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하여튼 프레도 공작에게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욕망은 없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뒤처지는 건 허용하지 않는 사내였다.
나도 아는 그의 성향을 아들인 모스틴이 모를 리 없었다.
“서부가 꾸물거리는 사이, 남부가 치고 올라온다는 기사가 나오면 우리 아버지 아마 펄쩍 뛰실 거다.”
짓궂게 웃은 모스틴이 시온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올렸다.
“이참에 남부의 재건 홍보도 확실히 해 줄게. 철도로 국내가 묶인다고 해도, 무역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럼 나야 좋지. 그래도 우리 남부가 너무 뒤처진다는 표현은 삼가 줘.”
시온이 안경을 쓱 치켜올렸다.
“나도, 아버지도, 그리고 남부의 모든 이들도. 지난 잘못을 바로잡고 뚫린 구멍을 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원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난 지나가던 하인의 쟁반에서 새 잔을 들며 말했다.
“이 난관이 남부의 미래를 위한 도약의 계기가 될 거야.”
케스퍼 아글라와 황태자가 거울 속에서 빠져나온 건 대략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반쯤 정신을 상실한 둘은 극비리에 사형에 처해졌다.
시온의 가족들은 황제의 배려를 뒤로하고, 케스퍼 아글라의 최후를 함께 지켜봤다.
그 당시, 그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난 모른다.
다만, 내 친구는 이제 어떤 시련이 와도 거뜬히 넘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내 위로 아닌 위로에 시온이 싱긋 미소 지었다.
“응! 머지않아 우리 남부가 다시 제국 제일의 자리를 되찾아 올 테니까!”
시온의 다정한 미소에서 어쩐지 나와 모스틴의 짓궂음이 느껴졌다.
“그 자리 조금만 맡고 있어 줘, 벨라디.”
예상치 못한 선전 포고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모스틴도 같은 반응이었다.
“오호라.”
“우리 시온이…….”
이런 우리 둘을 보며 시온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나도 후계가 됐으니, 가만있을 순 없지.”
그 기세 좋은 대답에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난 승부를 걸어 온 사람이 아무리 친구라 해도 봐주지 않아.”
“크흠! 나도 틈이 생기면 놓치지 않는 야생의 하이에나 같은 사람이라고! 조심해야 할걸?”
“난 내가 몰랐던 너희의 새로운 면모가 벌써 기대돼. 우리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선의의 경쟁을 하자!”
나름 무게를 잡았던 나와 모스틴은 저 햇살 같은 대답에 결국 시온을 마구 쓰다듬어야 했다.
그렇게 셋이서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떨다, 모스틴이 문득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킬리언 황자님의 등장이 좀 늦네?”
“그러게?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이쯤이면 슬슬 오셔야 하는데?”
둘의 대답에 난 태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사람 오늘 안 와.”
“뭐?”
“안 온다고?”
둘이 동시에 날 바라봤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마셨다.
“킬리언 전하야말로 지금 이 제국에서 제일 바쁠 사람이잖아.”
시온은 케스퍼 아글라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남부를 진정시키는 데만 하루를 꼬박 쓰고 있었다.
그럼, 동서남북 제국 전역을 관리하고 있던 황태자의 빈자리는 누가 메꾸고 있는가?
그건 응당 킬리언의 몫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연회 초대장을 보낼 수 있겠어? 수도의 임명식에 참석해 주신 걸로 난 만족해.”
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본 적이 있던 터라, 킬리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에 시온이 흘러 내려가는 안경을 고치며 물었다.
“벨라디 그럼 킬리언 전하께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어?”
“응.”
“진짜?!”
이번엔 모스틴이 입을 쩍 벌리다, 내가 마시고 있던 와인 잔을 확 낚아챘다.
“지금 와인이나 마실 때냐?!”
“뭐 하는 짓이야?”
“벨라디 너!”
여기까지 말한 모스틴이 목소리를 확 낮추며 속닥였다.
“킬리언 전하랑 특별한 사이 아니었어?”
“맞아, 맞아.”
옆에서 시온까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날 바라보니, 난 잠시 눈을 깜빡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티 많이 나?”
“당연하지!”
“당연하지!”
이구동성으로 외친 둘은 인상을 쓰며 미간을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계승식까지는 그렇다 쳐. 그건 북부만의 행사니까. 그래도 축하연 초대장은 보내야지.”
“그래, 벨라디. 심지어 킬리언 전하는 우리보다도 먼저 너와 일을 도모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을 얼마나 축하하고 싶었겠어?”
“그 축하는 수도에서 실컷 받았어. 그러니 괜히 바쁜 사람한테 일 두 번 시킬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초대장은 보내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벨라디 앨턴, 이 정 없는 사람 같으니! 아무리 못 온다고 해도, 기분이란 게 있잖냐!”
