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서러운 과거로 기분이 더러워진 게 방금이다.
그동안 내가 어머니를 마음속에서 지우려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녀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남기고 싶지 않아, 울컥하고 치솟는 기분들을 억누른 적이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무수했다.
‘그 덕분에 네시아도 큰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었어.’
하지만 직접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는 감정들이 들끓었다.
마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마지막 버튼이 눌린 것처럼.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도대체 난 언제까지 어머니를 향한 감정을 정리해야 하는 거지?’
이 원망스러움과 서러움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소되는 걸까?
지겹고, 괴로웠다.
요동치는 감정을 참기 힘들어 난 이를 아득 갈며 분노를 드러냈다.
“내가 그 꼴을 가만둘 것 같아?”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셰넌이 황급히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네시아를 포기할 순 없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네시아가 낫지 않으면, 기회의 눈물에 담긴 회귀의 마법도 회수하지 않겠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난 그렇게 말하며 정령검을 소환했다.
누가 알겠는가? 기회의 눈물을 만든 건 셰넌이니, 그 원흉을 제거하면 회귀가 저절로 사라질지.
이런 내 살기를 느꼈는지, 타우딘이 서둘러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해라, 벨라디.”
“저게 지금 날 협박하잖아.”
“셰넌이 이기적인 게 한두 번인가.”
타우딘의 말에 셰넌이 네시아에게 꼭 붙으며 입을 열었다.
“애, 애초에 네시아가 없으면 회귀 마법을 회수할 수 없어. 한번 만든 정령의 보물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선 내게 힘을 줄 계약자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단 말이야.”
“셰넌의 말이 맞다.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온전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계약자를 필수로 거쳐야 해.”
타우딘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자신의 몸을 비볐다.
“이성을 찾아라, 벨라디.”
팔과 등에서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행동이 내 분노를 풀어 주기 위한 타우딘 나름의 노력이라는 것을 인지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그래, 지금은 나 혼자 발작할 때가 아니야.’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자, 벨라디 앨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게 뭔지, 우선순위를 정해.
그나마 타우딘 덕분에 빠르게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난 꽉 쥐고 있던 정령검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타우딘의 갈색 눈을 응시했다.
“신세를 졌네.”
“이 몸은 셰넌과 다르게 계약자에게 의지가 되는 훌륭한 정령이니까.”
“인정할게.”
그렇게 중얼거린 난 조용히 물었다.
“셰넌의 말대로, 어머니의 영혼을 소환하면 네시아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옮길 수 있는 게 확실해?”
“못 할 건 없다. 다만 나 혼자로는 힘들어.”
타우딘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다른 정령이 이 몸을 도와주면 될 것 같군. 마침 벨라디 네 근처에는 정령사가 한 명 더 있지.”
‘킬리언과 아이닝.’
예쁘게 미소 짓는 킬리언과 해맑은 아이닝의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이닝이 널 도우면 된다는 건가.”
“그래.”
분명 타우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날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덩치 큰 호랑이는 연신 확답을 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 몸과 네 연결이 끊어지면 곤란하니 한 공간에 같이 있어야 하지만, 아주 찰나일 거야.”
난 그런 타우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가만히 정신을 잃은 네시아를 내려다봤다.
-그분이 언니를 아프게 했으니까. 그러니 언니를 힘들게 한 사람과 닮고 싶지 않아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네시아가 원작과 달리 자신의 근본을 전면에서 부정하게 된 계기가…….
‘바로 나란 말이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아주 양가적인 감정들이 합쳐져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네시아를 향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과 어머니를 소환해야 한다는 분노.
한편으로는 저 아이의 변화에 대해 묘하게 차오르는 안도감과 아이를 향한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걱정.
마지막으로…….
‘얘는 왜 날 좋아하는 걸까?’
날 향한 아이의 순수한 호감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본인에게 상냥한 이가 넘치는 이 저택에서, 왜 네시아는 날 따르는 거지?
아까 본인이 했던 말처럼, 네시아의 눈에는 내가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건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실어 네시아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침묵을 견디지 못한 셰넌이 입을 열었다.
“내키지 않아도 서둘러야 해. 네시아가 조금이라도 기력을 찾아야만 나도 회귀를 회수할 수 있어.”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타우딘, 킬리언과 아이닝을 불러 줘.”
회귀는 둘째 치고, 일단 죽어 가는 아이를 살리는 게 우선이니까. 비록 나에게 가장 역한 수단일지라도.
“알겠다.”
타우딘이 스르륵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사이, 난 셰넌에게 확실히 물었다.
“어머니를 소환하면, 바로 기억을 돌려줄 수 있는 거지?”
“……그래. 하지만…….”
“하지만 뭐. 일을 이렇게 벌였으니 확실히 처리해. 실수는 용납하지 않아.”
