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헤라, 오늘은 서부의 분쟁 지역으로 직접 나가서 영주들을 만났다지? 잘했다. 지금만큼 직접 현장에 나갈 적기가 없어. 앞으로 네가 황좌에 오르면, 부하들의 보고만으로 먼 지역의 상황을 파악하고 일을 결정해야 해. 그러니 이런 때 경험을 충분히 쌓아야만,”
“그만, 그만!”
쾅-!
헤라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에 줄줄줄 말을 늘어놓던 킬리언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지금은 제가 간신히 확보한 휴식 시간이에요. 전 그 시간을 오라버니와 함께 보내고 싶어서 찾아온 거고요! 그런데 이런 순간조차 할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나요?!”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절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갈수록 잔소리가 늘어나잖아요! 오라버니는 정말!”
헤라는 아주 오래 참았다는 듯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정말 극성이에요!”
“뭐라고?”
“부담스럽다고요!”
그렇게 소리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벗어났다.
킬리언은 막내 여동생이 남기고 간 찻잔을 멍하니 바라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넌.”
“예, 폐하.”
“……내가 좀 심했나?”
킬리언의 물음에 황자 시절부터 그의 최측근 보좌관이었던 아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요.”
아넌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헤라 황녀님께선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폐하께서 내 주신 살인적인 분량의 교재를 빠르게 소화하시곤, 곧바로 실전에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헤라의 수고를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바로 한 달 뒤가 헤라의 성인식이고, 그 즉시 황위를 물려주려다 보니…… 조급해져서.”
킬리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적당히 식은 차를 홀짝였다.
그동안 헤라는 정말 잘 따라왔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더 잘하겠다며, 끝없이 학업에 열중하고, 사람을 다스리며 백성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웠으니까.
훌륭한 성군의 소양을 스펀지처럼 쏙쏙 흡수하며 성장한 헤라.
그렇게 8년이 지나니 킬리언이 그토록 기다리던 헤라의 성인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초조함에 쫓기는 건 킬리언이었다.
“역시 내가 좀 성급했나? 황위는 조금 더 지켜보고 주는 게 나으려나?”
“편하신 대로 하소서.”
“아니야, 그래도 난 너무 오래 기다렸단 말이지. 데커딜 제국을 위해 헌신했다고. 그러니까 슬슬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나?”
“편하신 대로 하소서.”
“하지만 역시 황제가 되기에는 헤라가 좀 어린 것 같아.”
“…….”
“하아, 그래도 내게는 몇 년째 나만 기다려 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독수리 같은 애인이 있는데.”
이쯤에서 아넌은 더 이상 대꾸하는 것을 포기하고, 킬리언의 고뇌를 흘려들었다.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로 항상 신하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수완가였으나…….
애인인 앨턴 공작과 동생인 헤라와 관련해선 저런 머저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킬리언은 곤란한 얼굴로 차를 마저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끙거리던 표정은 어느새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슬슬 휴식 시간이 끝나 가는군.”
이러나저러나 지금은 그가 바로 데커딜 제국의 황제였고, 황제인 그는 언제나 바쁜 몸이었다.
“가자, 아넌.”
어느덧 군주의 얼굴로 돌아온 킬리언에게 아넌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예, 황제 폐하.”
둘은 그렇게 익숙한 집무실로 향했다.
***
집무실로 들어선 킬리언은 각 영지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빠르게 처리했다.
그러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프레도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그 말에 집무실 문이 열리며, 프레도 공작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킬리언은 서류에서 눈을 떼며, 프레도 공작을 환영했다.
“어서 오시게, 프레도 공작.”
“위대하신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렇게 인사한 프레도 공작의 갈색 눈이 짓궂게 휘어졌다.
“폐하, 제가 이곳으로 오면서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죠.”
“내 속을 긁을 이야기라면 꺼내지 말도록.”
“아, 아. 들어 보십시오, 폐하. 아주 흥미진진한 소식입니다.”
제 입을 원천 봉쇄 하려는 킬리언을 만류하며, 프레도 공작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요 앞에서 황태녀 전하를 만났사온데.”
“헤라를?”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공작. 이번 기회에 나도 가출이란 걸 할까 싶은데, 공작의 저택에 내가 머물 방이 있는가?’ 하셨습니다.”
“뭐라고?!”
킬리언은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체면을 차리지도 못한 채, 앞으로 뛰쳐나가 프레도 공작의 어깨를 탈탈 털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아이고, 그 어린 황태녀 전하께서 얼마나 시달리신 건지. 얼굴이 그분 눈만큼이나 시퍼렇게 변하셨길래 제가 얼른 달래 드렸지요.”
“모스틴 프레도!”
킬리언의 닦달에 작년, 새롭게 서부의 주인이 된 프레도 공작.
모스틴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십니까?”
“당연하지!”
“황제로서? 아님 전하의 오라버니로서?”
그 질문에 킬리언은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벨라디와 똑같이 곤란한 질문만 던지는군.”
“이게 다 앨턴 공작한테 배운 것입니다, 폐하.”
“벨라디는 귀여우니까 뭘 해도 좋아. 하지만 그대는 얄밉기만 해.”
킬리언의 대답에 모스틴이 푸하하 웃으며 휘적휘적 집무실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지난 8년 동안, 둘의 관계도 많이 바뀌었다.
