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76화 (177/197)

176.

‘그래, 네시아가 어머니와 달라졌음을 가장 많이 실감한 건 바로 나였지.’

난 고개를 내려 베개에 흩어진 네시아의 짧은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그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그러는 사이, 타우딘이 말을 이었다.

“지금의 네시아는 이전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있지. 거기에 본인의 탄생 과정을 너무 이르게 알게 된 것이 큰 충돌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게 신체에 무리를 준 거구나.”

내 말에 타우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회귀 전과 달라진 네시아. 이 아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탓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군.’

“호전이 안 되면 네시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 몸도 잘 모르겠다. 네시아는 셰넌이 보관하고 있던 기억과 새로 배운 창조의 마법이 합쳐져서 탄생한 복합적인 존재니까.”

그렇게 대답한 타우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성공한 경우는 이 몸도 처음 본다. 셰넌 본인도 운이 좋았다고 말했고.”

그 말에 난 작게 혀를 찼다.

“……일단 네시아의 상황을 주치의에게 알리는 게 낫겠어.”

“이 몸이 보기에는 별 효과 없을 것 같다만. 이건 네시아의 정체성과 근간이 된 기억의 충돌 때문이야. 일반적인 병이 아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해야지. 네시아 상태가 이런데, 하녀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모시는 주인이 쓰러졌는데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다니.

아픈 아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괘씸함과 내 결정으로 네시아가 이렇게 되었다는 죄책감이 뒤섞여 머리가 아파 왔다.

그때, 셰넌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네시아! 정신이 좀 드니?”

그 말에 고개를 내리니 간신히 눈을 뜬 네시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네시아는 숨을 쌕쌕거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하녀들은 아무런 잘못 없어요.”

힘없는 목소리에 나는 네시아 근처로 다가가, 거추장스럽게 서 있는 셰넌을 옆으로 휙 밀어냈다.

이런 내 행동에 셰넌은 어이가 없는지 항의하려 했으나, 내 눈빛 한 번에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간단히 셰넌의 기를 죽인 난 네시아를 바라봤다. 아이도 날 올려다보며 애써 말을 이었다.

“제가 내보낸 거예요. 가서 쉬라고.”

“아프다고 말하지 않은 거야? 또 투정 부리는 거라 오해를 받을까 봐?”

내 물음에 네시아는 가만히 눈동자에 나를 담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이마에 고인 땀을 닦아 주었다.

“몸이 아프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약해지지. 그런 때 작은 투정 정도는 부려도 돼.”

내가 아팠을 땐,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시아의 푸른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투정 하나 부려도 되나요?”

“뭐?”

“언니, 나 미워하지 말아요.”

닦을 새도 없이, 굵은 눈물 줄기가 붉어진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거, 이제는 알아요……. 그래도 전…….”

말을 하다 힘에 부쳤는지, 네시아가 숨을 헐떡였다. 난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입을 열었다.

“눈물은 흘리지 마, 네시아. 울면 기력이 떨어져.”

문득, 가슴 깊숙한 곳에 잠재웠던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멜도르는 종종 아프던 아이였고, 어머니의 시선은 온통 놈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리고 난 암묵적으로 그런 어머니를 매일 도와야 했지.’

크게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는 칭얼거리던 멜도르를 재운 후, 날 칭찬해 줬으니까.

-우리 벨라디, 누나가 되더니 훨씬 듬직해졌네. 앞으로도 엄마 많이 도와줄 거지?

-네!

애초에 난 그 흔한 잔병 한 번 겪지 않은 건강한 아이였다.

이런 내가 아픈 동생을 돌봐 주는 건 당연한 거였다. 게다가 어머니의 칭찬까지 들을 수 있으니 뿌듯함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런 내 뿌듯함은 어느 순간 깨지고 말았다.

아무리 건강한 나였어도 딱 한 번, 심하게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디 있어?

열이 펄펄 끓으니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찾게 되었다. 난 날 간호하던 하녀장, 에밀리에게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다.

멜도르를 돌봐 줬던 것처럼, 그녀가 나도 봐 주길 원했으니까.

-멜도르 도련님의 방에 계세요. 도련님도 오늘 아프셔서…….

-……나도 아파. 열도 나고, 목도 부었어.

-아가씨…….

-어머니께 나한테도 와 달라고 해 줘. 응? 어머니가 한 번만 날 봐 주면 괜찮을 것 같아.

-알겠어요, 얼른 모셔 올게요.

에밀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수 어머니를 데리러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는 당연히 혼자였다.

-어머니는?

-그게…… 지금은 힘들고 저녁 무렵에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멜도르가 어머니와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 떼를 써서 어쩔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말에 나도 울컥 화가 올라와 드물게 소리를 높였다.

