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모스틴은 이 반응 역시 이해했다.
자신도 처음 이를 알고 얼마나 웃었던가.
네시아는 흑표범 같은 앨턴들 사이에 낀 순수한 흰 토끼의 이미지였다.
그런 아이가 악마의 정령사라고?
모스틴은 킥킥거리며 최근에 받은 류스펠의 편지를 떠올렸다.
「형에게.
오랜만이야, 형. 프레도 공작으로서 생활은 어때?
형이 공작이라니, 조금 낯설긴 한데, 그래도 서부에는 훌륭한 가신들이 많으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아.
난 그저께 있던 마지막 시험까지 전부 끝났어. 이제 졸업식을 하고 나면,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네.
그러니 이게 아카데미에서 보낼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
시험도 끝났고, 솔직히 더는 할 게 없어. 시간이 너무 많이 남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형에게 꺼낼까 말까 망설였던 이야기를 써 볼까 해.
형, 아카데미에서 네시아와 내 별명이 뭔지 알아?
데커딜 제국에서 온 ‘악마의 정령사’와 ‘그녀의 개’.
나는 네시아만 졸졸 쫓아다녀서 ‘개’가 되어 버렸는데, 솔직히 나쁘지 않아. 오히려 네시아의 소유가 된 것 같아 좋다고 하면, 형은 변태냐면서 날 놀려 대겠지.
하지만 들어 봐.
형이라면, 나보단 네시아의 별명에 관한 이야기를 더 흥미로워할 테니까.
왜 네시아가 악마의 정령사가 됐는지 궁금하지?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우선 네시아가 아카데미에서 세운 업적을 먼저 말해야 해.
우리가 맨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난 낯선 타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무척 긴장하고 있었어.
나보다 두 뼘이나 작은 네시아는 얼마나 힘들까 걱정도 많이 됐고.
가뜩이나 네시아는 정령사로서 온갖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잖아?
그런데 형.
네시아가 여기 오자마자 한 게 뭔지 알아?
바로, 아카데미가 간직하고 있던 정령 소환진과 수식, 그리고 정령석을 전부 보여 달라는 ‘무제한 열람권’을 요청한 거야.
사실 그건 마갈라 제국의 직계 황족에게나 허락된 특권이래. 킬리언 폐하께서 재학 중일 때도 그 정도의 열람권은 주지 않았고.
하지만 네시아는 귀하디귀한 정령사잖아?
아카데미는 신이 나서 네시아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줬어.
정령사님께서 새로운 소환진과 수식을 만들면,
“드디어 마갈라 제국에서도 정령사가?!”
다들 이런 기대를 했거든.
결과적으로 그 기대는 반만 맞았어.
네시아가 기어코 새로운 소환진과 수식을 완성시키긴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소환한 정령들과 강제적으로 계약을 맺게 하는 ‘강제 소환진’과 한 사람이 여러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다중 수식’이었거든.
네시아는 곧장 그 소환진과 수식으로 정령들을 소환했고, 강제로 계약을 맺는 것까지 성공시켰어.
한 사람의 몸으로 무려 다섯 명의 정령과 계약한 거야.
믿겨져?
나중에 네시아의 첫 번째 정령인 셰넌의 말을 들어 보니, 네시아는 타고난 자연 친화력이 어지간한 정령사보다 훨씬 풍부하다고 해.
거기다 앨턴 공작님의 영향으로 체력 단련도 꾸준히 해서, 정령을 담을 그릇도 튼튼하고 커진 상태였지.
셰넌의 말을 그대로 쓰자면,
“만약 여기가 소설이었다면, 우리 네시아는 분명 주인공이었을 거야! 범인은 엄두도 못 낼 무한한 재능의 소유자니까!”
그 말에 내가,
“그럼 앨턴 공작님은 뭘까?”
라고 물으니 셰넌이 기운 없는 소리로, 최종 보스라 중얼거리더라.
각설하고, 네시아가 완성시킨 소환진과 수식은 안타깝게도 네시아만 사용할 수 있었어. 특히 여러 정령과 계약하는 다중 수식은 더더욱.
강제 소환진은 경우가 좀 다르긴 해.
그건 자연 친화력이 충분한 이가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정령이 소환에 응해야만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마갈라 제국인들은 정령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신성하게 여기잖아?
정령의 의사를 무시하는 강제 계약은 있을 수 없다고 펄쩍 뛰더라고.
그런 와중에 네시아가 네 명의 정령과 강제로 계약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난감해했는지 형도 상상이 갈 거야.
아, 네시아는 왜 그렇게 많은 정령과 계약했냐고? 그리고 강제로 계약하게 될 걸 알면서도 왜 정령들이 소환에 응한 거냐고?
후자를 먼저 설명하자면, 네시아는 차례차례 정령을 소환한 게 아니야. 네시아가 미리 점찍은 정령들이 있었거든.
물, 빛, 땅, 바람. 이렇게 넷.
네시아는 말이야, 이 네 정령을 놀랍게도 동시에 소환했어!
걔네도 처음엔, 강력한 자연 친화력을 가진 이가 자신을 소환하니까 호기심에 나와 봤대. 마음에 안 들면 돌아갈 생각으로.
그렇게 여유롭게 있다가 그대로 코가 꿰인 거지.
그리고 네시아가 이 네 정령만 콕 집어서 계약을 한 이유는…….
네시아의 말을 그대로 적어 볼게.
“너희구나? 벨라디 언니와 테오도르 님을 괴롭힌 앙큼한 정령들이?”
알고 보니, 전 앨턴 공작님의 두 팔을 망가트렸던 범인이 바로 저 정령들이었다 하더라?
