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87화 (외전) (188/197)

외전 1.

청명한 하늘.

북부 특유의 날카로운 고딕 양식 성 아래에는 군중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계승식의 마지막으로.”

북부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의 가주이자, 앨턴 공작가의 영원한 충신인 리켄 남작이 입을 열었다.

“테오드르 앨턴 공작님께서 새로운 북부의 주인께 깃발을 하사하시겠습니다.”

남작의 진행에 가장 높은 단상의 상석에서 테오도르가 일어섰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그에게 공손히 깃대를 내밀었다.

묵묵히 그걸 받아 든 테오도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벨라디에게로 향했다.

“일어서라.”

그 말에 벨라디는 절도 있는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시원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격식을 갖춘 군복, 한쪽 어깨에 연결된 망토는 그녀의 몸에 딱 맞아 아주 잘 어울렸다.

‘확실히 드레스보다 편하네.’

앞으로는 자주 바지를 입어 줘야겠어.

자신이 먼저 시작하면, 다른 여성들도 한결 편하게 시도해 볼 테니까.

벨라디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테오도르가 깃대를 넘겼다.

두 손으로 단단히 그걸 받아 든 벨라디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재활은 무사히 진행됐나 보네요.”

벨라디에게 약속했던 대로, 테오도르의 양손은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소화할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딸아이의 계승식을 망칠 순 없지.”

옅은 미소를 지은 테오도르는 벨라디의 한쪽 손을 슬쩍 바라봤다.

아버지의 의도를 파악한 그녀는 자연스럽게 깃대를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

이를 확인한 테오도르가 벨라디의 빈손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새로운 앨턴 공작의 탄생이다!”

마력이 담긴 테오도르의 외침이 성 아래로까지 널리 퍼졌다.

그러자 모여 있던 군중들이 두 손을 높이 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벨라디 앨턴 공작님 만세!”

“북부에 무한한 영광을!”

목청껏 소리를 지르던 군중들은 어느새 목소리를 합쳐 북부의 수호자를 연호했다.

“앨턴! 앨턴! 앨턴!”

그들을 제지하던 병사들은 물론, 단상 가까이에서 계승식을 지켜보던 북부의 가신들도 군중의 흥분에 휩싸였다.

철갑이 맞부딪히는 소리, 잦아들 줄 모르는 환호, 자신을 우러러보는 수천의 눈동자들.

이 모든 것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던 벨라디는 씨익 미소 지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풍경이야.’

때마침 스치고 지나간 북부의 여름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깃발이 펄럭이며 앨턴가의 문장이 드러났다.

앨턴을 상징하는 검은 매와 짙은 흑발의 벨라디 앨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찍어! 바로 지금이야!”

“하하! 저렇게 바람까지 돕다니!”

벨라디가 따로 마련한 공간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들이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 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벨라디를 조명해 주고 있었다.

‘내일 신문도 볼만하겠군.’

큰 만족감과 성취감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

북부의 가장 큰 이벤트인 계승식이 무사히 끝났다.

이제 공식적으로 아버지가 아닌 내가 앨턴 공작이 된 것이다.

‘마음에 들어.’

제국 최초의 여성 공작이라……. 이제 난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위인이 되겠군.

곧바로 축하 연회가 이어졌다.

앨턴 공작가는 이날 공작령을 포함한 모든 북부 영지에 성대하게 음식과 술을 베풀었다.

거대한 북부의 모든 이들이 배부르게 먹을 양이라 값이 어마어마했지만, 솔직히 부담되지 않았다.

‘전부 이 내가 루비와 철도로 쌓아 놓은 재화 덕분이지.’

거기다 난 원래 쓸 때는 확실하게 쓰는 사람이잖아?

덕분에 새로운 공작을 향한 찬양은 높아져만 갔다.

“과연, 앨턴가의 배포는 남다르군요.”

“새 공작님의 아량을 따라가려면, 이 노인들이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이 분위기를 느낀 가신들도 날 둘러싸며 하하허허 웃었다.

난 들고 있던 와인으로 목을 축인 채 영혼 없이 답했다.

“별말씀을. 앨턴은 북부를 위해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보답했을 뿐이야.”

“허허허, 과연 벨라디 님이십니다!”

“자비로우실 땐 자비로우시고, 엄격하실 땐 엄격하시니. 아주 훌륭히 북부를 다스릴 겁니다.”

그들은 웃으며 날 칭찬 감옥에 가뒀다.

“역-시 이 노온 스라코가 선택한 주군이시옵니다!”

그 선두는 당연히 아부에 특화된 스라코 자작이었다.

난 표정을 찡그리지 않도록 애쓰며 와인만 마셔 댔다.

새삼 아버지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버텨라, 벨라디.

연회 초반, 나와 함께 있던 아버지는 진작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일상에 무리가 없어도, 아직은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임시 가주직을 오래 했던 나이기에 모르는 가신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남긴 경고를 조금 흘려들었는데 말이지.

‘아부와 칭찬이 임시 가주일 때보다 훨씬 더 심하잖아.’

그들에게는 몇 마디의 아부겠지만, 내게는 그게 배로 돌아온단 말이다.

아무리 찬양에 익숙한 나라도, 이건 조금 곤욕이었다.

그렇다고 좋은 날 싫은 소리도 할 수 없어, 묵묵히 견디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벨라디!”

“벨라디 축하해! 앗, 이제는 앨턴 공작님인가?”

저편에서 모스틴과 시온이 웃으며 다가온 것이다.

순간 난 밝게 미소 지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왔구나!”

