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85화 (186/197)

185.

테오도르는 이 순간을 본인의 꿈이라 확신했다.

“테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으니까.

“도헤미아…….”

긴 은발과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뗐으나, 이내 멈추었다.

그녀가 너무나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리고 떠오르는 세 명의 얼굴 때문에.

“……하마터면 벨라디가 크게 다칠 뻔했어.”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경계심 많고 꼼꼼한 아이인데, 마지막에 방심했던 모양이야.”

“…….”

“그래도 내가 막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도헤미아는 대답이 없었다.

테오도르는 그런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황태자가 던졌던 그 팔찌는 필시 평범한 폭탄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력 감지 마법에 걸리지도 않았고, 일반 폭탄에 반응해야 할 보호막도 펼쳐지지 않았으니.

‘정령과 관련돼서 그런가…….’

그럼 더더욱 벨라디를 주시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덕분에 이번에야말로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나아. 벨라디 그 아이는 내가 없어도 뭐든 잘할 거야. 오히려 날 보지 않는 게…… 그 아이를 위한 것 같기도 해. 멜도르도 중심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엇나가지 않을 테고.”

“…….”

“네시아……. 네시아에게는 미안하기만 해. 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도헤미아의 입이 열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돌아가요.”

“……뭐?”

“당신이 정말로 미안해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네시아란 아이가 아니야. 당신 친딸이라는 거 절대 잊지 말아요.”

도헤미아의 눈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테오, 상처는 꼭 몸에만 생기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벨라디를 구했다고 혼자 뿌듯해하지 말고, 그 아이의 마음이 치유될 때까지 가서 빌고 또 빌어요.”

“도헤미아…….”

“더는 도망치지 말고……. 당신은 나 같은 무책임한 부모가 되지 말아요, 테오도르.”

“하지만 난…….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테오도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떨어져 있던 도헤미아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오도르는 본능적으로 제 아내를 껴안기 위해 두 팔을 벌렸으나,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지척에서 본 도헤미아의 표정은 아주 험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이제는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 머저리야!”

도헤미아는 그 말과 함께 테오도르의 뺨을 내려쳤다.

짜악-!

그 아찔한 통증을 마지막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익숙한 천장이 먼저 보였다.

‘여긴…….’

“아버지! 정신이 좀 드세요?!”

“으에에엥! 공작님!”

멜도르의 외침과 네시아의 울음소리도 같이 들렸다.

테오도르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내 방…….’

수도 저택 본인의 방이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따뜻한 햇살이 부드러운 커튼을 거쳐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폭발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테오도르는 팔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키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아주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힘이 들어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아래로 내리니, 본인의 두 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채였다.

“어서 주치의와 누나를 불러! 빨리! 아버지, 다시 정신 놓으시면 안 돼요! 아셨죠?!”

“공작님, 죽지 마세요!”

“둘 다 시끄러우니까 밖에 나가 있어.”

때마침 벨라디가 주치의와 그 조수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똑같은 채도의 붉은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벨라디…….’

제 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멜도르와 네시아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주치의에게 눈짓해, 테오도르의 몸을 점검하게 했다.

테오도르는 연신 그런 벨라디의 얼굴을 관찰했다.

분명 벨라디는 저를 싫어할 테니, 제가 사라지면 아무렇지 않아 할 줄 알았는데…….

‘안색이 좋지 않아.’

때마침 검사를 끝낸 주치의가 벨라디에게 다가가 뭐라 속삭였다.

평소라면 저 정도 속삭임은 다 들렸을 텐데. 감각이 둔해져서 그런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벨라디와 이야기하던 주치의가 테오도르에게 고개를 숙인 후, 조수들과 함께 물러났다.

테오도르의 방엔 어느새 둘만 남게 됐다.

벨라디는 자신과 일정 거리를 벌려 놓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한 달 만에 눈을 뜨셨네요.”

“…….”

“예상하셨겠지만, 그 폭탄은 정령의 보물 중 하나였어요. 착용자의 분노만큼 폭발의 범위와 세기가 강해지는 무기죠.”

“…….”

“그나마 황태자의 분노가 오로지 저를 향했기에 범위가 무척 한정적이었어요. 다른 피해자는 따로 없고요.”

“…….”

“아, 이제 황태자도 아닌가. 폐위됐으니.”

벨라디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걸 본 순간, 테오도르의 심장이 욱신거리며 조여 왔다.

어렸던 벨라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 저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여겨 줬던 때.

반응이 없는 테오도르에게 미주알고주알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그 시절.

‘그때도 항상 이야기의 끝을 저런 중얼거림으로 맺었었지.’

