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84화 (185/197)

184.

-후우, 후우! 벨라디를 위해 아이닝 힘냈어! 벨라디 기뻐? 아이닝 잘했어?!

-그럼, 아주 완벽해. 아이닝.

-꺄하항! 벨라디의 칭찬! 기분 좋아!

환하게 웃는 귀여운 사막여우를 떠올리며 난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이 빈자리에 아이닝의 구슬을 넣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모든 것이 설계된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마치, 나보고 목숨을 경시하는 황태자와 케스퍼를 흠씬 두들겨 패고 천벌을 내리라는 듯!

부웅-!

치유의 구슬을 장착한 정령검은 휘두를 때마다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어느새 검신에는 성스러운 빛이 둘러져 있었다.

‘오호라, 이렇게 시각적인 효과까지 더해지다니.’

전투다운 전투는 아니었지만,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움직이니 몸이 고양됐다.

난 눈을 번뜩이며 더욱 빠르게 시체들을 처리했다.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벨라디를 엄호하고, 시체의 옷가지를 수습해라! 한꺼번에 불태워 영혼을 달래 줄 것이다!”

“예!”

뒤에서 기사단들도 호흡을 맞춰 현장을 수습했다.

그 모습에 멘탈이 완전히 나가 버린 황태자는 연신 악을 쓰다가 기어코 본인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 들었다.

그러곤 내게 달려왔다.

“으아아아아! 죽어라-!”

‘어떻게 매번 최악의 수를 선택하는 건지…….’

저것도 재주다, 재주.

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칼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그러며 흘깃, 내 근처를 서성이는 암청색 눈을 가진 기사를 바라봤다.

내 첫 번째 최측근, 제플린이었다.

‘잘 나오고 있겠지?’

‘당연합니다, 벨라디 님.’

마음으로 대화한 우리는 다시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난 일부러 눈에 띄는 검법을 구사하며 시체를 처리했다. 그러며 동시에 내게 달려오는 황태자와 검을 맞부딪쳤다.

카앙-!

“끄아아아악!”

황태자는 나와 검을 맞대자마자 힘의 격차를 이기지 못하고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휴, 하마터면 목까지 두 동강 낼 뻔했네.’

놈의 목덜미 앞에서 검을 치우지 않았으면, 끝이 허무해질 뻔했다.

내 정교한 힘 조절 덕분에 본인 목숨을 건진 것도 모르고 황태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까짓 게! 테오도르 앨턴의 뒤를 이어 제국 최고의 검이 될 것 같으냐! 고작 여자 주제에! 태어날 때부터 나한테 농락당한 주제에!”

난 발을 들어 무가치한 말만 늘어놓는 놈의 얼굴을 퍽 내리쳤다.

“크헉!”

“죄인 주제에 혀가 길어.”

“내, 내 얼굴! 내 얼굴이!”

황태자는 내 발길질 하나에 버둥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난 놈을 완전히 기절시키는 대신, 밀려오는 시체들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화려하게 움직일수록 성스럽게 빛나는 정령검이 더욱 부각됐고, 그럴 때마다 뒤에 있던 제플린이 엄지를 척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저건……?’

임시 거처의 옆에서 텔레포트 진이 생기더니 케스퍼 아글라가 나왔다.

헤죽거리며 웃던 그는 현 상황을 목격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곤 빠르게 눈을 굴리다 후다닥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난 마지막 시체를 처리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내 활약으로 어지간한 숫자는 단번에 정리된 뒤라, 이후는 기사단에게 맡기면 충분할 듯싶었다.

“제플린, 가자!”

“예, 벨라디 님!”

난 제플린을 데리고 신속하게 임시 거처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온갖 잡동사니가 잔뜩 들어 있는 상자에 물방울 모양의 거울을 올려놓은 케스퍼 아글라와 눈이 마주쳤다.

시온과 똑같은 금안이 미치광이처럼 풀려 있었다.

