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아이닝, 제발.”
킬리언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킬리언의 반응에 난 키득거리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화 풀렸어요?”
장난기가 살짝 섞인 내 목소리에 킬리언은 곤란한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라진 척을 하려고 해도, 아이닝 덕분에 쉽지가 않네요.”
“난 내 감정에 충실할 뿐이야~!”
내 침대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아이닝이 소리쳤다.
킬리언은 그 말에 피식 웃고는 그대로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췄다.
내가 했던 입맞춤과는 전혀 다른 깊은 키스였다.
나도 기꺼이 거기에 응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숨결을 섞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저도요.”
여운에 젖은 눈으로 킬리언이 날 바라봤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로 많이.”
심장이 설렘으로 떨려 오는 대답이었다.
난 그 고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킬리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는 이런 날 마주 안은 채 조용히 말했다.
“사실 때때로 불안했어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요?”
그에게 계속 내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안일한 일이었다.
킬리언은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호감을 표현했었는데 말이다.
‘반성하자, 벨라디 앨턴.’
그렇게 여기며 힐끔 그를 올려다보니, 킬리언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솔직히…… 당신과 내가 결국 이런 사이가 될 거란 건, 조금 자신 있었어요.”
오호라?
예상하지 못한 그 당돌한 말이 재밌어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킬리언은 자연스럽게 그쪽에 뽀뽀를 했다.
“벨라디 당신이 때때로 약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뿌듯한지…… 당신은 아마 평생 모를 거야.”
그 속삭임에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모든 경계심을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킬리언밖에 없다는 걸.
나도 지금에서야 인지한 사실을 그는 진작 알고 있던 모양이다.
‘이런 게 사랑인가?’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연약한 속내를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게, 사랑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뭐가 불안한 건데요?”
“……이렇게 서로 바쁠 때마다, 당신이 저와 상의 없이 혼자 날 배려할까 봐요.”
조심스러운 대답에 난 따뜻한 품에서 빠져나와 킬리언과 눈을 마주했다.
킬리언의 투명한 회색 눈에는 오로지 나만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점점 오해와 서운함이 쌓일까 봐요.”
“난…….”
“일과 연애 사이의 균형을 찾는 건, 혼자가 아니라 함께 정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전 언제든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고요.”
그렇게 말한 킬리언이 조금은, 아니 아주 많이 섭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난 그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도록 킬리언의 뺨을 꼭 잡았다.
그리고 킬리언과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
“내가 그런 면에서는 많이 부족해요.”
“…….”
“난 남들보다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빨리 돌아가지만 그만큼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정할 때가 많아서…….”
“벨라디.”
“그러니 내가 그럴 때마다 킬리언이 지적해 줘요.”
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 말대로,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당신이 유일하니까. 나한테 가르쳐 주면, 오해와 서운함이 쌓이지 않도록 주의할게요.”
“나한테만큼은 언제나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 틈을 노렸는지, 킬리언이 작게 덧붙였다.
난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제야 킬리언도 환하게 웃었다.
저편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던 아이닝도 슬금슬금 이리로 다가와 우리 사이에 뛰어들었다.
“벨라디~ 킬리언~ 아이닝도 안아 줘~!”
그 요구대로 난 틈을 만들어 아이닝을 품으려 했다.
그러나 단호한 손길이 작은 여우의 목덜미를 잡고는 가볍게 들었다.
“자, 아이닝.”
대롱대롱 킬리언의 손에 들려 나온 아이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킬리언?”
“착한 정령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싫어싫어! 난 벨라디랑 있을 거야!”
아이닝의 투정에 킬리언은 어림없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 보자, 아이닝. 좋은 꿈 꾸고.”
“이잉, 나 오늘은 벨라디랑 같이 잘 거,”
아이닝의 말은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
킬리언이 재빨리 아이닝을 역소환했기 때문이다.
‘웬일이야?’
어지간하면 아이닝에게 무른 태도를 보여 온 킬리언이?
내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킬리언이 소파에서 일어나 날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곧장 침대로 직진하며 물었다.
“매일 밤 당신을 찾아와 달란 말, 빈말 아니죠?”
아까 내가 꺼낸 유혹을 말하는 건가?
킬리언의 목소리가 하도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긍정했다.
“그렇죠.”
“그럼 벨라디.”
조심스럽게 날 침대에 눕힌 킬리언이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탔다.
이렇게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건 낯선 각도였다.
내가 조금 머뭇거리는 사이, 킬리언이 느긋하게 내 제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건, 제 마음대로 할게요.”
