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설마설마 또 한 번 회귀를 일으키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만큼 이번 생은 퍼델과 케스퍼에게 완벽한 삶이었다.
하지만 일이 갑작스럽게 돌아가게 되면서 케스퍼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했다. 재물의 수량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뛰어다녔던가.
‘내 재산은 유동적이지 않아서 보물을 발견해도 구매하지 못했었는데, 시기가 좋았어.’
시온이 끝내 벨라디에게 넘어간 건 아주 괘씸했으나, 자신에게 현금을 넘긴 것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 회귀 후에도 어느 정도는 동생으로 인정을 해 줘야겠지.
‘대신 아주 철저하게 내 꼭두각시로 교육해 주마.’
케스퍼가 음험한 생각을 가질 때, 퍼델이 쓰윽 손을 뻗었다.
그의 눈에 띈 건, 보물 중에서도 유달리 낡은 팔찌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퍼델은 어쩐지 이 팔찌가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생각했다. 그래서 본인도 모르게 그걸 휙 낚아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케스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그건 왜,”
“저리 꺼져!”
케스퍼의 말에 퍼델이 버럭 화를 냈다.
그 모욕적인 언사에 케스퍼는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티 내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저 포악한 새끼가 변덕스러운 게 한두 번인가.’
모아 둔 정령의 보물은 넉넉하니, 저깟 팔찌 하나 없어도 회귀는 충분히 일으킬 수 있었다.
케스퍼는 답답한 임시 거처에서 나와 마물의 숲 주변을 서성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지금은 정령의 보물로 퍼델의 시선을 돌렸지만, 거울을 보여 달라고 하면 끝장인데.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던 케스퍼가 다시 한번 비밀 집무실의 입구를 연 순간이었다.
계속 실패했던 수식 연결에 성공하며,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됐다.
눈앞에 익숙한 집무실 입구가 나타나자, 케스퍼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그 안으로 들어갔다.
“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케스퍼는 뭐에 홀린 듯 연구실로 직진했다.
안타깝게도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연구실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모든 것이 검은 재로 변한 상태였다.
케스퍼는 누군가 휘두른 망치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띵해졌다.
‘도대체 누가!’
회귀 후 지금까지, 수많은 업적을 이룩해 온 자신의 연구실을 누가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것인가!
결과물도! 실험체들도!
모조리 사라진 그곳에서 케스퍼는 겨우 목적을 떠올렸다.
‘거울!’
그것마저 재가 되면 이 삶에 가망은 없었다. 연구 결과들이 미치도록 아까웠지만, 그것들은 회귀만 하면 다시 돌이킬 수 있었다.
‘거울만큼은 무사해야 해!’
케스퍼가 서둘러 연구실 제일 지하에 있는 금고로 달려갔다.
긴장감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리고 마침내 금고 앞에 도착했을 때…….
“하하하하하하!”
케스퍼는 무릎을 꿇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모든 게 검게 그을린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재로 변하지 않은 천 뭉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케스퍼는 정신없이 봉인 수식이 걸린 천을 풀어 헤쳤다.
안에 든 물방울 모양의 거울은 온전했다.
“그래! 하늘은 아직 내 편이구나!”
그동안 이 거울이 없어, 몇 번이고 지옥과 천당을 오갔는지!
케스퍼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입이 찢어져라 미소 지었다.
“두고 보자, 벨라디 앨턴……!”
이번 회귀에서는 네년의 존재 자체를 지워 줄 테니! 아니, 아예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짓밟는 것도 나쁘지 않지!
헛된 꿈을 꾸며 실실 웃던 케스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빨리 돌아가자.’
회귀를 진행하려면, 임시 거처에 있는 정령의 보물을 바쳐야 하니까.
‘그래도 이제 됐어. 전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케스퍼는 지극한 안도감에 취하며 출구를 열었다.
참고로,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
혹시 몰라, 황태자비가 말한 정보의 진실 여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녀가 읊은 위치에 선발대를 미리 보내니, 수풀에 가려진 천막이 있다는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보고를 들은 즉시, 난 황제와 독대했다.
-앨턴 공작이 널 위해 판을 다 깔아 놓았음을 들었느냐.
황제의 첫마디에 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건은 사전에 나와 이야기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마차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겠지.’
처음에는 좀 놀랐으나, 내게 나쁜 흐름은 아니었기에 기꺼이 이용해 주기로 했다.
-예, 이미 둘의 위치는 확보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죄인을 체포하겠습니다.
-네가 직접 말이냐? 병사를 보내지 않고?
-법이 바뀌는 것에 반대할 위인들이 많으니까요. 이 정도 구색은 맞춰 줄 수 있습니다.
-후후후, 재밌구나.
황제는 내게 기꺼이 황실의 군대를 내주려 했다. 그러나 난 그걸 거절하며, 대신 다른 조건을 말했다.
내 조건을 들은 황제는 한참 고민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일은 일사천리였다.
난 킬리언에게 황태자비의 빠르고 고통 없는 처형을 부탁하며, 텔레포트를 이용해 마물의 숲에 도착했다.
황태자비가 말한 위치값 근방으로 향했기에, 곧바로 시야 너머에 엉성하게 설치된 천막이 보였다.
아, 참고로 나와 같이 마물의 숲으로 향한 건 앨턴가의 1기사단과…….
“수색대는 목표 지점을 살펴라. 그 외에는 모두 기척을 죽이고.”
“예, 공작님.”
기사들에게 묵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아버지였다.
난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사실 나 혼자 오고 싶었는데.’
최근에는 계속 내 말을 들어주는 아버지였는데, 이번만큼은 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래도 이게 다 킬리언의 쓸데없는 조언 때문인 듯싶었다.
