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73화 (174/197)

173.

화려한 금발을 고아하게 틀어 올린 여성, 시온의 어머니인 아글라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게 다 무슨 소리니?”

“부인!”

“어머니!”

아글라 공작 부인이 서둘러 자신의 아들에게 다가갔다.

“시온, 정말 케스퍼 때문에 그 연구를 포기한 거니?!”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벨라디를 배신하기 싫었고, 형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걸 왜 네가 고민해!”

언제나 조곤조곤 말하던 공작 부인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연구가 너에게 어떤 기회인데!”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반응에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 부인이 안타까워할 건 짐작했으나, 저렇게 분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공작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공작 부인의 어깨를 감쌌다.

“부인, 진정하시오.”

“진정이 되겠어요?! 케스퍼 그 못난 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제 막 성인이 된 동생한테……!”

공작 부인이 서둘러 시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아가, 네가 그럴 필요 전혀 없어. 일단 연구에 다시 복귀하렴. 앨턴 공작가에는 내가 직접 편지를 보내마. 네가 케스퍼에게 줬다는 돈도 전부 다시 마련해 줄게.”

“어머니.”

“네 형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너까지 고생할 필요 전혀 없어. 부모로서 그 꼴은 절대 못 봐.”

자신을 감싸는 어머니의 반응을 보며, 울컥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에게 다정했으나, 시온은 은연중 그녀가 자신보다 케스퍼를 더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애초에 케스퍼는 가문을 이끌 후계자고, 시온은 그에 비해 더 자유로운 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케스퍼를 끌어내려야 하는 일로 크게 다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시다니.’

순수한 감동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도리어 아글라 공작이 당황해하며 자신의 아내를 바라봤다.

“부인, 케스퍼도 다 생각이 있을 거요.”

“생각은 무슨 생각이요! 그럼 당신은 시온이 케스퍼를 위해 희생하는 게 옳다는 건가요?”

“그, 그런 게 아니라…….”

공작은 아내의 날카로운 기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쩌면 지금이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시온은 재빠르게 소리 차단 마법을 펼친 후, 제 부모님을 바라봤다.

“두 분께 반드시 알려 드려야 할 말이 있어요.”

시온은 망설임 없이 벨라디에게 들은 것들을 털어놓았다.

케스퍼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부터 그에게 추적 마법이 새겨진 브로치를 달았다는 사실까지.

시온의 말이 이어질수록 공작 부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곧 이야기가 끝났고, 공작 부인이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몸을 휘청였다. 아글라 공작은 서둘러 부인의 몸을 부축했다.

“부인!”

“케스퍼……. 케스퍼가…….”

“부인 진정하시오. 시온의 말이 일부분 사실이긴 하나, 전부 맞다는 증거도 없소.”

그 말에 공작 부인이 잠시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케스퍼가 막 저택에 도착했어요. 그걸 알려 주려고 집무실에 온 거예요.”

“마침 잘됐군. 이참에 케스퍼를 불러서 진지하게 대화를 하면 될 것 같아.”

“아니요.”

공작 부인이 제 남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케스퍼를 붙잡고 있겠어요.”

“뭐라고?”

“시온.”

공작 부인의 눈이 시온에게로 향했다.

“벨라디가 줬다는 브로치. 예정대로 그걸 조사하렴.”

“부인!”

남편의 외침에 공작 부인이 아름다운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사실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케스퍼가 변했다는 걸.”

“어머니.”

“분명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그 아이가 황태자와 어울리고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후부터 뭔가 달라졌어.”

“그게 다 무슨 말이오, 부인.”

아글라 공작 부인은 잠시 지난날 케스퍼와 한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그의 태도는 큰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케스퍼, 요즘 새로운 사업을 계획한다며? 좋은 생각이라도 있니?

-아, 설명해도 어머니는 모르실 겁니다. 제가 다 알아서 준비 중이니 걱정 마세요.

-……그래? 듣기로는 새 비단을 수입한다던데.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 사업이란 게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머니께서 좋은 마음으로 절 도와주시려 해도, 혹여 손해라도 끼치면……. 전 어머니를 탓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제 마음을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지금처럼 사교계에서 활동하셔도 충분히 의지가 됩니다. 그러니 이대로 계셔 주세요.

케스퍼는 그렇게 말하며 비릿하게 웃었지.

그 아이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언제부턴가 공작 부인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무언가가 싸하고, 무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모든 게 제 기분 탓이라 여겼다.

케스퍼는 제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고, 자신들은 언제나 화목한 가족이었으니까.

다만…….

그런 대화가 몇 년이나 이어지면서, 피곤함이 쌓인 공작 부인은 점점 케스퍼를 피하기 시작했다.

