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78화 (179/197)

178.

그 말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킬리언은 이런 나를 아주 곧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카데미에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그들을 원망하던 때가 있었어요. 날 이곳에 버리고 자기들끼리 잘 지내는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먼저 나왔죠.”

“…….”

“그때는 서럽다고 느끼는 게 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보란 듯이 잘 지내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죠. 오히려 더 괴로웠어요.”

과거를 회상하듯 중얼거리던 그의 모습이 생경해 홀린 듯 바라보다, 조용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 사정 다 아는데, 함부로 말해서.”

“아니에요, 벨라디. 저 역시 당신이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아는걸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너무 부드러워, 나도 모르게 질문이 나갔다.

“지금도 괴롭나요?”

“이제는 괜찮아요. 제 괴로움은 어머니에게 직접 사과를 듣고 나서 전부 사라졌으니까.”

“……사과.”

킬리언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혼자서는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물어보면서, 난 그가 했던 말을 계속 상기했다.

‘그래, 어쩌면 난 도망쳤던 걸지도 몰라.’

이제는 딱지가 생길 법도 한데, 아직도 내 상처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게 너무 분해서, 더욱더 어머니에 대한 모든 걸 지우고 싶었다.

난 이제 멀쩡하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건 전부 과거일 뿐이라고!

‘하지만 난 하나도 잊지 못했어.’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꼴 좀 보라지.

입술을 잘근 깨무는데, 킬리언이 드물게 내 턱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상처를 준 이에게 사과를 듣는 건, 그 과정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죠.”

“난 어머니의 사과 따위 필요 없어요. 그 사람과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아.”

“엮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과는 받을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상처가 곪아서 평생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본능적으로 킬리언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으론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어머니를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이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지질 않았으니까.

‘평생 날 괴롭힌다고?’

역시 이것들을 전부 게워 내기 위해선, 어머니를 마주해야 하는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날 위로하듯, 킬리언이 아주 조심스럽게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설령 사과받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러니 한 번은…… 당사자에게 표출했으면 좋겠어요.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테니.”

그 말에서 짙은 걱정과 진심이 느껴졌다.

나를 향한 온기만으로 가득한 회색 눈을 보니, 가슴을 채우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약간 옅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죽은 이를 다시 만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죠.”

사람들은 이걸 기적이라고 하니까.

마침 저쪽에서 타우딘이 소리쳤다.

“곧 소환한다!”

그 말과 함께 세 정령의 발아래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난 그 광경을 잠시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끝끝내 어머니에게 사과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셈이에요?”

“……그런 경우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때도 혼자서는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 할 건가요?”

“오해하지 말아 줘요.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다만 혼자 극복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다는 거지.”

“흠, 어쩔 수 없네.”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책임지고 날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내 상처가 회복될 동안.”

내 말에 킬리언의 몸이 움찔거렸다. 난 그런 그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평생.”

“벨라디…….”

그가 어쩐지 촉촉해진 눈으로 팔을 뻗어 날 안으려 들었다.

물론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난 가볍게 킬리언의 포옹을 피한 후, 타우딘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상처를 마주 보는 게 이렇게 두려운 거였나.’

애써 킬리언에게 장난스레 말했지만, 사실 지금만큼 심장이 쿵쾅거린 적이 없었다.

난 천천히 숨을 들이쉬다 내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어지러웠지만, 용기를 내고 싶었다.

뒤에서 뜨겁게 날 응시하는 킬리언을 위해서라도.

‘그래, 계속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보다 이 기회에 말이라도 꺼내는 게 나을 거야.’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빛이 확 강해졌다.

눈을 찡그리며 앞을 보자, 세 정령이 만들어 낸 빛의 소환진 위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이는 은발을 하나로 땋은 머리, 가냘픈 몸. 혈색 없는 얼굴의 여자.

“어머니.”

마지막 기억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약간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어머니가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며 날 마주 봤다. 반짝이는 푸른 눈은 특유의 천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벨라디, 내 딸!”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다. 그 순진하고 상냥한 미소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난 아직도 이렇게 괴로운데, 어머니 당신은 여전히 해맑군요.’

꼭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처럼.