난 가신들에게 인사를 한 후, 서둘러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격한 환영에 둘은 감동받은 눈치였다.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벨라디-.”

난 그런 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구석으로 끌고 갔다.

“움직여. 저 말 많은 노인들한테서 최대한 떨어지자.”

모스틴과 시온도 서부와 남부의 권력자들이다.

가신들은 이 두 사람에게도 연을 만들고 싶었는지 이리같이 눈을 빛냈다.

난 저들에게서 이 두 사람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복화술로 그렇게 중얼거리니, 눈을 깜빡이던 두 사람 중 눈치 빠른 모스틴이 먼저 말뜻을 이해하고는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렇지. 모처럼 사람이 감동했는데 다 꿍꿍이가 있었어.”

“그런 거야? 그래도 벨라디,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어느새 사람들이 좀 덜 모여 있는 곳에 이른 난 기특한 말을 하는 시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연히 나도 너희들이 그리웠지.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마워.”

이건 사심 하나도 없는 내 진심이었다.

“특히 시온은 못 올 줄 알았는데.”

후계자가 그 꼴이 되며, 아글라 공작가와 남부는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시온이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했지만, 그만큼 일분일초의 시간조차 낭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시온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아글라의 후계로서, 앨턴의 새 공작님께 인사를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그 인사는 수도 임명식에서 이미 나눴던 걸로 아는데요?”

“축하는 몇 번을 해 줘도 부족하니까!”

“너도 알잖아, 벨라디.”

모스틴이 불쑥 끼어들었다.

“시온이 이런 행사에 빠지는 거 봤어?”

“흠, 그건 그렇지.”

“덕분에 나도 이렇게 북부에 오고. 그런데 증기 기관차 정말 편하긴 편하더라.”

“그걸 타고 왔어?”

이곳에는 텔레포트 진이 설치되어 있는데, 굳이?

내 의문에 모스틴이 설렁설렁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너희 가문에서 보내는 그 엄청난 물량의 음식과 술을 봤지.”

“맞아! 그거 북부 전역으로 보내는 거라며?”

“이야, 정말 진경이더라. 대량 생산의 시대엔 운송이 필수란 게, 새삼 와닿았다니까.”

그 말에 난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모스틴이 이렇게 감탄할 정도면, 다른 이들 생각은 물을 필요도 없겠군.’

화끈하게 쏠 때조차 난 마당만 쓸지 않거든.

마당을 쓸면, 응당 동전을 주워야지.

“그럼 별다른 변경 없이, 철도 계약을 추가로 진행하겠어요?”

내 말에 모스틴이 잠시 눈을 깜박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쉬었다.

“진짜 못 이기겠다.”

서부와의 철도망 계약은 잠시 스톱 된 상태였다.

내가 내민 철도 사용의 수수료를 모스틴의 아버지인 프레도 공작이 더는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첫 계약보다 비율을 늘리긴 했어.’

그 당시, 내가 파격적으로 수수료 비율을 낮춰 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슬슬 친구 할인은 끝낼 때가 됐잖아?’

그러나 프레도 공작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원래의 수수료가 아니면, 추가 철도는 고민해야겠다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더욱이 모스틴에게 날 잘 꼬셔서 수수료를 더 낮추라는 임무를 준 것 같은데…….

‘모스틴의 혀가 아무리 길어도, 날 이길 수 있을 리가 있겠어?’

대세가 이미 내 편인데 말이야.

오늘 일로 새삼 이를 깨달은 모스틴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으으, 말 한마디 없이 내가 설득당해 버렸네. 아버지도 한 고집 하시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냐!”

“직접 말을 꺼낼 필요 있나?”

“응?”

머리를 부여잡은 모스틴에게 난 속삭였다.

“너도 네가 가진 힘을 이용하면 되지. 내가 알기론 네 소유의 신문사가 꽤나 크던데.”

내가 북부의 미래를 위해 운송에 투자한 것처럼, 모스틴도 서부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주목한 건, 언론이었다.

‘나로 인해 사람과 물자의 빠른 이동이 가능해졌으니까.’

정보의 힘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걸 아는 모스틴은 이 넓은 제국 전역에 힘을 끼치는 대형 신문사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말에 모스틴은 무언가 번뜩 떠올랐는지 활짝 웃었다.

“그래! 시온!”

“으응?”

우리를 구경하며 평온하게 음료수를 마시던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근 남부가 무서울 속도로 철도 계약을 체결하고 있던데. 그렇지?”

“아, 그렇지. 우리 남부도 계속 상황 정리만 할 수는 없으니까.”

“그거 기사 낼 거지?”

“하면 좋지? 근데 남부 신문사들이 다 폐업이 되는 바람에…….”

“그거 나한테 맡겨. 내가 최고로 홍보해 줄게.”

“너한테?”

모스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맙소사! 설마 난 천재인가? 심지어 번뜩이는 헤드라인이 떠올랐어.”

그렇게 중얼거린 모스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철도왕 벨라디 앨턴, 드디어 남부 진출! 서부의 운명은?!”

그 한마디에 연회장 곳곳에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귀족들이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오호라.”

“철도왕?”

“입에 착 달라붙는군.”

현대에서도 익숙하게 사용됐던 별명을 들으며, 난 직감했다.

‘당분간 내 별명은 철도왕이 되겠군.’

……아니, 어쩌면 평생일지도.

새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스틴 저 녀석은 현대에 태어났으면, 섬네일만으로 조회 수 톱을 찍는 콘텐츠를 만들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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