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마차가 감옥 앞에 도착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앨턴가의 마차에 감옥을 지키던 근위 기사 몇과 병사들이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유유히 내리자, 기사 한 명이 서둘러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비를 만나러 왔다.”
“죄송하지만, 폐하의 허락 없이는 죄인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기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막 실종되었으니,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폐하의 허락이라…….”
그때였다.
한 병사가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와, 내 앞을 가로막은 병사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그걸 들은 기사가 조금은 놀라운 표정을 짓다, 다급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기사를 보며 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애초에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태자비를 만나러 왔을 리가 없잖아.’
그동안 킬리언을 통해 황제와도 여러 차례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황궁 내부에 감시자를 심어 두었다.
비록 내가 심어 둔 첩자가 누구인지 황제가 아는 눈치였으나, 그는 킬리언의 조력자이며 헤라 황녀에게도 우호적인 내게 꽤나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내 발칙한 행동에도 조용히 눈감아 줬지.’
난 황궁으로 출발하기 전, 그 감시자를 통해 황제에게 미리 언질을 줬다.
덕분에 지금처럼 수월하게 죄인인 황태자비에게 향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날 안내하던 기사가 한 독방 앞에 멈췄다.
두꺼운 철문에는 아주 작은 창살 창문이 하나 나 있었다.
“죄인은 이곳에 구금 중입니다.”
“문을 열어. 나 혼자 들어갈 테니.”
“죄인을 가둔 곳입니다. 혼자는 위험합니다.”
“경은 앨턴가의 일원인 내가 사람 하나 제압 못 할 것처럼 보이나?”
그렇게 말하며 살짝 분위기를 조였다.
그러자 기사가 바짝 긴장하더니, 이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깔끔하게 본인 잘못을 인정한 기사가 철문을 감시하던 병사에게 서둘러 눈짓했다.
그러자 병사 중 한 명이 열쇠를 달그락거리며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었다.
끼이이익.
곧 육중한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전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뼈가 에일 것 같은 냉기가 훅 느껴졌다.
난방은커녕, 창문 하나 없어 해가 전혀 들지 않는 비좁은 방이었다.
한쪽 벽면에 달린 작은 촛불에 의지해 감옥을 둘러보니, 한 인영이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난 그 인영에게로 다가갔다.
건강이 많이 상했는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여자가 간신히 고개를 들곤 나와 눈을 마주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초리가 아주 사납게 변했다.
“베, 벨라디 앨턴…….”
황태자비…….
사교계의 정점에 군림하며 화려하게 치장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황태자비는 넝마도 되지 못한 담요를 유일한 구원 줄인 것처럼 끌어안은 채였다.
그러곤 입이 얼었는지 연신 말을 더듬었다.
“네가 여, 여긴 왜 온 거야……. 나, 날 비웃으러 오, 온 건가?”
‘그래도 기세만큼은 여전히 살기등등하네.’
그나마 안심이었다.
난 다리를 굽혀 황태자비와 시선을 맞춘 다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둘러 주었다.
이런 내 행동에 황태자비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치, 치워! 감히 누, 누굴 동정하는 거야!”
“릴리스.”
갑자기 불린 본인의 이름에 황태자비의 몸이 움찔거렸다.
난 외투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주며 말을 이었다.
“황족의 작위도 곧 박탈당할 테고, 패러그린 후작가도 멸문이 코앞이니. 이제 너에게 남은 건 이 이름뿐인가.”
“……그래서 뭐!”
“퍼델 앨러만 데커딜이 실종됐어.”
내 말에 황태자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런 그녀의 반응을 기민하게 관찰했다.
“넌 그동안 그 누구보다 놈의 근처에 있던 사람이지. 뭔가 아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나을 거야.”
그러자 황태자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자식의 행방을 궁금해할 인물이 하, 한 무더기일 텐데, 굳이 너한테 말할 것 같아?”
“이건 명심해. 여기서 네 말을 진지하게 들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뭐, 뭐라고?”
“아무도 네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을 거야. 그동안 네가 쌓아 온 허영된 이미지와 네 아비가 저지른 질 나쁜 죄 때문에 패러그린에 대한 신뢰감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거든.”
“…….”
“지금 이 기회를 거절하면 나도 더는 널 찾지 않겠어. 그럼 네가 가지고 있는 카드도 쓰레기가 되는 거지.”
여기까지 들은 황태자비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니, 황태자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 너한테 말하면…… 내게 뭐, 뭐가 돌아오는 거지?”
“원하는 걸 먼저 말해. 가능한 한 맞춰 줄 테니.”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게…….”
여기까지 말한 황태자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날 죽여.”
그 대답에 난 가만히 황태자비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당당히 요구했다.
