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그러자 보석 위로 숫자가 떠올랐다.
「123, 87, 534 / 06:09」
케스퍼가 방문한 곳의 위치값과 시간이었다. 시온은 그걸 살피다 이상한 좌표를 하나 발견했다.
「?, ?, ? / 09:00」
“이 물음표는 무슨 의미일까요?”
마법으로 위치값에 혼동을 줄 수는 있지만, 저렇게 물음표로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시간을 보니, 케스퍼는 며칠 내내 저 물음표로 뜨는 장소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저곳이 우리 가문의 비밀 집무실인가?’
의문을 가진 상태로 고개를 돌렸는데, 아글라 공작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 좀 줘 보렴.”
시온은 순순히 브로치를 넘겼다.
아글라 공작은 묵묵히 브로치에 기록된 좌표들을 확인하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케스퍼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시온은 그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아글라 공작은 심각한 얼굴로 추적 기록을 다시 확인하다, 시온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저곳에 한번 가 봐야겠다. 시온, 너도 가고 싶니?”
“네.”
그 대답에 아글라 공작은 복잡한 표정으로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눈을 감고 마력을 모았다.
그러자 허공에 아주 복잡한 마법 수식과 텔레포트가 결합된 마법진이 생겨났다.
얼마나 크기가 거대한지, 사용된 마력의 양이 시온의 상상을 훌쩍 넘어갔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저렇게 방대한 마력을 사용하면 당연히 시전자에게도 심한 부담이 온다.
시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글라 공작의 코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마력의 대부분을 소진하여 입구를 완성한 아글라 공작이 크게 비틀거렸다.
“아버지!”
시온이 다가가자, 아글라 공작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
그가 먼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동그란 모양의 입구로 들어가자, 시온 역시 서둘러 뒤를 따랐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난 건 화려한 집무실이었다.
어디서 구한 건지 각종 사치스러운 보물들로 장식된 공간을 보며 아글라 공작이 확 인상을 찡그렸다.
“이곳에 자주 들렀나 보구나.”
아글라 공작은 집무실에 장식된 작은 조각상 하나를 들며 중얼거렸다.
시온 역시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곳에 들어오려면 아까처럼 마력을 거의 다 소진해야 하나요?”
“일반적으론 그렇지. 그래서 나도 이제껏 딱 한 번만 들르고 오지 않았다.”
“그럼 형은 이곳에 올 때마다 그만한 마력을 소진한 걸까요?”
“…….”
아글라 공작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시온은 그런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 집무실을 둘러봤다.
아버지의 눈빛을 보니 이 집무실을 꾸민 건 전부 케스퍼의 소행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꾸밀 여유가 없었을 텐데.’
케스퍼가 타고난 마력의 양은 아글라 공작보다 적었다. 그러니 집무실에 올 때마다 지쳐 쓰러졌다고 봐야 무방할 터.
시온의 의문을 읽었는지, 아글라 공작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또 다른 방법도 있지. 지금보다 훨씬 더 간편하고 쉽게 이 공간에 들어오는 방법.”
그 말에 시온이 아글라 공작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글라 공작이 숨을 토하듯 대답했다.
“마물의 부산물을 이용하는 거야.”
“!”
“마물의 부산물 중 사람이 섭취하면 인위적으로 마력을 뽑아낼 수 있다. 마력이 없는 자들에게서도 추출할 수 있어 전쟁 중 자주 사용되었지.”
“억지로 마력을 생성해 뽑히면…… 무사할 수 없었을 텐데요.”
“그래, 희생자들은 당연히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철저히 금기된 방법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챈스 공이 들이민 증거들이 떠올랐다.
아글라 공작도 시온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착잡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분주한 손길로 집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온 역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꼼꼼히 집무실을 살폈다.
‘벨라디가 말했던 거울이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시온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집무실을 뒤지던 그는 곧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발견한 증거에는 그동안 은폐했던 케스퍼의 죄목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건 마탑이 벨라디를 납치할 때 사용했다던 고위급 투명 마법진이잖아.’
이게 여기 있는 이유가 다 무엇이겠는가.
‘형이 정말로 벨라디를 죽이려 한 거야.’
벨라디를 향한 죄책감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한편, 아글라 공작은 집무실 깊숙한 곳에서 금고를 발견했다.
그는 그나마 남은 마력으로 금고를 파훼하고 고이 모셔 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안의 내용을 확인한 아글라 공작이 손에 힘을 주며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아들을 향한 욕설이 절로 나왔다.
서류에 적힌 건, 케스퍼가 그동안 황제에게 먹였던 꽃 차 속 마물의 부산물 비율이었다.
‘아글라를 영광이 아니라 진창으로 끌어내리려 해?!’