‘아버지에게 괜한 말을 해서는.’
사실, 정령의 분노에 대한 경고는 타우딘도 종종 했었다.
정령들이 내게 말도 안 되는 앙심을 품었다는 것도. 그래서 나와 계약한 타우딘을 묘하게 따돌린다는 것도.
-벨라디, 몇몇 장난을 좋아하는 정령들은 사람의 위기감을 없애 버린다. 그러니 항상 조심해야 해.
그러나 타우딘에게 경계를 부탁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내겐 정령의 분노에 대비하는 것보다도, 눈앞의 황태자를 처리하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지간한 보호구보다 타우딘이 더 든든하니까.’
마침 타우딘이 떠오른 김에, 속으로 말을 걸었다.
[타우딘, 내 말 들려?]
그러자 곧바로 우렁찬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 몸은 지금 매우 바쁘다! 무슨 일이냐! 적이 나타난 거냐?!]
[그건 아니고, 이 근방에 대량의 시체가 매장돼 있을 거야. 찾을 수 있겠어?]
[흥! 찾고 말 것도 없다. 네가 서 있는 곳 바로 아래에 묻혀 있으니까!]
오, 그렇단 말이지?
타우딘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마물의 부산물로 절여진 그 시체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 찝찝한 것들을 당장 치우지 않으면, 이 몸이 직접 없애 버리겠어!]
그 말에 난 씨익 미소 지었다.
“그건 안 되지.”
내 중얼거림에 아버지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때였다.
“공작님. 목표 지점에서 마력의 흔들림이 느껴집니다.”
“케스퍼 아글라의 행방도 보이지 않습니다.”
미리 보내 놨던 수색대가 돌아왔다.
그들의 보고를 듣는 순간, 아버지와 내 시선이 교차됐다.
동시에 시온이 해 준 말도 떠올랐다.
-벨라디 네 말대로 거울은 원래 있던 곳에 뒀어. 아버지가 임의로 닫아 놓았던 비밀 집무실의 입구도 네가 정해 준 시간에 열 거고.
‘아글라 공작이 약속을 잘 이행했네.’
케스퍼 아글라가 사라졌을 때야말로 우리가 움직일 시간이었다.
나와 눈빛으로 대화를 끝낸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폭탄을 던져라.”
그 말에 기사 한 명이 재빠르게 품속에 있던 소형 폭탄을 임시 거처에 던졌다.
그러자 임시 거처에 설치된 엉성한 보호막과 부딪힌 폭탄이 터져 버렸다.
쾅-!
“누구냐!”
폭발음과 함께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자식도 황태자비처럼 지하 감옥에서 험한 꼴을 당했는지, 몰골이 매우 초췌했다.
황태자와 내 시선이 딱 마주쳤고, 난 그런 놈을 마음껏 비웃어 줬다.
그러자 놈이 이를 아드득 갈며 소리쳤다.
“벨라디 앨턴-!”
그 노성에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도 기운이 넘치네? 지하 감옥이 체질이었나 봐?”
“으아아아악! 다시 시작하더라도 넌 죽이고 갈 테다!”
황태자가 이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물론 힘이 약해, 근처에 닿기도 전에 떨어져 버렸지만.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안에 든 짙은 보라색 액체가 땅에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황태자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크하하하! 넌 이제 내 병사들에게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땅 밑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를 시작으로 수백 구의 시체들이 빠른 속도로 땅 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역겨운 모습에 저절로 인상이 찡그러졌다.
‘저놈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군.’
“네년과 그 잘난 앨턴은 이전에도 세뇌된 내 병사들을 이기지 못했지! 이번엔 그때보다 훨씬 강화된 약을 썼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내 병사들이 너를!”
“종알종알, 말도 많아.”
확실히 이전에는 저 수에 보기 좋게 말려들었지.
‘하지만 이 내가, 같은 수법에 또 당할 것 같아?’
“준비는 다 끝냈겠지?”
“예, 벨라디 님!”
기사의 대답을 들으며, 난 챙겨 온 정령검을 들었다. 그리곤 검 손잡이를 꽉 잡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저 먼저 갑니다.”
아버지를 보지도 않고 그리 말하며, 달려오는 시체 군단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부-웅!
쿠어어어어어!
시체를 벨 필요도 없었다.
내 검에 닿는 순간,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칼로 풍선을 배는 기분?
내가 막힘없이 그것들을 처리하자, 황태자의 악쓰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뭐, 뭐야! 어, 어떻게 저것들이 저렇게 쉽게 사라지는 거야! 일전의 실험에서는 아무리 베어도 다시 일어났는데! 평범한 육신보다 훨씬 질기고 튼튼했단 말이다!”
난 그 경악을 노동요로 삼으며, 쾌속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야, 마물의 부산물과 천적인 정령이 내 편이니까 그렇지.’
검을 움직일 때마다, 검신 아래에 떡하니 장식된 오묘한 색감의 붉은 돌이 반짝였다.
그걸 보니 마물의 숲으로 가기 전, 아이닝에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아이닝, 내 검 좀 봐. 타우딘에게 마법 루비를 넘기고 아직도 어울리는 장식을 찾지 못해서 이 상태야.
-아앗! 그럼 빨리 멋진 장식을 찾아야겠다!
-여기를 아이닝 네가 채워 줄래?
-아이닝이? 어떻게에?
-네 치유 구슬을 빈자리에 넣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만들면 되지. 그럼 곧 있을 전투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엇? 하지만 그렇게 크게는 만들어 본 적 없는데?
-할 수 있지, 아이닝?
-우, 우움…….
-할 수 있지?
당연히 아이닝은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