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시온이 날 찾아온 이후로 앓아누웠다는 소식은 들었다. 실제로도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아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핑계였겠지.
나 역시 잠이 오지 않아 쌓인 일을 처리하며 밤을 보내는 경우가 늘어났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아글라 공작가의 정기 회의는 끝났을까.’
시온이 움직인다면 오늘일 텐데.
집중하던 서류에서 눈을 떼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웠다.
‘일단 케스퍼 아글라에게 붙인 감시자를 이용해 놈의 사돈은 움직였어.’
그러니 지금쯤 그놈이 저지른 자잘한 범죄를 다 알았겠지. 거기다 케스퍼의 아내가 유산한 사실까지 안다면 금상첨화고. 브로치의 추적 마법은 어떻게 됐으려나.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검지로 집무실 책상을 툭툭 치며, 습관처럼 차선책을 고민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벨라디 님, 시온 아글라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드디어! 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시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벨라디!”
시온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색이 되어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몸을 덜덜덜 떨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사실이었어. 케스퍼 아글라는 제정신이 아니야.”
“시온, 진정해.”
“아아, 난……. 난 형이 그렇게까지 추악한 사람인지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시온은 불안한지 연신 횡설수설했다.
난 스티아에게 문을 굳게 닫고 4층의 사람들을 전부 물리라는 신호를 보내며, 시온의 등을 토닥였다. 그에게선 옅은 혈향이 났다.
“뭘 봤는지 말할 수 있겠어?”
내 질문에 정신없어하던 시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천천히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언제나 상냥한 빛을 띠고 있던 금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숨을 거세게 몰아쉬더니 간신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 공간에 갔는데……. 거기서 형이 숨겨 놓은 연구실을 발견했어.”
확실히, 아글라 공작가가 구축한 비밀 공간이면 은밀한 실험을 하기 딱 좋았겠지.
작게 혀를 차는 사이, 시온이 말을 이었다.
“실험실에 사람이……. 아니, 사람이었던 것들이 제대로 수습되지도 못한 채 널브러져 있었어. 인체 실험을 감행했다고 해서 각오는 했지만……. 그 광경은 너무…….”
“시온, 그 정도면 충분해.”
시온의 안색이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마물의 부산물을 이용한 인체 실험의 잔해가 얼마나 끔찍했을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난 시온을 소파에 앉히며 안심시켰다.
“고생 많았어, 시온. 못 볼 꼴을 보고도 바로 내게 와 줘서 고마워.”
“……미안해, 벨라디. 그동안 널 믿지 못해서.”
“난 괜찮아.”
나는 그를 위로하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 부모님도 이제 상황을 다 알았겠네.”
“맞아. 그래도 내 예상보다 훨씬 충격을 덜 받으신 것 같아.”
“충격을 덜 받으셨다고?”
“응, 특히 어머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어머니는 나보다도 훨씬 전에 형이 이상하단 걸 눈치채셨나 봐. 가장 먼저 결단을 내린 것도 어머니셨어.”
역시 아글라 공작 부인도 케스퍼의 아내가 유산한 걸 알고 있었구나.
그만한 일이 아니면, 자식 사랑이 지극한 그녀가 마음을 돌릴 리 없으니까.
“그럼 케스퍼 아글라의 처우는 결정이 난 거야?”
“아직. 안 그래도 내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긴급회의가 열렸어. 형은 지하 감옥에 구금 중이고.”
“지하 감옥이라.”
“마법사를 가두기 위해 마력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한 감옥이야. 그곳에 있으면 비밀 집무실로 도망가지도 못하겠지.”
“케스퍼 아글라의 연구실은 어떻게 했어? 그대로 놔뒀니?”
내 물음에 시온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증거 몇 개만 챙기고 폭발시켰어. 그렇게 끔찍한 곳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시온의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었다. 그는 기운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마 아버지가 직접 폐하께 고발할 거야. 우리 측이 발견한 증거만으로도 이미 사형은 확정이라서……. 오히려 그 이상 발견되면 가문의 존속이 위험해질 것 같아.”
“알겠어, 그럼 난 케스퍼 아글라의 일에서 손을 뗄게.”
시온이 각오를 다졌다면, 내가 나서는 건 독이었다.
대신, 난 단호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건 케스퍼 아글라를 내치는 것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야. 분명 너희 가문 곳곳에 놈의 잔재가 남아 있을 테니까.”
내 말에 시온도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들을 전부 숙청할 수 있겠니?”
이 질문은 케스퍼의 세력을 몰아내고 남부의 주인이 될 각오를 끝냈냐는 의미를 내포했다.
시온은 입을 굳게 다물고, 한참 동안 날 바라봤다. 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시온이 천천히 손을 올려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렸다.
“아직 현실성이 없긴 해.”
그렇게 중얼거린 시온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확고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책임’은 실감하고 있어.”
