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그래도 평소라면, 이런 중매 같은 건 자기한테 꺼내지도 않는데!
모스틴의 시선을 읽은 킬리언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다, 모스틴. 하지만 최근 네가 날 어지간히 가지고 놀았어야지.’
헤라와 관련돼선 리액션이 풍부해지는 킬리언은 모스틴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얼마나 즐거웠던가.
하지만 킬리언도 마냥 당할 성미가 아니었다.
“자, 프레도 공작. 어서 선택해 봐.”
“으윽.”
킬리언의 조용한 앙갚음을 고스란히 받게 된 모스틴.
황제가 몸소 제안하는 선을 단칼에 거절하기에도 뭐한데…….
순식간에 곤란해진 모스틴은 킬리언의 눈치를 보며, 시종이 마련해 준 차를 마셨다.
그러곤 들고 있던 사진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아, 아이고! 그러고 보니 저희 저택 주방 불을 끄는 걸 깜박했군요! 이대로 두면 사고가 날 테니 제가 얼른 가서 확인해야겠습니다.”
“뭐라고?”
“용서하십시오, 폐하! 저택의 미래가 제 손에 달려 버려서! 그럼 폐하의 충실한 신하는 이만!”
바람처럼 집무실을 박차고 도망쳐 버렸다.
체면도 잊고 와다다 달리는 모스틴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난 킬리언과 류스펠 같은 머저리가 되고 싶지 않아!’
주위에 사랑꾼이 둘이나 있는 부작용을 그대로 겪고 있는 모스틴.
자유로운 그에겐 아직도 약혼이니 결혼이니 하는 건 머나먼 이야기였다.
‘앞으로 한동안은 황궁 출입 자제다!’
갈 일이 생기면, 무조건 시온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미혼인 남부의 후계자는 남들이 눈독 들이는 최고의 신랑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킬리언이 또 선을 들이밀면…… 시온한테 넘겨야겠어……!’
그렇게 모스틴이 나쁜 생각을 하는 사이, 킬리언은 비어 버린 모스틴의 빈자리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흠, 왜 모스틴이 그렇게 사람 놀리기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그렇게 잠시 짓궂은 미소를 지은 킬리언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렇게 남을 괴롭히는 건 역시, 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일이나 하자.’
자리로 돌아가 펜을 잡은 킬리언은 순간 스치는 생각에 다시금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잠깐만. 벨라디가 네시아를 맞이하며 저택의 대문을 연다는 건…….’
이제 나도 벨라디를 만날 수 있다는 건가?
벨라디와의 합의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벌써 몇 주나 사랑스러운 애인을 만나지 못했다.
킬리언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
“네시아가 올 날이 얼마 안 남았네.”
벨라디의 중얼거림에 멜도르가 활짝 웃다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그러니까. 작게 만찬이라도 준비해야겠다. 그 쪼그마한 게 타국에서 오래 고생했잖아?”
그 말에 자신의 검을 닦던 벨라디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런 것치곤 별명이 꽤 강렬하던데?”
악마의 정령사.
류스펠의 예상대로 벨라디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역시 진작 전해 들은 멜도르도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래, 앨턴이라면 그 정도 명성은 얻어 줘야지.”
“만찬은 괜찮은 생각이야. 류스펠도 초대하는 게 좋겠어.”
“엥? 왜 ‘개’를 만찬에 초대해?”
멜도르는 진심으로 싫은 듯, 인상을 찡그렸다.
벨라디는 그런 동생을 힐끔 바라봤다.
그 시선에 멜도르는 알아서 본인의 말을 고쳤다.
“그래, 개가 아니라. 걔. 프레도 공자. 공자를 왜 우리 가족 만찬에 초대해?”
그 물음에 벨라디는 정령검을 마저 닦은 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로시에게 넘겼다.
도로시가 총총총 움직여 검을 본래의 자리에 놓아두는 사이, 벨라디가 입을 열었다.
“류스펠도 네시아 하나만 보고 마갈라 제국에서 고생했으니까.”
“아니, 그건 프레도 공작가가 알아서 할 일이잖아.”
“류스펠만 초대할 건 아니야.”
“그럼?”
“헤라 황태녀에게도 초대장을 보낼까 해.”
“……그 정도면 그냥 작은 연회인데?”
“그것도 나쁘지 않지.”
벨라디의 대답에 멜도르는 자신의 검은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어느덧 다 자란 멜도르는 벨라디의 소개로 마탑주의 제자가 된 상태였다.
마탑주에게 차기 마탑주라 불릴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사실 그는 그런 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난 그냥 가족끼리 소소하게 보내고 싶단 말이야.”
멜도르는 그저 한 명의 마법사로서 좋아하는 연구를 잔뜩 하고, 완벽한 누나의 보좌를 하는 생활이 즐거웠다.
그만큼 가족에 대한 애착도 강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타인이 넘어오는 걸 경계하는 편이기도 했다.
벨라디는 그런 멜도르의 이마에 꿀밤을 딱 때렸다.
“아! 누나!”
“멜도르, 넌 언제까지 그렇게 좁은 세상에서 살래?”
벨라디는 혀를 차며, 집무실 소파에 등을 기댔다.
멜도르가 명예욕, 권력욕이 없는 건 좋았다.