그 뒤로도 타박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걸 가만히 들어 주던 난 결국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둘의 귀를 동시에 잡아당겼다.
“그렇게 원하면, 두 사람에게는 내 정을 듬뿍 줘야겠지?”
“아야야-. 벨라디 이건 조금 아플지도.”
“아이고! 조금이 아니잖아, 시온! 귀여운 내 귀 떨어진다!”
이렇게 장난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지만, 시온과 모스틴의 말이 묘하게 가슴에 남았다.
안 그래도 킬리언은 계승식 때의 날 보지 못한다며 꽤 속상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지도 못할 연회의 초대장을 보내면 놀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넘겼던 건데…….
내가 잘못 판단한 걸까?
‘안 되겠다. 연회가 끝나면 타우딘을 통해서 편지라도 보내야겠어.’
편지 한 통 읽을 시간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난 뒤이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연회의 밤이 깊어져 갔다.
***
늦은 밤.
겨우 연회가 끝났고, 시온은 남부로. 모스틴은 북부 성에 마련된 손님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돌아가는 시온을 배웅하고 돌아온 후에야 나도 침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때 내 방에서 대기 중이던 스티아가 다가왔다.
“벨라디 님, 손님이 와 계십니다.”
그 말에 난 의아함을 표했다.
“지금 이 시간에? 그것도 내 방에 있단 말이야?”
내 물음에 스티아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난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마저 옮겼다.
‘평소의 스티아라면, 손님을 본채의 응접실로 안내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내가 이런 무례 정도는 허용할 사람이란 거겠지.
‘가령…….’
그렇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많이 늦었네요.”
“킬리언.”
과연, 예상대로였다.
킬리언이라면 다이아몬드로 즉시 내 방에 왔을 테니, 스티아가 내보내지도 못했겠지.
‘거기다 우리 사이도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의 목소리가 꽤 날카로웠다.
“저 없는 연회가 즐거웠나 보군요.”
“킬리언.”
“들어 보니, 저를 제외한 모두가 초대장을 받았던데……. 헤라까지도.”
그건 내가 보낸 게 아니라 네시아가 보낸 거였다.
결과만 말하면, 헤라 황녀도 뒤늦은 후계자 수업을 듣느라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뭐, 그에게는 이 결과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 같다만.
“전 초대장조차 못 받았으니, 혼자서 조용히 서류나 처리해야죠.”
“…….”
“마침 잘 됐어요. 임명식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절 향한 당신의 배려 덕분에 온전히 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불만이 많이 쌓인 듯, 와다다 말을 쏟아 내던 킬리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옆에 꼭 붙어 앉은 내가 어깨에 머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킬리언. 전 당신을 위한다고 그런 건데……. 많이 섭섭해요?”
난 그렇게 속삭이며 힐끔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킬리언 역시 슬쩍 날 보고는 매정히 고개를 틀었다.
“당연하죠.”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당신한테 꼭 말할게요.”
솔직히 이렇게 말하면, 그의 화가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내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킬리언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류만 주시했으니까.
생각보다 단호한 반응에 난 드물게 당황했다.
‘역시 아무 말 없이 초대장조차 보내지 않았던 게 실수였나?’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킬리언의 화가 풀릴까?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모스틴이 남긴 조언이 떠올랐다.
-벨라디, 혹시 킬리언 전하께서 이번 일로 삐지신다면 이렇게 해 봐.
그때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하냐며 무시했는데…… 한번 해 볼까?
때마침 연회에서 계속 마신 술 덕분에 이성도 적당히 풀린 채였다.
마음을 굳힌 난 느릿한 몸짓으로 킬리언의 손에서 서류를 쏙 뺐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돌려주세요.”
“킬리언.”
난 그렇게 말하며 사르르 웃었다.
그러자 킬리언이 잠시 멈칫거렸고, 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바짝 다가간 난 입을 맞출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생각해 보니, 중요한 말을 계속 못 했던 것 같아서요.”
내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킬리언이 애써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무슨 말인데요.”
“사랑해요, 킬리언.”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전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내 고백에 킬리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내 눈을 응시했다.
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앞으로도 오늘처럼 매일 밤 날 찾아와 줄래요?”
이게 내가 술기운을 빌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혹이고 애교였다.
이걸로 킬리언의 마음이 녹았는지 아닌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난…….”
그가 막 입을 열 때, 뿅- 허공에서 아이닝이 나타났으니까.
“끼얏호-!”
소리친 아이닝은 잔뜩 흥분한 채 내 침실을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우와앙! 기분 좋아! 나 왜 이러지?! 하늘을 뚫고 날 것 같아! 세상이 아름다워! 흠하-! 흠하-! 공기도 달콤해! 이런 거 처음이야! 꺄앙!”
아이닝은 카펫 위를 뒹굴고 발길질하며 좋아했다.
‘아이닝이 저렇다는 건…….’
난 슬쩍 킬리언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