내가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자, 셰넌이 어깨를 작게 움츠리며 말했다.
“기억을 돌려주는 건 가능해. 내가 염려스러운 건 소환된 도헤미아의 상태야.”
“어머니의 상태가 무슨 상관인데.”
“너도 알다시피, 망자가 성불을 하려면 가지고 있던 모든 미련을 떨궈야 해. 그런데 만약 도헤미아가 기억을 되찾고, 지난 삶에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가지게 되면……. 그럼 쉽게 성불하지 못할 거야.”
그렇게 중얼거린 셰넌이 두 손을 꼭 모았다.
“하지만 도헤미아가 아니면, 네시아를 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쩌지?”
“그게 무슨 문제라고.”
“그렇지? 기억을 되찾으면 잠시 괴롭긴 해도, 성불이 힘들 정도는 아닐 거야.”
도헤미아는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 말에 난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본인의 기억으로 미련이 생겨도, 그건 어머니의 몫이지. 네시아의 몫이 아니야.”
“하지만!”
“태도를 확실히 해, 셰넌. 말로만 네 계약자를 아낀다 하지 말고.”
내 일침에 셰넌이 입을 꾹 다물더니 조용해졌다.
그때, 바닥에 텔레포트 진이 생기며 타우딘과 아이닝, 킬리언이 등장했다.
킬리언은 오자마자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벨라디, 네시아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들었어요.”
타우딘이 상황이 급하다고 언질을 주었는지,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며 네시아가 누워 있는 침대를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옆에 있던 아이닝도 허공에서 폴짝 뛰었다.
“우왓! 자연 친화력이 엄청 폭주하고 있어! 큰일이다! 큰일이야!”
그 말에 타우딘과 셰넌도 네시아를 살폈다.
셰넌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아까보다 훨씬 더 악화됐어……! 안 되겠다, 얼른 시작하자!”
그 말에 타우딘이 힐끔 날 바라봤다.
난 마음 깊숙한 곳으로 각오를 마친 후, 눈짓했다. 내 신호를 읽은 타우딘이 앞으로 나섰다.
“아이닝, 이 몸의 옆으로 오거라.”
“응!”
두 정령이 눈을 감고 집중했다.
셰넌도 곧바로 네시아에게서 어머니의 기억을 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곧 두 정령의 주위로 검은 기류가 생겨났다.
나와 킬리언은 그걸 지켜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동안 못 나눴던 정보들을 교류했다.
“황실 상황은 어떤가요?”
“형님은 감옥에 수감한 상황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증거로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정황이 뚜렷해진 덕에, 아무도 형님의 편을 들지 못하고 있고요. 패러그린 역시 가문의 재산과 토지를 압류하고, 신분은 미리 박탈했습니다. 황태자비는 형님과 다른 감옥에서 폐하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고요.”
“이쪽도 케스퍼 아글라의 죄를 입증할 여러 증거들을 확보했어요. 날이 밝자마자 아글라 공작 측에서 케스퍼 아글라를 고발할 거예요.”
“그래도 아글라 공작을 빠르게 설득해 다행이네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서든 공적인 대화를 이어 가며 초조함을 잠재우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소환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되도록 그녀와 단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날 발견하고 말을 걸어도 무시하면 그만이려나?
‘과연 내가 어머니를 무시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난 건, 결국 그녀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기대어,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를 향한 모든 감정을 없애려 했다. 감정을 억누르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결국 난 실패했지.
죽은 어머니를 소환하는 잠깐의 시간도 참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으니까.
이런 내가 아무런 동요 없이 어머니를 무시할 수 있을까? 만약에 치밀어 오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생각이 많아졌다.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데 내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휙 고개를 돌리니, 옆에 있던 킬리언이 손을 맞잡고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떨리나요?”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난 순순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어머니에게 동요하고 싶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내 자존심이 전부 무너질 테니까.”
그 순간,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극복할 수 없는 끝없는 무저갱이라 인정할 것 같으니까. 난 그게 무서웠다.
문득 이런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의식하다니……. 우습네요. 지금 이 상황.”
자조 섞인 내 혼잣말에 킬리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에게 약해지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 말에 입가에 걸쳐져 있던 실소가 사라졌다.
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킬리언 역시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는 우리에게 하나의 세계죠. 그런 세계에게 거부당했던 경험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
“인간이라면 지극히 당연하게 느끼는 감정을, 애써 회피하지 않았으면 해요.”
회피. 신경이 예민해진 탓에 그 단어가 무척 거슬렸다.
“난 피한 적 없어요.”
“본인의 감정을 억누르고 애써 잊으려는 건 회피예요, 벨라디.”
킬리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당신이 뭘 알아. 난 한 번도 도망친 적 없어.”
“……나도 다 알아요. 나 역시 가족에게 버림받은 적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