애써 진정시킨 것이 무안할 정도로 억울함이 빠르게 치솟았다.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내 자존감을 그렇게 갉아먹고, 상처를 준 이는 저리도 밝은데…….

‘나만 아프고 힘들어하는 게.’

버럭 소리치고 싶은 걸 본능적으로 꾹 눌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내 마음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멜도르는 어디 있니? 네가 그 정도 자랐으면 우리 아들도 많이 컸을 텐데……!”

어머니가 설렘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로 저따위 망발을 내뱉은 순간, 임계점에 다다른 머릿속이 펑 하고 터졌다.

동시에 그녀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과 망설임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내 마음속에 남은 건, 그녀를 향한 순수한 원망뿐.

내가 이를 아득 가는 사이, 셰넌이 내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 도헤미아…….”

“아! 셰넌!”

그런 셰넌이 반가웠는지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셰넌의 양손을 꼭 잡았다.

“셰넌, 보고 싶었어! 내가 멜도르를 낳은 이후 보지 못했으니까. 우리 너무 오랜만이다!”

“나도 그래, 그런데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 것 같,”

“셰넌.”

냉기가 철철 흐르는 내 목소리에 셰넌이 어깨를 움츠렸다. 눈의 정령이 순박한 검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날 바라봤다.

난 그런 정령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시작해.”

그 명령에 셰넌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어머니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눈치가 전혀 없던 어머니도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는 감지한 모양이었다. 표정이 점차 굳어 가는 걸 보면.

“셰넌?”

“도헤미아, 내가 예전에 너에게서 가지고 갔던 기억……. 이제 돌려줘야 할 때가 왔어.”

“뭐라고?”

“괜찮아. 원래 네 기억이니까 큰 어려움은 없을 거야.”

“……싫어!”

셰넌의 말에 어머니는 심한 거부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그 기억으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넌 다 알잖아! 그런데 그걸 나에게 다시 주겠다고?”

“미안해, 도헤미아. 네시아를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네시아? 그게 누군데?”

“침대 위예요.”

내 말에 셰넌과 실랑이를 벌이던 어머니가 휙 날 바라봤다. 난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절 보지 말고, 침대를 보세요.”

“침대라니?”

“이리 와, 도헤미아.”

셰넌이 어머니를 부드럽게 침대로 이끌었다. 덕분에 누워 있는 네시아를 정면에서 보게 된 어머니가 경악했다.

“저게 뭐야……!”

“네시아에게 저거라고 하지 마! 저 아이는…… 네 기억을 토대로 만든 내 아이야.”

“내 기억으로 만들었다고?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어머니가 확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강한 부정이 자극이 됐는지, 셰넌의 목소리도 커졌다.

“너도 멋대로 인간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잖아! 그래서 나도 널 따라 한 거야!”

“뭐라고?! 벨라디와 멜도르는 나와 테오도르가 서로 사랑해서 태어난 아이들이야! 그런데 넌 네 멋대로 행동한 거잖아!”

“네가 뭐라고 하든, 네시아를 잃을 수 없어……! 난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셰넌이 이를 악물고, 어머니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 순간, 어머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 이제야 겨우 이 세상의 미련을 거의 다 버렸어! 곧 있으면 승천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나한테 그 기억을 주면……! 나, 난 안 돼! 싫어!”

“미안, 도헤미아. 난 너보다 네시아가 더 소중해.”

그 말에 어머니는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는지, 와락 표정을 구겼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한테 가족이 되어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말에 셰넌이 힐끔 날 바라보다 조용히 속삭였다.

“너도 네 딸보다 아들을 더 소중히 여겼잖아.”

그 말에 어머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사이, 셰넌은 눈을 꼭 감고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손목을, 남은 손은 네시아의 이마 위에 올린 채 집중했다.

어머니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셰넌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간절한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벨라디! 엄마 좀 도와줘!”

어머니의 필사적인 외침에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제가 왜요?”

“……뭐?”

“셰넌의 말이 틀린 게 있나? 어머니가 멜도르만 편애하고 저를 차별하신 건 맞잖아요.”

“벨라디!”

“그런데 제가 왜 어머니를 도와야 하는 거죠? 어머니는 제가 간절히 필요할 때마다 절 외면하셨는데.”

“난 그런 적 없어!”

어머니는 강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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