벨라디로 엮인 두 사람은 단순히 황자와 서부의 후계가 아닌, 절친이라 불릴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된 것이다.
“킬리언 폐하. 이 세상에 벨라디를 귀엽다고 말하는 건 폐하밖에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 세상에 벨라디의 애인은 나밖에 없으니까.”
“으으, 오글거려.”
모스틴은 팔뚝을 문지르고는 답했다.
“황태녀 전하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쉽게도 저희 저택에는 황제 폐하의 눈을 피할 만한 공간이 없다고.”
“당연하지. 내 귀한 여동생을 남의 집에서 재울 생각 절대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 수도 안에서 폐하가 감히 손 뻗을 수 없는 곳이 딱 하나 있다고요.”
그 말에 킬리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앨턴 공작가로 가 보라고 알려 드렸죠.”
킬리언은 모스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모스틴은 익숙하게 그 시선을 흘려보냈다.
‘하아-, 벨라디는 어떻게 저 녀석과 어울려 다니는 거지?’
킬리언은 한탄했다.
아무리 공작 위를 물려받았어도 모스틴의 장난기는 여전했다.
정말 유쾌하고 즐거운 친구였으나, 텐션이 낮고 신중한 킬리언에게는 가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지금도 딱 그런 경우였다.
“지금 앨턴 공작가는 한창 예민할 때인데, 헤라에게 거기를 추천했단 말이야?”
벨라디는 현재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꾸준히 검술을 연마해 온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건 새로운 검법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앨턴 공작가의 분위기는 더없이 날카로웠고, 살벌했다.
킬리언 본인조차 찾아가지 못할 만큼.
“물론 헤라는 신중한 아이니까 무턱대고 찾아가지는 않겠지만.”
“짐 싸러 가겠다고, 바로 움직이시던데요?”
“뭐라고? 그럼 네가 말렸어야지!”
“추천해 준 것도 전데, 말리는 것도 제가 하면 모양이 좀 우습잖아요? 하하하!”
그 가벼운 언동에 킬리언은 머리가 아팠다.
‘으으, 벨라디는 도대체 어떻게 모스틴과?’
그 벨라디도 모스틴 이상으로 짓궂은 편이라는 걸 자각 못 하고, 킬리언은 끄응 앓을 뿐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나서야, 모스틴은 장난기를 거두었다.
여기서 더 하면, 킬리언을 놀린 값을 벨라디에게 배로 돌려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앨턴 공작가의 대문이 활짝 열릴 테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벨라디가 검법을 완성시켰으면 나한테 먼저 말했을 텐데.”
“그건 아니고. 이제 곧 돌아올 때 아닙니까.”
모스틴은 남몰래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마갈라 제국으로 유학 갔던 아이들이요.”
“아…….”
그 말에 킬리언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헤라에게만 집중하느라 그 아이들의 졸업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네시아와 류스펠이 돌아올 때가 벌써 다가온 건가.”
하긴, 헤라의 성인식은 곧 그 아이들의 성인식이기도 하니까.
킬리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모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녀 전하와 네시아 앨턴은 친구 아닙니까. 그동안 학업으로 서로 떨어져 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니, 벨라디가 반갑게 맞이해 줄 겁니다.”
그제야 킬리언은 상황을 전부 파악했다.
‘그래, 헤라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앨턴 공작가로 갈 아이가 아니지.’
모스틴에게 네시아 이야기를 듣고, 오랜 친구를 환영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거구나.
그런 귀여운 사유의 가출이라면, 얼마든지 보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오전에 있던 헤라의 외침이 킬리언의 마음에 박혀 있었으니까.
-오라버니는 정말 극성이에요! 부담스럽다고요!
‘…….’
생각보다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킬리언은 피가 철철 흐르는 속을 다스리며, 모스틴을 바라봤다.
“어쩐지 그래서 너도 평소보다 들뜬 거였군. 프레도 공자가 돌아오는 거니까.”
“우리 류스펠…….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가족 놔두고 사랑을 쫓아간 녀석이죠.”
모스틴은 잠시 추억을 회상했다.
네시아를 따라 마갈라 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도 자신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가.
‘네시아를 그 낯선 땅에 홀로 보낼 수 없다고 했었나.’
자신이 보기엔 류스펠보다 네시아가 훨씬 어른스러운 것 같던데.
하여튼 류스펠은 결연했고 또 고집스러워, 아버지도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때를 떠올린 모스틴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류스펠이 반갑긴 한데, 그것 때문에 들뜬 건 아닙니다.”
“그럼?”
“폐하, 마갈라 제국 아카데미에서 네시아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흠, 잘 모르겠는데.”
네시아는 정령사로서 마갈라 아카데미의 큰 주목을 받았고, 그 후로 줄곧 1등의 성적을 유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디테일한 아이의 일상까지 신경 쓰기에는 킬리언이 너무 바빴다.
모스틴도 이를 이해했다.
자신도 류스펠이 보낸 마지막 편지를 통해 겨우 이를 알게 되었으니까.
“악마의 정령사.”
“뭐?”
“네시아의 별명이랍니다. 데커딜 제국에서 온 악마의 정령사.”
킬리언은 다시금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