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일렁거리면서, 고여 있던 눈물 한 줄기가 기어코 흘러내렸다.
난 그걸 감추는 대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이 일로 눈물을 흘리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그래도 킬리언의 말이 맞았네.’
우습게도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지끈거리던 속이 아주 조금 후련해졌다.
정말……. 그깟 사과가 뭐라고…….
잠시 숨을 가다듬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감쌌다.
슬쩍 옆을 보니, 킬리언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한참 동안 날 바라보기만 할 뿐,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에 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봐요?”
“……제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데 소질이 없어서……. 당신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한 그는 많이 속상한 표정이었다.
난 그런 킬리언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킬리언의 몸이 흠칫거렸다.
“가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돼요.”
“벨라디…….”
“지금 내 옆에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야.”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킬리언에게 내 몸을 맡겼다.
곧 그가 나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따스함에 기대 마음을 추스르는데, 어디선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도대체 언제까지 붙어 있을 생각이야?”
침대에 걸터앉아 네시아를 돌보던 셰넌이 조금은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네시아 앞에서 과한 애정 행각은 자제해 주길 바라. 애초에 타우딘, 아이닝 너희 둘은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그 물음에 어느새 소파 위에 식빵 자세로 앉아 있던 타우딘이 꼬리를 살랑였다.
“계약자가 안정감을 찾는 중인데, 이 몸이 방해할 이유는 없지!”
난로 가까이에서 뒹굴던 아이닝도 폴짝거렸다.
“나도오~! 지금 기분 너무 좋고, 나른하고, 두근두근!”
두 정령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셰넌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사이 가라앉은 감정을 완벽히 정리한 난 킬리언의 품에서 나와 셰넌에게 다가갔다.
“네시아는 이제 무사한 거야?”
“그래, 빠르게 진정되고 있어.”
“그럼 네 힘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겠지?”
셰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난 가지고 왔던 거울을 꺼냈다.
“최대한 빨리 안에 든 회귀를 없애야 해.”
진지한 목소리에 조금은 풀어져 있던 셰넌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알겠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거울을 받아 든 셰넌이 힐끔 잠든 네시아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짧아진 은발을 다정하게 쓰다듬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거울은 회귀의 마법을 흡수한 후 돌려줄게.”
그렇게 말한 셰넌이 스르륵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정령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웠던 하늘이 푸른빛으로 밝아지고 있었다.
“동이 트네요.”
그렇게 중얼거린 난 킬리언을 바라봤다.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더 늦기 전에 얼른 돌아가세요.”
내 말에 킬리언이 잠시 머뭇거렸다.
“벨라디……. 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 되물음에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눈가를 쓸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벨라디, 안녕~!”
미련 가득한 얼굴로 날 보던 킬리언이 아이닝과 함께 돌아갔다.
난 살짝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뭐, 급했으면 바로 말했겠지.
난 그가 마지막으로 쓸고 간 눈가를 더듬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황태자 쪽이 너무 조용하단 말이야.’
그 고약한 성격상, 슬슬 사고를 하나 칠 때였다. 원작에서도 황태자는 킬리언에게 밀리자,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니까.
네시아의 방은 햇빛으로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하녀들도 하나, 둘 움직이고 있겠지.
난 방에 설치된 설렁줄을 흔들며, 타우딘을 바라봤다.
“너도 오늘 고생했어.”
“흠, 당연한 소리를!”
타우딘이 가슴을 부풀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 몸은 이제 푹 쉬어야겠으니, 당분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소리친 타우딘이 잠시 멈칫하다,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도 좀 쉬든가.”
퉁명스럽게 말한 타우딘이 곧 모습을 감췄다.
그 반응에 난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네시아의 방을 나섰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가, 피로감이 내 몸을 덮치는 기분이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그렇게 내 방에 들어가려던 때였다. 저 멀리서 스티아가 빠르게 다가왔다.
“벨라디 님!”
드물게 발걸음을 서두른 스티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언제 사라진 거지?”
“오늘 새벽, 황궁 감옥을 순찰하던 병사들이 발견한 모양입니다. 황태자를 감시하던 인력들은 전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다 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래, 황태자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쉴 틈이 어디 있어.
작게 혀를 차는데, 스티아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또한, 케스퍼 아글라도 지하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방금 입수했습니다.”
“그 두 놈들은 세트니까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섭섭하지.”
그나저나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하나가 터지는구나.
난 인상을 쓰며, 스티아를 바라봤다.
“시온은?”
“안 그래도 아글라 공작가의 전령이 도착해, 그분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내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움직였을 시온을 떠올리자 입 안이 씁쓸해졌다.
그 녀석, 아마 혼자 엄청 자책하고 있을 텐데.
‘친구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그리고 내 휴식을 위해서도. 이제 파죽지세로 일을 진행해야겠어.’
