으니까요.”
모스틴을 말이지…….
‘그럼 지금 당장 연락을 할 필요는 없겠네.’
어차피 오늘 밤, 킬리언을 만날 예정이었으니까.
순간 벨라디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지어졌다.
“헤라.”
친근한 호칭에 헤라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네, 네?”
“언니가 혼내 줄까?”
“누구를…….”
“네 오빠.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벨라디에게 이름이 불려 기뻐하던 헤라는 한 박자 늦게 질문을 이해했다.
순간 헤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언니!”
“그래, 우리 시누이는 내가 챙겨 줘야지.”
그 말에 헤라의 얼굴이 머리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옆에서 멜도르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쳇,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하지만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기에, 멜도르는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의견일 아버지가 무척 그리워졌다.
***
벨라디의 배려로 앨턴 공작가에 며칠 머물게 된 헤라는 무척 신이 난 상태였다.
‘좋아,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어.’
사실, 벨라디에게 밝히지 않았지만…….
헤라에게는 가출 외의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공작님이 날 시누이라고 불러 줬으니까, 정말로 결혼식이 얼마 안 남은 거겠지?!’
킬리언이 홀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든 말든, 야무진 헤라는 이미 본인의 즉위식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공작님의……. 흠흠, 새언니의 이브닝드레스는 내가 맞춰 주고 싶단 말이지.’
결혼 본식에 쓰일 웨딩드레스의 준비는 당연히 부부의 몫이었다.
하지만 본식 후 있을 저녁 연회의 드레스는 주위 지인들이 축하의 의미로 선물하곤 했다.
헤라는 그 드레스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벌이 너무 많아.’
물밑으로 벨라디의 이브닝드레스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어찌나 득실거리던지.
헤라가 파악한 명단만 해도, 벨라디를 인생의 은인이라 칭송하는 마탑주, 철도와 증기 기관차를 발명한 바바, 벨라디와 거래했던 유수의 사업가들은 물론, 그녀에게 충성을 바친 북부의 가신들까지.
심지어 마갈라 제국에 있는 네시아와 류스펠도 함께 드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벨라디의 절친인 모스틴 프레도.
그리고 벨라디의 가족인 앨턴 부자.
하나같이 너무 쟁쟁한 이들이라, 상당히 불리한 싸움이었으나…… 헤라는 불안하지 않았다.
‘훗, 어차피 결혼식은 내가 황제가 된 이후에 진행될 거잖아?’
신분이 깡패라고.
황제가 선물한 드레스를 감히 누가 이기겠는가?
헤라는 본인이 이 치열한 싸움의 승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완벽한 드레스를 준비하고 싶었다.
“공작님은 제국 여성 평균 신장과 맞지 않단 말이지.”
헤라의 중얼거림대로, 벨라디는 177cm의 큰 키와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요 몇 년간 바지를 주로 입었기에, 새 드레스를 맞추려면 세심하게 사이즈를 알아야만 했다.
거기다 벨라디가 선호하는 디자인도 잘 모르는 터라, 헤라 나름대로 고민이 정말 많았다.
이런 때, 그녀에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