“두고 보자, 벨라디 앨턴. 다음 생에선 네년의 삶을 철저히 뭉개 버릴 테니까!”

케스퍼가 거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제야 난 그 아래에 있는 잡동사니들이 정령의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황제의 개인 보물 창고를 털지도 못했으면서, 저렇게 많은 건 어디서 찾은 거래.’

아마 시온이 준 현금을 이용한 거려나?

케스퍼가 빠르게 뭔가를 중얼거리자, 아래에 있던 보물들이 녹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제플린이 속삭였다.

“막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

난 가볍게 대꾸하며, 제플린을 응시했다.

“영상구의 송출은 잘되고 있는 거겠지?”

“예.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플린은 본인 손에 들린 루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고로, 지금 그가 들고 있는 루비는 수도 중앙 궁의 영상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황제가 한자리에 소집한 귀족들은 꼼짝없이 지금 이 순간을 관람하고 있겠지.

‘내가 직접 고른 가장 큰 화면으로 말이야.’

황제에게 군대를 받는 대신, 내가 내민 조건.

그게 바로 황태자와 케스퍼 아글라의 체포 장면을 실시간으로 송출하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이런 업적까지 세웠는데, 감히 내 가주 승계를 반대하는 놈이 있다면…….’

“저 꼴이 난다는 경고지.”

내 혼잣말이 끝나자마자 정령의 보물들이 완전히 녹았다.

그러자 거울이 찬란하게 빛나며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케스퍼는 그걸 보며 힘차게 외쳤다.

“자, 내게 새로운 기회를!”

안타깝게도 그의 희망찬 외침은 단말마의 비명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컥-!”

내 옆에서 루비로 이 장면을 촬영 중이던 제플린의 손도 파르르 떨렸다.

그가 드물게 눈을 크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건 도대체…….”

난 케스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커억, 컥!”

바로, 거울에서 빠져나온 커다란 손에 얼굴과 목을 한꺼번에 붙잡혔기 때문에.

그 손이 케스퍼를 장난감처럼 번쩍 들어 올렸다.

발에 닿는 것이 없어지자, 케스퍼가 본능적으로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거울 속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크으윽! 크억!”

숨이 막히는지 놈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만 나왔다.

난 그걸 무시하며, 거울 속 손을 자세히 바라봤다.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손이 서로 합쳐져, 하나처럼 보이는 것뿐.

그 불길한 모양새에 제플린이 두려움을 느꼈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난 착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 천벌이니까.”

“천벌…… 말입니까?”

곧 거울이 웅웅 울렸고, 불길한 손이 훅, 놈을 거울 속으로 끌고 갔다.

“아, 아악!”

거친 비명과 함께 케스퍼 아글라가 사라졌다.

그 후, 정적.

제플린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끝난 걸까요?”

“아니.”

내 대답에 응하기 위해서인지, 케스퍼 아글라를 삼킨 거울 속에서 꾸물꾸물 다시 한번 그 불길한 손이 나왔다.

손은 천천히, 기괴하게 비틀린 채로 천막 안을 뒤적였다.

그대로 내 쪽으로 다가왔을 때, 난 단호하게 말했다.

“남은 한 놈은 밖에 있어.”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손이 멈칫하더니 이내 쫘악 늘어났다.

그 때문에 생긴 풍량으로 엉성했던 임시 거처의 천막이 망가졌다.

확 트인 시야에서 늘어난 손이 향한 건, 어느새 아버지에게 붙잡혀 있던 황태자였다.

“저게 뭐야!”

“새로운 적인가!”

기사들이 전투 태세를 갖췄지만, 손은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황태자의 목을 낚아챘다.

“커헉!”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놈을 이쪽으로 끌고 왔다.

“으아아아악!”

실로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그걸 끝까지 지켜보는데, 타우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걸로 이 몸의 힘은 다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이 몸의 수고를 알긴 아는군! 인간 마법사에게도 인사를 전해야 한다!]