“그 말은,”
나 역시 아까의 아이닝처럼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킬리언이 그대로 내 입을 제 입으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길은 아주 유려하게 재킷의 단추들을 풀고 있었다.
“제가 자주 입던 옷이라, 벗기기 편하네요.”
킬리언은 만족스럽게 속삭이며 그대로 내 목으로 내려갔다.
난 그런 그의 머리를 자연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날이네.’
물론, 나로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그날 밤.
킬리언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나와 함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그와 맞이한 햇빛은 어느 때보다 따스했다.
‘비록 잠은 한숨도 못 잤지만.’
취임 첫날부터 지각하게 생겼네.
그래도, 큰 문제가 있겠냐는 태평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맞아, 그동안 난 너무 바쁘게만 달려왔잖아?’
그러니 연인과 이 정도의 여유는 즐길 수 있지.
안 그래, 벨라디 앨턴?
스스로와 타협하는데 날 품에 안고 있던 킬리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계속 이러고 싶다.”
약간 쉰 목소리에 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매일 밤 찾아올 거라면서요.”
“……돌아가기 싫어요.”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겠네요.”
난 작게 킬리언의 코를 톡 쳤다.
“이제 황위를 이으실 황태자 전하가 되셨으니, 업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되죠?”
“솔직히 전 황태자나 황제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앨턴 공작의 부군이 돼서 당신을 보필하고 싶은데.
그 투정에 난 조금은 가벼운 기분으로 답했다.
“그래도 킬리언, 당신한테는 다행히 아주 믿음직한 후계가 있잖아요?”
“아……!”
“헤라 황녀가 있으니, 조금 느긋하게 생각해요.”
“후-, 노력할게요.”
킬리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날 더 꼭 껴안았다.
난 그의 등을 토닥이며 잠시 생각했다.
‘헤라 황녀가 성인이 되고, 차기 황제로서 실무를 쌓을 시간도 필요할 테니……. 못해도 14년 정도 지나면 되려나?’
물론, 이때의 난 전혀 몰랐다.
킬리언이 나와는 꽤나 다른 꿈을 꾸고 있을 줄 말이다.
***
황궁으로 돌아온 킬리언은 그날부터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자료를 수집하고, 다듬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과 낮에는 황태자로서 업무를 수행하고 저녁에는 간단한 운동과 앞으로의 계획 수립과 자료 정리.
그리고 밤에는 벨라디를 만나 달콤함에 취하는.
가끔은 아이닝의 도움으로 밤도 꼬박 새우면서, 그야말로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몇 달 후.
“헤라.”
쿵-!
헤라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두툼한 책 몇 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오라버니. 이게 다 뭐예요?”
헤라의 질문에 킬리언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네가 황제가 되기 위해 받을 수업의 핵심 자료들을 가장 효율적이고 알차게 구성한 교재들이야.”
“네?”
“네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들과 학자들에게 이미 같은 교재를 배포했어. 이것만 독파하면 앞으로 5년 안에 실무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동안의 고등 교육은 각자 수많은 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저술한 수백 편의 논문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배움의 순서가 꼬일 때도 있었고, 실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하나의 통일된 교재로 만드는 작업은 매우 귀찮고 까다로워,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
여기 이 남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세상에, 오라버니.”
“헤라!”
킬리언이 헤라의 어깨를 잡았다.
“난 네가 그리리카 선황보다 더 훌륭한 황제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헤라는 깊게 감동했다.
이렇게나 자신을 믿어 주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열의를 불태우다니!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 같아, 아이는 순수하게 기뻤다.
“우리 함께 큰 그림을 그려 보자!”
“고마워요, 오라버니!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헤라는 킬리언이 내민 두꺼운 교재를 꼭 껴안았다.
표지에 그 제목이 큼지막하게 적힌 <군주의 정석>을.
이날 이후로, 본인이 만든 <군주의 정석>이 제국을 넘어 대륙 모든 나라의 후계자들에게 필수 교과서가 된다는 것을 모른 채, 킬리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사랑에 눈이 먼 이 사내에게는 단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헤라에게 빨리 황위를 넘겨주자!’
앞으로 헤라가 성인이 되기까지 대략 8년! 아니, 역사를 보면 성인이 되기도 전에 황위를 물려받은 이들은 많아!
‘그렇게 헤라가 황제가 되면…….’
난 벨라디와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는 거야!
킬리언은 부푼 꿈에 젖어 들어갔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마냥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킬리언도 모를 그만의 지루하고도 조금은 고된 싸움은 지금 막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