어린 벨라디와 지금의 벨라디가 그의 눈앞에서 교차됐다.

그 아이의 종알거림이 귓가에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그의 두 눈을 덮었다.

살면서 느꼈던 감정 중 가장 아리고 강렬했다.

“한 달 동안 법은 무사히 바뀌었어요. 이제 소공작의 자리는 제 것이 됐고……. 지금 우는 건가요?”

벨라디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그제야 제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눈물임을 인지했다.

벨라디가 황당하단 얼굴로 저를 바라봤다.

테오도르는 두 눈으로 그런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제는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 머저리야!

그리고 도헤미아가 왜 그렇게 소리쳤는지 알 것 같았다.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벨라디에게 아무런 말도, 용서도 빌 수 없으니까.

“미안하다, 벨라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목에서는 쇳소리만 나왔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멈추지 않고 속삭였다.

“네 마음을 무시해서 미안하다, 네게 눈 돌리고 있어서 미안해.”

“…….”

“네시아를 통해서 어린 널 외면했다는 죄책감을 덜고 싶었어. 그래선 안 됐는데……. 상처 입었던 너에게 먼저 용서를 구했어야 했는데…….”

벨라디가 가만히 저를 응시했다.

테오도르는 그런 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도헤미아도 나도 부모로서 자격이 없어. 이런 우리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지……. 이제야 깨달아서 정말 미안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잘 자라 줘서……. 고마워.”

순간, 벨라디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저 무딘 사람이 저기까지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했고, 반성을 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혼수상태일 때, 어머니가 등장해서 정신 좀 차리라고 뺨을 내리쳤나?’

이런 우스운 상상을 할 정도로, 아버지는 진심을 담아 후회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본인 상태를 정확히 알고서도 저런 반응이 나올까?’

난 복잡함과 회의감이 똘똘 뭉친 눈길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럼 공작 위의 자리를 지금 당장 저에게 주실래요?”

내 말에 아버지의 두 눈이 커졌다. 난 태평하게 뒤의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더 이상 집무를 보기 힘드세요. 상처의 후유증으로 두 팔을 쓰실 수 없거든요. 반복적인 훈련을 거치면 일상생활은 가능하겠지만, 검은 이제 무리예요.”

“아…….”

“검을 쓰지 못하는 앨턴 공작은 이제껏 없었어요. 그러니 지금 저에게 가문을 승계하는 게 좋은 그림이 나올 거예요. 어차피 한 달 동안 제가 아버지 대리로 일을 처리하기도 했고.”

그렇게 말한 난 일부러 그를 비웃었다.

“그러길래 왜 쓸데없이 절 구하겠다고 나서서. 지금 와서 후회하셔도 너무 늦었어요.”

“후회하지 않아.”

아버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저절로 사라졌다.

“절대 후회하지 않아. 내 팔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널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찝찝하게 절 위한답시고 안 하던 짓 하지 마세요.”

난 천천히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원했던 대답은 저런 게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기셨는지 모르겠네요. 죽기 직전이 되니까 뭔가 깨달음이라도 온 건가요?”

“……정말 다행이지.”

내 비꼼에 아버지가 동문서답으로 말했다.

“죽기 전에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야. 널 다시 보고,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그만하세요.”

난 아버지의 말을 잘라 냈다.

“확실하게 말할게요. 우선…… 절 구해 주신 건 감사해요.”

“부모로서 반드시 해야 했을 일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당신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크고, 아버지를 신뢰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 저와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래, 나도 단번에 네가 날 용서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난 그걸 존중하고 기다릴 뿐이야.”

“기다리지 말라니까요.”

“그것만큼은 허락해 다오.”

“…….”

“네 마음에 응어리진 슬픔과 상처가 다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너에게 사과하고, 반성하고 싶다. 이게 아버지로서……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역할이니까.”

그렇게 속삭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너무 애틋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난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그와 눈을 마주했다.

“제 방심 때문에 평생 연마하셨던 검을 다신 못 쓰게 되셨어요. 제가 밉지도 않으세요?”

“내가 너에게 한 잘못에 비하면, 이건 상처도 못 되지.”

아버지가 말갛게 웃었다.

“오히려 널 지켰다는 훈장 같고, 좋구나.”

난 그의 그런 해맑은 웃음을 처음 봤다.

어머니와 있을 때도, 네시아와 있을 때도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난 그만 등을 돌렸다.

“쉬세요.”

“벨라디.”

아버지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고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런 나에게 그가 속삭였다.

“넌 우리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녀야. 앨턴을 잘 부탁한다.”

그토록 갈망했던 아버지의 인정이었다.

난 목이 메는 걸 느끼며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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