하지만 심각한 인도어파에 까칠한 편이라 인간관계가 좁은 건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다.
“너 교류가 활발한 친구도 없지?”
“내 친구는 마법이야.”
“하, 참 훌륭한 친구를 뒀네.”
“당연하지! 마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진리이며, 정교한 법칙이라고.”
“널 마탑주의 제자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가뜩이나 잘 안 나가는 녀석이었는데, 마탑으로 가면서 정도가 심해졌어.
벨라디는 이번 기회에 멜도르의 실력을 만천하에 보여 줄 계획이었다.
멜도르에게 욕심이 없는 건 없는 것이고, 자신의 카드로 있는 이상 사용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네시아가 역사상 최초로 다수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가 된 건 알지?”
“알지.”
“거기다 나 역시 최초의 여성 공작이자, 최연소로 가문의 검법을 완성시킨 기사로 기록될 거고.”
“그럼! 우리 누나 검이야 세계 제일이지.”
묵직한 방어에 치중된 북부의 검.
거기서 한계를 느낀 벨라디는 공격 기술을 다수 집어넣은 새로운 검법을 어제 막 완성시킨 참이었다.
이 검법은 그대로 벨라디의 할아버지와 테오도르에게 넘어갔다.
그들의 최종 검토가 끝나면, 대대적으로 이를 훈련에 도입할 계획이었으니까.
“이로써 우리 앨턴의 무력도 더욱 막강해지겠지? 역시 누나는 천재야. 최고라고!”
어느 정도 검을 배운 멜도르는 새 검법의 완성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본인이 그걸 만든 사람인 양 싱글벙글 웃었다.
멜도르의 대답에 벨라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을 바라봤다.
“그리고 넌?”
“나?”
“넌 역사에 뭘로 남을 생각이야?”
“난 딱히. 으악!”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멜도르는 기겁하며 자신의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벨라디가 퍽, 동생의 정강이를 발로 찼기 때문이다.
“넌 마탑주에게 모든 가르침을 하사받은 수제자잖아. 지금 그 업적을 무시할 셈이야?”
“쓰읍. 그게 아니라. 난 원래 그런 거에 관심이 없단 말이야.”
“난 아니야.”
벨라디의 단호한 말에 열심히 정강이를 문지르던 멜도르가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벨라디는 표정을 바꾼 후, 멜도르와 눈을 마주했다.
“가장 강한 기사, 가장 강한 마법사, 가장 강한 정령사. 이 셋이 한 가문에서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
“그 영광을 우리 앨턴이 아니면 감히 누가 차지하지?”
“아…….”
그제야 벨라디의 마음을 파악한 멜도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벨라디는 친절히 동생의 턱을 올려 주며 웃어 주었다.
“역시 만찬 정도가 아니라, 네시아를 환영하는 연회를 여는 게 좋겠어. 류스펠은 네시아의 업적을 전파하는 전령 새 역할을 할 것이고, 헤라는 네시아의 인맥을 빛내 주는 키가 될 거야.”
“응.”
“그리고 너, 너도 마탑 마법사들에게 전부 초대장을 돌려. 그들이 네 마법 실력을 소문낼 바람잡이가 되도록.”
“응!”
“네 실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여도 괜찮겠군. 이건 너에게 맡겨도 되겠지?”
“당연하지!”
새 임무다!
눈을 반짝인 멜도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멜도르가 가장 열정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그 무엇보다 벨라디에게 임무를 받을 때였기에, 벨라디는 멜도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해, 동생.”
“응, 누나!”
내가 누나의 큰 뜻도 모르고, 어리광이나 부렸구나!
멜도르는 깨달음을 얻으며 단번에 꼬리를 흔들었다.
벨라디는 그걸 보곤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누굴 보고 개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만약 저희 둘이 마갈라 아카데미에 갔다면, 멜도르 본인도 제 개가 됐을 거면서.
물론, 멜도르가 아니어도 벨라디의 개가 될 이는 수두룩했지만.
하여튼 앨턴은 지금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대륙 최강의 가문이었으나,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이 옅어져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때, 네시아의 귀국은 다시 화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멜도르 친구도 좀 만들어 주고 말이야.’
그렇게 멜도르를 걱정하던 벨라디는 서서히 다른 생각에 빠졌다.
‘보고 싶네.’
자신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며 호언장담하는 붉은 여우 같은 애인 킬리언.
그를 너무 오래 방치했다.
물론, 일전에 약속한 대로 당분간은 만날 수 없다 대화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라.
‘검법을 만들다 말고 몇 번이나 만나러 뛰쳐나갈 뻔했지.’
지난 8년 동안 킬리언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밤 벨라디를 찾아왔었다.
그 온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가 없는 밤은 너무 길고 허전했다.
‘오늘 당장 오라고 해야겠다.’
킬리언이 너무 바쁘면 벨라디 본인이 황궁에 머물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마침 그녀는 네시아가 오기 전까지 휴식 기간을 가질 생각이었으니까.
킬리언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웃는데, 검을 놓고 온 도로시가 총총총 벨라디에게 다가왔다.
“공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이라고?”
아직은 저택의 대문을 걸어 잠근 상태인데?
벨라디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고, 멜도르도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러자 도로시가 공손히 말을 이었다.
“황태녀 전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