[알고 있어.]

[그나저나 걱정이다. 이 몸, 손을 유지하느라 널 지킬 힘이 없어.]

[난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어.]

타우딘은 정말로 힘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계획했지만, 시각적으로 너무 기괴하네.’

그래, 내가 케스퍼 아글라를 위해 준비한 함정이 바로 이거였다.

이미 회귀가 사라진 줄 모르는 케스퍼 아글라가 거울을 포기할 리 없으니까.

‘그래서 저 거울을 이용해 만들어 봤지.’

망자를 소환할 줄 아는 타우딘과, 금지된 마법까지 통달한 마탑주의 도움을 받은 가장 무섭고 슬픈 함정을.

두 놈에게 이제껏 희생당한 원혼의 일부를 실체화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공격할까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기사 몇이 물었다. 아버지도 내 뒤에서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차례가 아니니, 내버려 둬.”

어차피 저 원혼들도 영원하지는 않다. 시간이 지나면 거울에 들어갔던 두 놈은 곧 현실로 돌아오겠지.

그 시간 동안 최악의 지옥을 경험하겠지만.

“아, 안 돼! 끄으윽!”

본인의 미래가 보이는지, 황태자는 어떻게든 거울 안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땅바닥을 부여잡았다.

놈의 손에 빠르게 생채기가 생겼으나, 저 상처 따위는 원혼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황태자까지 거울에 들어가면, 저것만 들고 수도로 복귀해야겠어.’

난 무감각한 얼굴로 다음 일을 생각했다.

이제 저 거울을 킬리언에게 맡기면, 킬리언 쪽이 알아서 일을 처리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내 활약상과 경고는 제플린이 모조리 기록해 주고 있으니, 문제없고.

‘곧 열릴 대 가주 회의에서 여자도 가문을 승계할 수 있다는 법안을 올리면.’

그럼 드디어…….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황태자의 몸이 거울에 들어가기 직전이 됐다.

찰나 동안 눈이 마주쳤고, 놈의 손에는 어느새 낡은 팔찌가 들려 있었다.

황태자는 마지막 발악 대신, 그 팔찌를 이쪽으로 던졌다.

‘뭐야.’

황태자를 우습게 보던 내가 그대로 팔찌를 낚아채려던 순간.

“벨라디!”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아채, 뒤로 확 밀쳤다.

그리고 들려오는 거대한 폭발음.

콰아아아앙-!

임시 거처에서 우리가 던졌던 소형 폭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소리였다.

“공작님!”

“테오도르 님!”

기사들의 울부짖음이 귓가에 왱왱 울리는 것 같았다.

모든 장면이 너무 느리게, 혹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매캐한 연기와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검은 인영…….

폭발로 거의 다 타 버린 망토가 초라하게 팔락였다.

“아버지…….”

나 대신 온몸으로 폭탄을 맞은 아버지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

나도 모르게 몸을 뻗어, 쓰러지는 아버지를 받아 냈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피와 먼지가 뒤엉켜 엉망이었다. 특히 두 팔은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 팔찌, 그깟 낡은 팔찌가 뭐라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폭탄이었으면, 아버지에게 닿기도 전에 마법 보호막이 발동했을 텐데.

도대체 왜 그가 이 여파를 온몸으로 맞은 거지?

어째서?

난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쿵쿵쿵-.

심장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한 난 혼란스러워하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전부 모여! 저택으로 복귀한다! 제플린, 거울을 챙겨!”

“예, 벨라디 님!”

난 아버지를 단단히 안고, 킬리언의 마법 다이아몬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벨라디, 몇몇 장난을 좋아하는 정령들은 사람의 위기감을 없애 버린다. 그러니 항상 조심해야 해.

문득, 얼어붙은 이성 위로 타우딘의 경고가 스쳐 갔다.

누군가 꼭 날 비웃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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