-멜도르는 매일 어머니가 옆에 있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내가 간절히 찾고 있다고 다시 전해 줘!

내 투정에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방을 나섰다.

그러나 돌아온 그녀의 뒤는 여전히 휑했다.

어머니의 명백한 거절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약속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저녁이 지나 깊은 밤이 되도록 어머니는 날 찾아오지 않았지.’

심지어 아버지도 한 번은 보고 가셨는데…….

그날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났다.

‘그 탓에 기력이 약해져 하루면 나을 걸, 삼 일을 고생했거든.’

그러니 네시아에게 해 준 말은 내가 직접 겪은 경험담이었다. 서러운 과거와 어머니의 편애는 언제 떠올려도 기분이 더러웠다.

애써 잡념을 지우는데, 네시아가 가만히 날 바라봤다.

내게서 무언가를 읽은 걸까? 천천히 아이의 작은 입이 열렸다.

“전 공작 부인과 다르니까.”

“뭐?”

“공작 부인과 다르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금방이라도 이 저택에서 내쳐질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난 조용히 아이를 주시했다. 네시아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열심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좋아요. 공작 부인과 다르다는 말이. 전, 그분과 아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째서? 네 근본은 어머니의 기억일 텐데. 그걸 거부하니까 지금처럼 아픈 거고.”

“그분과 비슷해지면, 언니가 힘들잖아요.”

“…….”

“그분이 언니를 아프게 했으니까. 그러니 언니를 힘들게 한 사람과 닮고 싶지 않아요.”

난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을 선택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목소리가 나왔다.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지?”

“에밀리랑 주치의에게요. 셰넌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뒤 물어봤어요. 공작 부인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괜한 짓을 했구나.”

고열로 혼몽했을 텐데, 네시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언니처럼 반짝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군가의 대신이 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속삭인 네시아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셰넌이 후다닥 가까이 다가왔다.

“네시아!”

차마 날 밀치진 못한 채, 침대 반대쪽으로 달려간 셰넌이 네시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이마가 뜨겁다는 걸 확인하곤, 셰넌은 미간을 찡그렸다.

“자연 친화력을 이만큼이나 나누어 줬는데도 낫질 않다니……. 타우딘, 이제 어쩌지?”

“쯧, 그러니까 왜 이런 생명체를 만들어서는!”

“조용히 해! 네시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계약자가 필요했으면, 처음부터 도헤미아인가 공작 부인인가 하는 여자가 너와 계약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았나!”

“도헤미아가 임신만 하지 않았어도 그랬을 거야! 그런데 아이가 생기자마자 날 뒷전으로 미뤘다고!”

그녀에게 맺힌 게 많았는지, 셰넌이 울컥 화를 냈다.

“인간들은 다 그랬어!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게 생기면 난 순위에서 밀려났단 말이야!”

“그래서 네시아를 만들어 낸 거냐? 오로지 너만 바라보는 계약자를 만들기 위해?”

“어차피 타우딘 넌 날 이해하지 못해! 난!”

“시끄러워.”

난 셰넌의 외침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난 몹시 기분이 더러웠고,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셰넌의 칭얼거림은 듣기 싫은 소음처럼 들렸다.

“네가 지금 그딴 소리를 할 땐가?”

“……그건 아니지만.”

“넌 네시아를 만든 장본인이면서, 수습할 방법을 정말 모르는 거야?”

“나, 나도 생명을 탄생시킨 건 처음이라서. 원래라면 네시아가 무사히 성장했을 텐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 몰랐어.”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셰넌을 노려봤다.

내 서슬 퍼런 눈빛에 셰넌이 까만 동공으로 가득한 눈을 깜박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론적으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뭔데.”

“네시아가 아픈 이유는 자아 정체성과 도헤미아의 기억이 충돌해서야. 그러니 둘 중 하나를 없애면 폭주하는 기운이 가라앉을 수 있어.”

“그럼 어머니의 기억을 없애. 지금 당장.”

내 명령에 셰넌이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 기억은 네시아의 근간이란 말이야. 이미 네시아와 깊이 융화된 걸 어떻게 분리할 수 있겠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라면 몰라도.”

셰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힐끔 타우딘을 바라봤다.

단번에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셰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래서, 지금 타우딘의 능력으로 어머니의 영혼이라도 소환하자는 거야?”

내 형형한 기세에 긴장했는지 셰넌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네시아를 위한 마음이 두려움보다는 더 컸는지,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시도는 해 볼 수 있잖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네시아는 목숨을 잃을 거야! 자아의 충돌은 그만큼 위험해!”

“그래서 지금 나보고 그 사람을 다시 만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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