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멜도르, 넌 우리 앨턴가의 직계다. 항상 책임감을 느끼고, 그 위치의 무게를 잊지 말도록.”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네시아, 네 이름 뒤에도 언제나 앨턴이 있음을 기억해라. 유학을 가더라도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해야 한다.”
“네, 공작님!”
‘작별 인사 한번 징그럽게도 오래 하네.’
삐딱한 속과는 다르게 나는 입가의 미소를 유지했다.
멜도르와 네시아에게 각종 격려와 염두의 말을 늘어놓던 아버지는 한참 후에야 내 쪽을 바라봐 주셨다.
“벨라디.”
“예, 아버지.”
아버지와 난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있으니, 16살 무렵이 떠올랐다. 수도 저택을 손에 넣기 위해 아버지를 북부로 내보냈던 그때가 말이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무겁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언제나 믿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날 향한 미안함과 신뢰가 공존하고 있었다.
힐끔 옆을 보니, 멜도르와 네시아도 빛나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셋의 시선을 받으며 난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요, 아버지. 전 이 가문의 첫째인걸요.”
“그래.”
내 말에 그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 예의상 말했다.
“이렇게 빨리 출발하실 줄은 몰랐어요. 제 임명식은 보고 가실 줄 알았는데.”
“네 할아버지가 성화를 내서 말이지. 내가 나약해 다친 거라며.”
아버지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깁스를 한 제 오른팔을 바라봤다.
그나마 약간의 신경이 살아 있는 왼팔 역시 붕대에 칭칭 감겨 축 늘어져 있었다.
“가서 특훈을 받을 것 같군.”
“아버지께 필요한 건 특훈이 아니라 재활이에요. 요양을 하러 가는 거니,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내 말에 멜도르와 네시아가 격하게 동의했다.
이런 둘의 반응에 아버지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난 그런 그를 잠시 응시하다, 조용히 말했다.
“수도 임명식은 못 오시더라도, 북부에서 열릴 계승식에는 참석하셔야 해요.”
수도 임명식은 황제에게 공작의 칭호를 받는 거라 아버지가 없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북부에서 열릴 작위 계승식은 후계자가 전대 공작에게 직접 상징 깃발을 하사받는 자리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꼭 필요했다.
내 말에 그가 다짐하듯 대답했다.
“그래, 그 안에 반드시 두 팔을 움직이도록 하마.”
작별 인사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철문 옆에서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다.”
“예!”
곧 거대한 흑마들이 이끄는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난 검은 점이 되어 가는 마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다음에 만날 때는 지금보다 더. 그다음에는 더. 당신을 용서했으면 좋겠네요.’
마음속으로는 못다 한 인사를 고했다.
조금은 솔직하게.
상대를 원망할수록 힘들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언젠가 내가 아버지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멀어지는 마차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렇게 잠시 서 있는데, 살며시 내 옷자락을 잡는 힘에 고개를 숙였다.
짧은 머리의 네시아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니! 이제 들어가요!”
“그래, 누나. 오늘 가야 할 곳이 있잖아.”
둘의 말에 난 천천히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향했다.
멜도르와 네시아가 어느새 나란히 내 옆을 걷고 있었다.
난 네시아에게 물었다.
“네시아, 유학 준비는 잘되고 있니? 입학이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아는데.”
“네! 킬리언 전하랑 버그만 후작 영애랑 류스펠이 도와줘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넌 정령사로서 이목이 집중되어 있으니, 더욱 행동을 똑바로 해야 해.”
“네, 언니!”
그러자 멜도르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류스펠 프레도, 그 엉큼한 꼬맹이. 네시아 하나 따라가겠다고 정말로 같이 유학을 준비해? 누나, 정말 허락할 거야?”
“…….”
“쳇, 누나 결정에 토 다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좀 마.”
멜도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성큼성큼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네시아는 그런 멜도르를 보며, 곤란한 듯 웃었다.
“아무래도 제가 멜도르 오빠 기분을 좀 풀어 줘야겠어요!”
“마음대로 해.”
“오빠, 같이 가요!”
네시아가 쪼르르 멜도르를 따라갔다.
난 그런 네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새삼 아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언니, 저 유학 가고 싶어요.
-유학이라고?
-네! 제 출생을 알게 되니 정령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알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마갈라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요!
-흠, 마갈라 제국이라…….
-정령에 관한 건 마갈라 제국 아카데미를 따라올 수 없다고, 킬리언 전하께서 그러셨어요! 현재 앨턴과 마갈라 제국의 관계도 우호적이니, 다녀오고 싶어요!
네시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거기서 언니와 공작님을 곤란하게 만든 정령을 반드시 색출할 거예요! 그래서 아주 처절하게 보복할 거야! 허락해 주세요!