기다려 주는 건 이제 끝났다.
난 스티아에게 날카롭게 명령했다.
“마차를 준비해. 지금 즉시 황궁으로 간다.”
“예, 벨라디 님.”
내 지시에 스티아가 고개를 숙인 후,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난 머리를 팽팽하게 굴렸다.
***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 내 맞은편에는 아버지가 조금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도 황태자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황궁으로 향해야 했기에, 같은 마차를 탔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건, 사냥 대회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
“…….”
아버지는 내게 무언가 말을 붙이고 싶은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로 굴렸다.
물론, 난 그런 그를 가볍게 무시한 채 제플린이 적은 보고서를 읽느라 바빴다.
‘황태자는 정확히 동이 트기 직전 사라졌군.’
누군가 수면제를 이용해 감시 인력을 전부 잠재운 다음, 지하 감옥의 문을 열어 줬고, 감옥에서 탈출한 황태자는 그 즉시 텔레포트를 사용해 황궁을 빠져나왔다.
‘여기서 텔레포트는 케스퍼 아글라의 소행일 확률이 높아.’
황태자를 감옥에서 빼낸 인물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실에 남아 있던 놈의 끄나풀 중 하나겠지.
전부 처리했다고 여겼는데,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지금은 황태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추적하는 게 더 급한데…….’
머릿속으로 앞으로 할 일을 빠르게 정리하는 사이, 연신 눈치를 보던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여셨다.
“난 바로 폐하께서 여신 긴급회의에 참석할 거다. 너도 같이 들어갈,”
“아니요.”
난 아버지의 말을 가볍게 끊었다.
“전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요.”
“그럼 왜 황궁으로 가는 거지?”
아버지가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찡그리셨다. 그 물음에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황태자의 행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을 인물이 마침 황궁에 있거든요.”
“뭐라고?”
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대체 그게 누구냐.”
뭐, 이 정도는 말해도 되려나. 난 지나가는 투로 대답했다.
“황태자비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궁 안으로 들어온 마차가 멈췄다.
곧 시종들이 문을 열고 고개를 조아렸다.
“중앙 궁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내리세요.”
“……황태자비 역시 패러그린이다. 마물의 부산물로 사람을 세뇌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아주 악랄한 가문이야. 그런 가문의 사람을 어떻게 믿겠다는 거냐.”
아버지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가만히 날 주시했다.
그 시선에 난 어깨를 으쓱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황태자비는 실종된 황태자의 행방을 알고 있다.
내가 이 명제를 확신하는 건, 두 가지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회귀 전에도 본인의 악행이 들통난 황태자가 케스퍼와 함께 사라졌었다는 것.
홀로 체포된 황태자비는 황태자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몇 번이나 외쳤지만,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렇게 발언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
그리고 두 번째, 그녀와 황태자의 관계 때문이었다.
‘황태자비 본인은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교계에서는 암암리에 둘의 불화설이 돌고 있었다.
그 사실에 흥미를 느껴 더 깊게 파 보기 위해, 나는 엘린에게 황태자비의 방에 녹음 마법이 담긴 루비를 숨기라 명령했다. 그리고 원했던 대로 패러그린 부녀의 재미있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저에겐 퍼델 앨러만 데커딜의 약점이 필요해요!
-지가 황태자면 다야? 또 날 쓸모없는 사람 취급했다고요!
-못 물러나요! 난 이따위 대접을 받으려고 황족이 된 게 아니에요!
-평생 그 개자식한테 휘둘리면서 살 수는 없어……! 아버지가 돕지 않으면, 저 혼자라도 알아낼 거예요! 어차피 결혼 생활을 유지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 황태자비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황태자의 약점을 캐기 위해 발버둥 쳤던 사람이야.’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저런 대화가 뚝 끊겼더라고? 그렇다는 건…….
‘기어코 황태자의 약점 하나를 거머쥔 거겠지.’
이 두 개의 근거를 조합해 보면, 간단한 추론이 가능했다.
회귀 전에도 이후에도 황태자비는 황태자의 약점을 캐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알게 된 그 약점이 지금 놈의 행방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전에는 쓰이지 못했던 그 정보, 이번엔 내가 아주 아낌없이 사용해 주마.’
난 속으로 후후 웃으며, 아버지를 응시했다.
“어서 내리지 않고 뭐 하세요?”
“……위험한 짓 하지 말아라.”
그 말에 난 굳이 대꾸하지 않고, 들고 있던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내 행동에 아버지가 몇 번 머뭇거리다, 이내 마차에서 내렸다.
곧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힐끔 뒤를 보니,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일로 아직 심란한데…….’
아버지까지 저러니, 불편한 심정이 배가 되는 기분이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난 글자로 시선을 고정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