아직까지도 자신을 실망시킬 게 남아 있다니! 시온이 말했던 ‘반역’이 이 꽃 차와 관련 있으리라.
배신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아글라 공작이 이를 갈며 이것 외에도 다른 것들을 살필 때였다.
“아버지!”
그 외침에 아글라 공작이 휙 뒤를 돌아봤다.
언제 도착했는지 뒤에는 케스퍼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아버지가 여기 왜 오신 겁니까!”
케스퍼는 속으로 아악 고함을 질렀다.
회귀 후, 케스퍼는 이 집무실 입구의 마법 수식을 바꾸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래도 아글라 공작이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을 방문하지 않아 방심하고 있었는데!
‘벨라디 앨턴의 존재가 이것까지 영향을 끼친 건가……!’
분노로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속내를 들키는 건 좋지 않은 수였다. 케스퍼는 능숙하게 표정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게 미리 언질을 주시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아글라 공작은 매서운 눈초리로 제 아들을 노려봤다.
“네가 여기에 어떻게 온 거지? 이곳은 가주만 올 수 있는 공간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일단 나가죠. 나가서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케스퍼 아글라, 왜 마물의 부산물을 밀수입한 거냐. 이 서류는 또 뭐고! 도대체 네가 뭐가 모자라서 이딴 더러운 짓을 한 거야!”
“진정하세요, 전부 아글라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케스퍼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검지에 낀 반지가 집무실 조명에 의해 반짝였다.
아글라 공작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마법 보석인 척 디자인된 저 반지가 사실 마물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조악한 물건이라는 걸.
‘저렇게 비틀어진 마력을 내가 그동안 왜 몰랐을까……!’
모두 자식이라는 이유로 눈 가리고 귀 막은 결과였다. 공작이 한탄했다.
“황태자 때문이냐? 그놈이랑 어울리면서 네가 이렇게 망가진 거야?”
아글라 공작의 말에 케스퍼의 인상이 확 구겨졌지만,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곳은 대화하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닙니다.”
아글라 공작의 반응을 보니, 아직 자신의 연구실까지는 발견 못 한 모양이었다.
그곳까지 들키기 전에 서둘러 그를 이곳에서 내보내야 했다.
“어머니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두 분께 다 이야기할 테니 일단 나가죠.”
“네 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제가 설마 어머니에게 그러겠습니까?”
“황태자도 그러는데, 놈의 오른팔인 네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아글라 공작의 말에 케스퍼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제 아들이 저런 분위기였나?
아글라 공작은 혀를 차며,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자신과 같이 이곳에 들어온 시온이 보이질 않았다. 케스퍼는 시온이 있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고.
‘잘 숨은 건가.’
이곳의 입구를 여는 수식을 한 번 보여 줬으니, 나가는 수식도 잘 만들어 내겠지.
부인이 걱정된 아글라 공작은 케스퍼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
“케스퍼 아글라, 네가 내 자식이란 게 수치스럽구나.”
아글라 공작의 진심 어린 경멸에도 케스퍼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
“꾸중은 나가서 받겠습니다.”
‘어차피 회귀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을.’
보험이 남은 케스퍼는 아쉬울 게 없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집무실 한곳을 스쳐 갔다.
그 후, 케스퍼가 출구의 수식을 그렸고, 두 사람은 바깥으로 넘어갔다.
완전히 기척이 사라지고…….
“후우-.”
케스퍼가 서 있던 곳 바로 옆에서 시온이 뿅 나타났다. 시온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애써 안경을 치켜올렸다.
“들키는 줄 알았네.”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고위급 투명 마법진을 바라봤다.
집무실 한쪽에서 마력의 뒤틀림을 느끼자마자 시온은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케스퍼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시온의 모습이 투명하게 변한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형이 바로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다행이었어.’
아글라 공작이 정면에서 케스퍼의 시선을 끈 덕분에 시온은 들키지 않고 집무실에 남은 거니까.
‘지금이 기회야.’
바로 옆에서 케스퍼를 관찰했기에 그가 나가기 직전, 어디를 바라봤는지 알 수 있었다.
시온은 다급히 집무실 한쪽 벽에 설치된 액자로 향했다.
자세히 살피니, 액자에 보안 마법이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물론, 시온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그에게 보안 장치의 원리를 설명해 준 것이 바로 케스퍼니까.
시온은 그때 알아챈 형의 마력 패턴과 습관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한 추억이 떠오르자 입 안이 씁쓸해졌지만…….
몇 번의 시도 만에 시온은 보안 장치 해제에 성공했다.
그러자 액자가 점점 커지며 하나의 문으로 변했다. 문 너머로부터 아주 불길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무섭다.’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보고 싶지 않았으나,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시온은 안경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