네시아는 그 복수를 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에 매진했던 거야.
이렇게 복수할 대상을 소환했으니, 네시아가 뭘 했겠어?
……사실, 뭘 어떻게 했는지 나한테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현장에 있던 셰넌의 말에 따르면.
“난 우리가 소멸할 수 있는 존재란 걸, 그때 처음 자각했단다.”
아마 아주 잘근잘근 정령들을 굴린 모양이야. 앨턴 공작가에서 배운 대로 말이야.
어쩐지 그 네 정령이 볼 때마다 온 기력을 상실한 모습이긴 하더라.
그래도 정령들이 구를수록 네시아의 자연 친화력은 더욱 세심하게 단련되었으니, 좋은 일 아닐까 싶어.
참고로 네시아는 자신의 복수를 비밀로 하지 않았어.
덕분에 수많은 아카데미생들이 네시아가 정령을 소환한 이유를 알게 되었지.
많은 이들이 네시아의 행위는 정령의 자유를 침범하고 학대하는 것이라며 비난했지만, 뭐 어쩌겠어?
계약을 한 건 네시아고, 네시아는 정령들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오히려 기분이 상한 네시아는 아카데미생들이 강제 소환진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명분으로 연구 자료를 영구 폐기했다고 하더라고.
아카데미는 함부로 네시아를 비난했다가 눈앞에서 귀중한 자료를 잃게 된 셈이지.
그렇게 네시아는 자신만의 위치를 굳건히 구축했어. 네시아가 날이 갈수록 강한 정령사가 되어 가니, 아카데미에서도 막을 적수가 없어졌고.
그 덕분에 네시아는 악마같이 정령들을 괴롭힌다는 뜻의 ‘악마의 정령사’가 된 거야.
네시아는 여전히 키도 작은 편이고, 짧은 은발에 동그란 눈이 너무 귀여운 아이야.
이런 네시아가 지나갈 때마다 아카데미생들이 바짝 겁을 먹고 얼마나 바들바들 떠는지 알아?
이 진풍경을 형한테도 보여 주고 싶다. 그럼 형이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 텐데.
참고로 네시아는 은근 이 별명을 뿌듯해해. 이제야 자기도 진정한 앨턴으로 인정받는 것 같다고 말이야.
하지만 네시아도 참, 아무리 뿌듯해도 벨라디 앨턴 공작님께만은 알리고 싶지 않대.
“네시아, 그 별명은 복수를 철저히 했다는 증표니까 칭찬받지 않을까?”
이렇게 물어봤는데, 공작님께는 아직 작고 어린 막내 여동생으로 남고 싶나 봐.
사실 북부의 정보망이면 이 별명쯤은 벌써 아실 텐데, 네시아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나도 그냥 입 다물기로 했어. 형도 네시아 앞에서는 괜한 말 꺼내지 마.
어쨌든 네시아는 이제 역사상 가장 강한 정령사로 기록될 것 같아. 우리 제국으로서도 좋지. 황태녀 전하의 친우가 가장 강한 정령사인 거니까.
데커딜 제국 이야기를 하니 벌써 그립네.
그럼 형, 손이 아프니 이만 편지 줄일게. 다음엔 집에서 만나자.
아버지께도 안부 전해 줘.
오늘도 충실히 네시아의 개 역할을 수행한 류스펠이.」
‘쯧쯧, 사랑에 눈이 먼 자들이여.’
그놈의 개 역할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킬리언도 그렇고, 류스펠도 그렇고.
이성적인 자신이 봤을 땐 전부 머저리나 다름없다며 모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한편, 모스틴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킬리언은 흐뭇함에 후후 웃었다.
“안 그래도 나 역시 벨라디를 힘들게 한 그 정령들에게 악감정이 있었지. 네시아가 기특한 일을 했네.”
“흥미진진한 이야기죠? 이런 네시아가 귀국하는 일이니, 아마 벨라디도 헤라 전하를 잘 맞이해 줄 겁니다.”
그 말에 킬리언은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모스틴은 싱글벙글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네시아가 얼마나 컸는지 궁금하네요. 전하께도 자기와 같이 폐하를 욕할 사람이 생기는 거니, 얼마나 든든할까요.”
“윽.”
다시 시동 거는 모스틴의 장난에 킬리언은 얼른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크흠! 프레도 공작. 확실히 공작이 말해 준 소식은 흥미로웠지만, 내가 그대를 부른 연유는 따로 있지.”
“말씀하소서, 폐하.”
모스틴의 여유로운 웃음은 킬리언이 내민 사진 몇 장으로 단숨에 깨지고 말았다.
“폐, 폐하 이건…….”
“내가 설마 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대와 내 친분이 워낙 두터우니, 나한테까지 이런 요청이 쇄도하는군.”
킬리언은 사색이 된 모스틴의 표정을 보며, 묘한 통쾌함을 느꼈다.
상황은 단번에 역전된 것이다.
“어때, 프레도 공작.”
킬리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그대도 잘 맞는 약혼녀를 찾는 게? 그 사진 속 영애들은 좋은 가문 출신에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들이야. 내가 보장해.”
그렇다, 킬리언이 모스틴에게 넘긴 건, 바로 귀족 영애들의 사진인 것이다.
모스틴은 현재 결혼 시장에서 일등 신랑감으로 꼽혔다.
젊고 미혼인 서부의 주인을 탐내는 가문은 아주 많았고, 그들은 어떻게든 모스틴과 연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가진 연줄이란 연줄은 전부 활용하고 있었다.
그 적극적인 중매 활동에 황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스틴은 원망 섞인 눈으로 킬리언을 바라봤다.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자기는 이미 든든한 배필이 있다고 저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