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올 게 왔구나.’
사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킬리언은 동요를 재빠르게 감추고는 테오도르에게 미소 지었다.
“그럼 제 응접실로 가시지요.”
“전하와 느긋하게 차 한잔 나눌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오도르의 눈빛이 꽤나 형형했다.
“따라오십시오.”
그는 킬리언을 노려본 후, 먼저 걸음을 뗐다.
벨라디와 쏙 닮은 얼굴로 저리 바라보니, 킬리언의 다리가 속수무책으로 후들거렸다.
킬리언은 애써 속을 진정시키며, 테오도르를 따라갔다.
테오도르가 향한 곳은 회의실 근처에 있는 인적 드문 복도였다.
거기서 품속의 루비를 이용해 견고한 소리 차단 마법을 펼친 테오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 제 딸아이와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킬리언은 일단 발뺌했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붉은 눈이 활활 불을 내뿜으며 킬리언을 응시했다.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사실 테오도르는 어젯밤, ‘네시아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하녀들의 보고를 듣고, 모든 업무를 끝낸 후 2층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상황을 마주하고 말았다.
“네시아의 방에 그때 보았던 여우를 닮은 정령 외의 이질적인 존재들이 더 있더군요. 특히 죽은 제 아내를 닮은 그 존재는……. 아주 자세히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그 말에 킬리언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다 들켰구나.’
사실 죽은 도헤미아의 영혼을 소환하기 전, 킬리언은 정신없어하는 벨라디 대신 조용히 자연 친화력을 움직였다.
혹여 이 소동을 사람들에게 들킬까, 2층에 방문하려는 이들의 인지를 방해해 의도적으로 접근을 막은 것이다.
이 방법은 마법과는 결이 달라 한층 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감각이 초월적으로 발달한 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었다.
‘그래서 앨턴 공작에게는 소용없을 거라 예상했었지.’
이걸 벨라디에게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결국, 킬리언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뜩이나 피곤한 그녀에게 생각할 거리를 더 안겨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리질 않나 몰라.’
“직접 보셨다니, 어쩔 수 없군요.”
킬리언은 솔직히 인정했다.
“우선 공작께서 보신 건, 작고하신 공작 부인이 맞습니다. 정령의 힘으로 그분의 영혼을 잠시 소환한 것이죠.”
“하, 이미 죽은 사람을 소환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정령의 마법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기적’과 다름없습니다. 죽은 영혼을 소환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럼 왜 제 아내를 소환한 겁니까?”
“벨라디와 그분의 대화를 듣지 않으신 건가요?”
킬리언의 되물음에 테오도르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그도 벨라디와 도헤미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추 들었기 때문이다.
듣기만 해도 감정이 뚝뚝 묻어 있는 딸의 원망과 오열하며 사과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차마 그 순간을 방해할 수 없어,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제자리만 맴돌다 자리를 피했었다.
-난 당신이 미워요. 그 어떤 사연이 있었다고 해도, 내 어린 시절을……. 내 세상을 망가트린 당신이 너무 싫고, 용서할 수 없어!
벨라디의 울부짖음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건 비단 도헤미아에게만 향하던 외침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 아이와 같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테오도르는 죄책감과 미안함, 안타까움으로 속이 타들어 갔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함부로 표현했다가 벨라디가 더 괴로워할 것 같아 선뜻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나처럼 부모 자격도 없는 아비를 만나서…….’
그 착한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테오도르는 착잡함을 숨기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킬리언은 가만히 그런 그를 보며,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벨라디를 잘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사실 이건 확실하지 않으나……. 정령들의 분노가 벨라디에게 향해 있습니다.”
킬리언은 오늘 새벽에 들었던 아이닝의 염려를 떠올렸다.
-요즘 다른 정령들이 너무 조용해! 며칠 전만 해도 벨라디가 너무 많은 걸 알았다면서 다들 화를 냈는데!
-그럼 어떻게 되는데?
-우웅…….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한번 혼쭐을 내 주자고 작당 모의를 하는 것 같았어!
아이닝의 말에 따르면, 다른 정령들이 더 이상 아이닝, 셰넌, 타우딘에게는 소식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들은 이제 벨라디의 편인 걸 다 알고 있으니까.
‘혼쭐을 내 준다고.’
누구보다 정령에 대해 많이 연구한 킬리언이지만, 그들의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회귀로 시간선을 엉망으로 만든 건 퍼델 앨러만 데커딜과 케스퍼 아글라 아닌가.
‘그런데 왜 선량하고 정의로운 벨라디만 괴롭히는 건지.’
이런 킬리언의 속을 모를 테오도르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되물었다.
“정령의 분노?”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벨라디에게 직접 들으셔야 할 거예요. 다만…… 정령들이 벨라디에게 못된 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벨라디에게도 따로 말할 거지만, 공작께서 잘 살펴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 애매모호한 말에 테오드르는 순간, 사냥 대회 때의 암담함이 떠올랐다.