네시아의 마지막 다짐이 지극히 앨턴다워 마음에 들었다. 뭐, 그걸 제외하고도…….
유학을 말하는 네시아의 눈은 아주 진중했다.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것처럼.
-좋아.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네시아와 데커딜 제국의 귀족 사회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오히려 네시아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마갈라 제국이라 안심이었지.’
제아무리 콧대 높은 마갈라 제국 귀족이라고 해도, 정령사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할 게 눈에 선했다.
가뜩이나 킬리언이 정령사인 게 드러났으니, 더욱 그럴 것이고.
‘황태자와 케스퍼 아글라가 거울 속으로 사라진 행위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킬리언의 정체를 알려야 했지.’
심지어 타우딘의 예상보다 원혼들의 힘이 너무 강해, 황태자와 케스퍼는 아직도 거울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뭐, 사실은 내가 나서는 게 맞지만…….’
자연 친화력이 빵점인 정령사는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거기다 난 정령보다는 검으로 집중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마침 킬리언이 정령과 계약했음을 밝혀야 할 때가 오기도 해서, 그가 먼저 나서기로 약속된 것이다.
덕분에 여러 가지로 잘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 기세를 네시아가 잇는 것도 괜찮은 흐름이야.’
그런 생각으로 저 아이의 유학을 허락한 것이다.
수도 임명식, 북부 계승식, 네시아의 유학까지.
오늘이 지나면 또 정신없이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꼭 오늘 가 봐야지.’
저택으로 돌아온 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도로시와 스티아의 도움을 받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를 배웅할 때까지만 해도 새벽이었는데, 다시 밖으로 나오니 완전히 밝아 있었다.
봄 햇살과 청명한 하늘. 날이 무척 좋았다.
“벨라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하늘에서 시선을 떼, 앞을 바라봤다.
현관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킬리언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예쁘게 묶인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제가 새벽 시장에서 직접 고른 꽃들이에요.”
그가 내 품에 꽃을 안겨 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피식 웃으며, 킬리언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에게는 이미 목적지를 말했기에,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난 품속의 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았다. 싱그러운 꽃 내음이 느껴졌다.
이런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킬리언이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꽃을 좋아하나요?”
“그냥…….”
난 꽃보다 보석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당신이 사 온 거라 냄새를 맡아 본 것뿐이에요.”
어쩐지 내가 아는 다른 꽃보다 더 향기로워 보여서.
내 말에 킬리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렇게 그가 수줍어하는 사이, 마차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난 잠시 꽃을 안고 있다, 한 손을 뻗어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조금 긴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날 눈치챘는지, 킬리언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내 손가락과 얽혔다.
난 그 온기를 느끼며 그에게 조금 몸을 기울였다.
덕분에 지척에 있는 킬리언을 볼 수 있었고, 그를 보자 심장이 둥둥 뛰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요?”
“……응.”
난 대답을 웅얼거리며 그에게 더욱 몸을 기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긴장감이 나를 덮쳤다. 동시에 편안함까지 느껴졌다. 이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감정을 즐기다 고개를 들자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니, 만져 보고 싶은 붉은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난 그대로 눈꺼풀을 닫고, 거기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촉-.
작은 소리와 함께 말랑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순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입술을 떼고, 바로 내릴 준비를 했다.
옆에서 킬리언이 눈도 뜨지 못한 채,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번만 더 하면 안 될까요?”
“다녀와서요.”
내 대답에 킬리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요? 그럼 두 번 해도 되나요?”
그가 서둘러 물었다. 그 간절한 질문에 난 마차 문을 열며 씨익 웃었다.
“부르트도록 하죠, 뭐.”
그러자 킬리언이 주먹을 꽉 쥐며, 허공에 날렸다.
난 그런 그에게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용기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없는 넓은 평원으로 향하니, 곧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눈에 띄었다. 한달음에 그쪽으로 달려가 멈췄다.
비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도헤미아, 당신은 이제 추운 북부가 아닌 따뜻한 수도에 있어.」
비석 아래에는 잘 관리된 묘지가 있었다.
그 묘지를 가만히 보던 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야 이곳에 왔네요.”
어머니가 묻히신 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그녀의 무덤이었다.
난 한참을 그 무덤과 적혀 있는 문구를 반복해서 읽어 내리다, 마침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바람이 살랑이며, 꽃이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꽃잎을 쓰다듬듯이.
“이제는 꽃을 봐도 마음이 아프지 않아요.”
이렇게 당신을 향한 미움을 희석하다 보면, 언젠가 꽃을 좋아하는 날이 돌아올지도 모르죠.
그러다가 또 언젠가는 당신을 용서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니 편안히 잠드세요.”
사랑했어요, 어머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