며느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서먹하게 대했다.

그 아이가 딱히 잘못한 건 없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저절로 케스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랬었는데…….’

“지금 새아가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아요?”

“친정에 일이 생겨 몇 달 전부터 그쪽에서 지내지 않소.”

“아니야, 내가 보냈어요.”

공작 부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케스퍼가 그 아이에게 종종 손찌검을 했다더군요. 그러다 배를 잘못 맞아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늦은 밤이었다.

며느리는 사색이 되어 제게 달려왔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채로.

-살려 주세요, 어머님! 그이가 제 아이도 죽이고, 저도 죽이려 해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제 품에서 무너진 며느리의 치마는 피로 흥건했다.

그게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한 공작 부인은 이를 목격한 하녀들의 입을 철저히 단속하고, 그 아이를 친정으로 보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유산을 했어요.”

“뭐라고?!”

아내의 이야기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 아글라 공작이 경악하며 공작 부인을 바라봤다.

“유산? 그게 사실이오?!”

공작 부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글라 공작은 어이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런데 왜…….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왜!”

“새아가가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내게 빌었어요. 유산이 여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

“가뜩이나 챈스 가문은 우리에게 딸을 시집보낸 걸 가장 큰 영광이라 여기는 곳인데, 이 말이 소문이라도 나면…….”

오랫동안 살롱을 운영하며 귀부인들의 남모를 처지를 다 알고 있던 아글라 공작 부인이었다.

그런데 설마 제 며느리가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될 줄이야.

공작 부인은 그때의 참담함이 떠올라 숨을 가쁘게 쉬었다.

그 누구보다도 제 아들들을 사랑과 교양으로 키웠다고 자부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본인이 저지른 폭력으로 제 부인이 아이를 잃었는데……. 케스퍼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어요. 챈스 공을 좌천시킨 걸 보면, 그 아이가 친정에 돌아간 걸 뻔히 다 알았을 텐데.”

이 일을 계기로 공작 부인은 제 아들이 변했다는 걸 완전히 인정했다.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케스퍼는 미쳤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시온은 어머니가 그동안 꼭꼭 숨긴 진실을 들으며 가슴이 타들어 갔다.

‘형수님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챈스 공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해 보니,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침묵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형수를 탓했을 텐데. 얼마나 괴로웠을까!

결국 케스퍼의 이중성을 알아차린 건 그의 부인과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시온과 아글라 공작이 죄악감에 허덕이는 사이, 공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내 자식이어도 결국, 그 애는 나와 다른 사람인데. 그걸 인정하기 싫었나 봐요. 난 다른 부인들과 다르게 화목한 가정을 이뤘다는 게 가장 큰 자부심이었는데…….”

그 오만이 일을 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들었나 봐.

그렇게 중얼거린 공작 부인이 남편의 품에서 빠져나와 시온을 바라봤다.

자신과 똑 닮은 막내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케스퍼와는 전혀 다르게.

그녀는 그런 시온을 꼭 껴안으며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케스퍼를 그냥 두면 안 돼.”

시온까지 잃을 수 없어.

본능적으로 그런 직감이 들었다. 케스퍼를 내버려 두면 시온이 위험해진다.

잠시 아들을 껴안고 숨을 고른 공작 부인은 금방 진정하고 본래의 우아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아글라를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케스퍼가 외출복을 벗었겠죠. 제가 붙잡고 있을 테니, 앨턴 양이 줬다는 브로치로 그 속셈을 알아봐요.”

“부인, 만약 벨라디 앨턴의 말이 사실이면.”

“나도 다 알아요.”

공작 부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굳건했다.

“아들을 똑바로 교육하지 못한 부모로서, 벌을 받아야겠죠.”

공작은 제 아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각오를 다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 역시……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가야 함을 깨달았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못난 부모이기 때문에.

“알았소.”

만약 자신이 케스퍼에게 아글라의 옛 영광만 늘어놓으며, 황태자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았다면. 그럼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글라 공작은 부질없는 가정을 꾹 억눌렀다.

그리고 시온의 어깨를 툭 잡았다.

“해 보자.”

시온은 그런 부모님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곧 죽어도 케스퍼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두 분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런 부모를 보며 용기를 다시 얻었다.

‘나도 흔들리지 말자.’

케스퍼가 내쳐지고, 아글라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어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게 바로 벨라디가 말한 책임일 테니까.

***

공작 부인은 훌륭하게 미끼 역할을 수행했다.

케스퍼가 방을 비우고 얼마 후, 시온과 아글라 공작은 그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석함에 가지런히 정리된 페리도트 브로치를 꺼내 마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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