벨라디의 행방이 묘연했던 그 몇 시간 동안의 참담했던 심정과 다짐이.
“뭐라 하지 않으셔도, 그 아이는 제 목숨을 걸고 지킬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킬리언은 진심으로 안심하는 듯 보였다.
테오도르는 어쩐지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더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왜 정령의 힘을 이용해 제 아내를 소환한 겁니까. 그리고 왜 벨라디와 만나게 한 건지 목적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 역시 제가 말씀드리기 애매합니다. 안타깝지만, 벨라디에게 직접 들으셔야 할 듯싶어요.”
“이것도 벨라디를 통해 들어라?”
그 말에 킬리언은 싱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반응에 테오도르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제 딸아이 뒤에 숨어 가겠다는 거군요.”
“제겐 그 무엇보다 벨라디의 의견이 중요해서요.”
“변명을 청산유수로 잘하십니다.”
“그렇게 느끼신다면, 제 진심이 전해져서 그럴 겁니다.”
테오도르가 쯧 혀를 찼다.
“이것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그 일이……. 도헤미아를 만난 게, 벨라디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그 물음만큼은 킬리언도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벨라디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그 아이가 본인을 위해 내린 판단이면, 그걸로 되었다.
애초에 자신은 벨라디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물어볼 자격조차 없는 아비 아닌가.
테오도르는 킬리언에게 간단히 인사한 후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나저나 정령이라…….’
그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주 거슬렸다.
***
“으아아아아악!”
퍼델이 임시 거처의 모든 물건을 마구잡이로 부쉈다.
“감히! 감히 이 제국의 주인이 될 나를 이따위로 대해?!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전형적인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소리를 들으며, 케스퍼는 머리를 헝클였다.
저 모습에 겁을 먹는 것도 본인이 여유로울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곤경에 처한 건 퍼델이나 케스퍼나 비등비등했다. 자신의 상황도 급해지니 저 흉포한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길, 제길!’
케스퍼는 다시 한번 비밀 집무실의 입구를 열려 했다. 거기로 가야만 숨겨 둔 거울을 가지고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올바른 텔레포트 수식을 그려도 입구가 열리지 않았다.
케스퍼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입구의 수식을 바꾸신 건가?!’
그렇다면 필시 자신은 모를 가주들에게만 내려오는 비법이 있었을 것이다.
역시, 회귀 전에 확실히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았어야 했다.
그때 퍼델의 꼬임에 넘어가, 아글라 공작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급하게 군사를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그렇다면 나만큼은 무사히 가주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남부와 아글라를 부흥시킬 때는, 회귀를 알려 준 퍼델이 미친 듯이 고마웠는데.
상황이 바뀐 지금은 그저 성질 더러운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만약 회귀로 인해 퍼델과 케스퍼의 목숨이 이어지지만 않았어도, 퍼델이 지하 감옥에서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나 혼자 수도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저 새끼까지 구하려고 손수 키운 수하들을 전부 잃었어……!’
그들에게 들인 돈이 모두 얼마인가! 그 손실을 어떻게 메꿀 수 있겠는가!
떠올리기만 해도 피눈물이 줄줄 흘렀다.
‘벨라디 앨턴…….’
원망의 추가 움직였다.
결국, 모든 일의 원흉은 이년이었다. 분명 시온을 꼬드긴 것도 벨라디 앨턴의 짓이겠지.
도대체 뭐라고 구슬렸길래, 완벽히 자기 편이라 확신했던 가족들까지 저렇게 나오는 건가!
‘설마 그년도 회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그 거울에 관한 것도? 위치까지도?’
그래서 아버지를 부추겨 비밀 집무실의 입구를 바꾼 걸지도 모른다.
집무실에 자신의 거울이 있는 걸 다 아니까!
‘퍼델 앨러만 데커딜과 내 목숨이 연결되어 있단 것도 알고 있는 건가?’
벨라디 앨턴은 자신의 사정을 전부 꿰뚫고 있는데, 이쪽은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정보량에서 차이가 난 건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마물의 숲에 세워 둔 이 임시 거처도 다 들키고 말 것이다.
그 전에 빨리 거울을 손에 넣고 회귀를 진행해야만 했다.
불안함에 발을 달달 떠는데, 큰 노성이 임시 거처에 울렸다.
“케스퍼 아글라!”
속으로는 퍼델을 업신여기던 케스퍼지만 오랜 세월 납작 엎드렸던 역사가 있었기에, 케스퍼는 본능적으로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부, 부르셨습니까.”
“그 거울은 네가 잘 간직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보십시오.”
케스퍼가 서둘러 바닥에 있던 묵직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갖가지 장신구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회귀 때 재물로 이용할 ‘정령의 보물’들까지 전부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말에 퍼델이 정령의 보물들을 형형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케스퍼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이것도 시온이 준 돈으로 간신히 마련한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