“난 패러그린 후작가의 유일한 적녀고, 위대한 데커딜 제국 황가의 일원이다. 그, 그것들을 전부 잃기 전에 날 죽여라, 벨라디 앨턴.”
“……원한다면 널 살려 줄 수도 있어.”
내게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
그러나 황태자비는 아주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목숨보다도 그것들이 더 중요해.”
“…….”
“날……. 날 어리석다, 고 하지는 않을 테지. 어차피 너, 너도 나와 같은 부류니까.”
차마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비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네 뜻을 존중해.”
이 말에 황태자비의 눈에 안도감이 스쳐 갔다.
약속을 받아 낸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은 마, 마물의 숲으로 갔을 거야. 거기에 놈이 숨긴 사병들이 있으니까.”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 녀석이 수, 술에 잔뜩 취하면 그 이야기만 떠, 떠들어 댔으니까. 그러곤 본인이 한 말을 기억도 못 해. 멍청한 새끼.”
황태자에게 쌓인 게 많았는지, 황태자비가 킥킥거리며 놈을 비웃었다.
“정확한 위치는 알고 있나?”
“그걸 모, 몰랐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황태자비가 위치값을 읊었다. 그걸 기억하며, 질문을 이어 갔다.
“규모와 병사들의 출처는?”
“……이 이야기를 하면, 너, 넌 날 미친년 취급하겠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전부 사실이야.”
황태자비가 눈을 번뜩였다.
“그 녀석은 살아 있는 벼, 병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시체를 이용하려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마물의 부산물로 사람을 세뇌시키는 놈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병력을 모을 리 없으니까.”
대답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만, 솔직히 놀라웠다.
이번에도 사람들을 세뇌시켜 인형으로 만들려는 건가 싶었는데…….
‘아예 시체를 이용하려 든다고?’
“네 말을 증명할 증거는 있나?”
“있으면, 내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겠, 어?”
황태자비가 얼어붙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믿지 모, 못하겠으면 그만 꺼져.”
그 말에 나 역시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당신의 죽음이 편안하길 바라죠, 황태자비 전하.”
“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그러나 볼 수 있었다. 어느새 고인 황태자비의 눈물과 내 코트를 꾹 움켜잡는 그녀의 손을.
난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기사와 함께 감옥을 빠져나왔다.
‘일단 황태자비가 말한 정보의 정확성을 체크하고 일을 준비해야겠어.’
빠른 결과를 위해 감시자들을 전부 활용해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또…….
‘케스퍼 아글라에게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해 볼까?’
문득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아아, 나도 참 황태자비를 욕할 형편이 아니라니까.
‘내 원수들에게 한 방 먹일 방법이 떠오르면, 이렇게 즐거운걸.’
덕분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난 씨익 미소 지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새벽부터 열린 긴급회의의 분위기는 아주 뜨거웠다.
분명 황태자를 풀어 준 범인을 색출하고, 케스퍼 아글라가 퍼델과 함께 수도 밖으로 도주했음을 밝힐 때만 해도 뜨거움보단 진중한 분위기만 맴돌았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순식간에 가열시키고 말았다.
“앨턴의 임시 가주에게 그 둘을 추적할 묘수가 있습니다. 폐하, 그녀에게 모든 일을 일임해 주십시오.”
그 말에 회의실의 모든 귀족이 크게 반발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렇게 되면, 북부가 모든 업적을 독식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앨턴 임시 가주는 아직 어리고, 여자입니다!”
테오도르는 그들의 말을 무덤덤하게 응수했다.
“북부가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출중한 임시 가주가 문제를 해결하는 겁니다. 또한 젊은 인재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기용하겠습니까.”
테오도르는 단호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부디 제 딸을 큰 뜻에 써 주십시오.”
기실 공작의 말은 이번 일이 끝난 후, 벨라디를 소공작으로 삼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이를 알아들은 눈치 빠른 귀족들이 은밀하게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의 가주 승계라니!
그들의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나, 무작정 반대하기에는 조심스러웠다.
철도의 주역인 ‘벨라디 앨턴’의 영향력이 이미 데커딜 제국을 넘어 온 대륙에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입을 함부로 놀려 앨턴가에게 밉보이게 된다면…….
‘우리 가문은 순식간에 새로운 시장에서 도태될 거야!’
그 두려움에 귀족들이 서로 머뭇거리는 사이, 황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정말로 퍼델 앨러만 데커딜과 케스퍼 아글라를 생포해 온다면……. 이를 대 가주 회의의 첫 번째 안건으로 삼겠다.”
그 말과 함께 긴급회의가 파했다.
모든 귀족들이 테오도르와 이야기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들보다도 더욱 재빨랐다.
“2황자 전하.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킬리언을 붙잡기 위해.
의도치 않게 테오도르에게 선택된 킬리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