“…….”
“난…… 더 이상 가족에 목매지 않고, 내 책무에서 도망치지도 않겠어.”
아글라의 금안이 날 응시했다.
“그렇게 새로워진 아글라로서 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벨라디.”
“……당연하지, 시온.”
친구의 성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건 아주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난 대견함을 느끼며 시온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넌 내가 인정할 만큼 훌륭하게 아글라를 책임질 거야. 장담해.”
내 말에 시온은 큰 위안을 받았는지, 어딘지 뭉클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내가 아무리 옳은 행동을 했다고 포장해도, 시온에게 큰 상처를 남긴 건 사실이야.’
그러니 시온이 나와 연을 끊겠다고 하면 묵묵히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시온은 이 일을 단순한 상처로 남기지 않고,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모스틴이 맞았어.’
시온은 나와는 다른 강인함을 가지고 있구나.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난 운이 좋아. 이렇게 너라는 친구를 만났으니까.”
의심할 여지도 없는 진심이었다. 이런 내 말에 시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웃은 시온이 곧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 이것 받아. 연구실 지하 가장 안쪽에서 발견한 거야.”
시온은 그걸 내게 넘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형이 만든 보안 패턴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걸린 마법만큼은 해석할 수 없었어.”
내 손에 들린 물건은 마법 수식이 그려져 있는 천에 꽁꽁 휘감겨 있었다. 도대체 몇 개의 마법을 겹쳤는지, 그 수식조차 읽을 수 없을 만큼.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이 봉인 기술은 10년 뒤에나 개발되는 건데…….’
그러니 시온이 해석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고.
봉인된 물건을 잠시 살펴보는 사이, 시온이 말을 이었다.
“네가 필요했던 게 맞을까? 형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긴 거라 가지고 오긴 했는데.”
“맞아.”
난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내가 찾던 거울이야.”
아글라 공작가가 한 세기에 걸쳐 구축한 보호막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미래의 기술까지 따라 하며 봉인한 물건.
‘그게 기회의 눈물이 아니면 뭐겠어.’
“내 부탁을 잊지 않았구나. 정말 고마워.”
“네가 나한테 해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시온의 말에 난 웃음으로 화답한 후, 티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을 흔들었다.
딸랑~.
맑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
시온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 속을 알았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신세 질게.”
곧 종소리를 듣고 스티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난 그녀에게 4층 손님방 중 가장 좋은 곳으로 시온을 안내하라 말한 후, 그와 인사했다.
시온이 나가기 전, 날 바라봤다.
“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 안색이 안 좋아.”
“……그게 티가 나?”
“헤헤, 사실 안 나. 그런데 벨라디 너라면 내 걱정 하느라 밤잠을 설쳤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이런, 들켰네.”
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어, 오늘은 나도 그만 잘게.”
“그럼 아침에 보자.”
“잘 자, 시온.”
그렇게 시온이 나가고…….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난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나.’
미안, 시온. 지금 난 단 1초도 마음 편하게 쉴 수 없어.
황태자와 케스퍼 아글라의 끝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난 빨리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타우딘을 불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흑호가 스르륵 나타났다.
“셰넌은 어디 있어?”
얼른 이 봉인을 처리하고 회귀의 마법을 없애 버려야지.
봉인된 거울을 집어 드는데, 타우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벨라디, 큰일이다.”
그 말에 타우딘과 눈을 마주했다. 타우딘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상태였다.
“네시아가 쓰러졌어.”
***
급하게 2층으로 가니, 그곳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난 의아함을 품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버지가 없는 건가?’
그 아이가 쓰러졌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사람인데, 인기척조차 느껴지질 않다니.
일단 네시아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에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셰넌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셰넌은 내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슬쩍 날 바라본 정령은 다시 네시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역시 네시아에게는 모든 게 일렀던 거야.”
셰넌은 침대에 누워 있는 네시아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나와 계약하면 안 됐는데…….”
셰넌의 검은 동공이 아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나 역시 셰넌의 시선을 따라 침대에 누워 있는 네시아를 바라봤다.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난 침착하게 네시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거워.’
“언제부터 고열에 시달린 거지?”
“오늘 저녁부터.”
“주치의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었으면 내 존재가 들통나는 한이 있더라도 데려왔을 거야.”
어지간한 의술론 이 고열을 치료할 수 없다는 건가?
내 의문을 읽었는지 옆에 있던 타우딘이 입을 열었다.
“원래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것보다도, 그 생명이 목숨을 이어 가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난 가만히 타우딘의 설명을 경청했다.
“너도 알다시피 회귀 이전의 네시아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근간이 되어 준 기억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자잘한 충돌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큰 문제 없이 성장할 수 있었어.”
“지금은 다르다는 거야?”
“그걸 그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느낀 게 너 아닌가.”
핵심을 찌르는 타우딘의 말에 난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