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71화 (172/197)

171.

추적 마법을 확인하려면, 외출을 끝낸 케스퍼에게서 브로치를 회수해야 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케스퍼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시온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른 증거들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형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건 분명해.’

벨라디의 증언도 그렇고, 벌써 수십 번은 돌려 봤던 자수정의 영상 역시 이를 입증했다.

시온은 가족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 고민했다.

‘모든 시련을 함께 이겨 내고, 서로를 보호하는 든든한 울타리…….’

적어도 시온이 살아오면서 여긴 가족은, 그리고 가문은 그랬다.

그는 생각을 더 확장해, 아글라 공작가와 남부를 떠올렸다.

‘우리 가문은 다른 공작가보다 분가가 많아.’

그들 모두 아글라 공작가에 뿌리를 둔 것을 큰 긍지로 여겼다.

특히, 가까운 친족들은 아글라 공작가와 사업,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저마다 남부에서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우리 가문이 반역에 휩싸인다면…….’

데커딜 제국에서 ‘반역’은 주도한 가문 하나만 멸문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엮여 있거나 피가 섞였다면 함께 산 채로 매장당하겠지. 그 많은 분가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가문은 몇 없을 것이다.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온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걸 가족이라고 볼 수 있나?’

단 한 명이 다른 생각을 품었다는 이유로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는 게, 그게 가족인가?

시온은 깊은 고뇌에 잠기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남부의 중심 세력들이 전부 모이는 정기 회의가 있는 날.

사실 시온은 케스퍼가 페리도트 브로치를 차고 간 이후, 아프다는 이유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글라 공작 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시온의 침실을 몇 번이고 방문했지만, 그녀의 방문조차 모조리 거절했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진정제를 받기도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지.’

지금도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으니까.

그러나 직계로서 정기 회의만큼은 참여해야 했다.

‘지금도 충분히 지각이지만…….’

시온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회의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설 때였다.

“이것 놔라! 난 꼭 소공작님을 만나야 해!”

“챈스 공, 진정하십시오. 회의실은 허락받은 가문의 가주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아글라 소공작의 사돈인데, 허락이라니! 우리 가문처럼 가까운 분가가 어디 있다고 그러는 거야!”

“이봐, 어서 챈스 공을 응접실로 모셔라!”

“집사! 내 여동생이 이 가문에서 쫓겨났다고 자네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입구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온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아, 시온 님.”

“아글라 공!”

아글라 공작가의 총집사가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기사에게 팔을 붙잡혔던 남성이 소리쳤다.

“아글라 공도 소공작님과 한패입니까?! 그동안 제가 바친 충성을 무시하고 이렇게 내치시다니, 이게 진정 제국의 공작가가 할 일이냔 말입니다!”

그 무례한 언행에 기사가 다급히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온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옆에서 곤란해하는 집사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따로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그럼 회의에 너무 늦으실 겁니다.”

“그래도 챈스 공을 저렇게 냉대할 수는 없잖아. 형수님의 오라버니 되는 사람인데.”

마침 회의실에 들어가기 싫었는데, 좋은 핑계가 생기기도 했고.

시온은 회의실에서 조금 떨어진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챈스 공, 따라오십시오.”

그 말에 눈치껏 기사가 남자를 잡은 손을 놓았다.

자유의 몸이 된 챈스 공이 살벌하게 기사를 노려본 후 시온의 뒤를 따라갔다.

“아글라 공은 그나마 도리를 아시는 분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시온은 챈스 공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텅 빈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글라 공작가는 항상 모든 방을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둘은 깨끗한 응접실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방이 켜져 있지 않았는지,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두 사람을 따라온 집사가 급하게 난방 시설을 켜려고 했으나, 시온이 손을 휘저어 집사를 말렸다.

그러곤 손가락을 탁 튕겨 방 안 공기를 훈훈하게 만든 후 상석에 앉았다.

“앉으세요.”

시온의 말에 챈스 공이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그는 많이 급했는지, 집사가 완전히 나가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글라 공! 아글라 공도 이제 소공작님과 함께 움직이기로 한 겁니까?”

시온은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야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전부 다 알고 왔습니다! 최근 아글라 공께서 소공작님께 엄청난 액수의 현금을 유통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시온이 잠시 멈칫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크흠! 소공작님의 측근 중 저와 막역한 지인이 하나 있습니다!”

챈스 공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아글라 공, 소공작님께 제 말 좀 전해 주십시오! 그동안 제가 소공작님을 위해 바친 충성이 이렇게 되돌아오다니! 억울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말해 보세요.”

“이것, 이것 좀 봐 주십시오!”

챈스 공은 내내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시온은 아무런 말 없이 서류를 받고 안에 든 내용을 살폈다.

“소공작님이 제게 시키신 일들을 정리한 서류입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사소한 증거까지 모조리 모아 왔어요! 제가 세운 공이 이렇게나 많은데, 제 여동생이 실수했단 이유 하나만으로 저까지 좌천되다니요!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

애써 포커페이스를 가장하고 있지만, 시온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전부 무엇이란 말인가.

시온은 흘러내린 안경을 겨우 올리며, 서류의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노예 매매 각서」

「인체 실험 관련 비품 제출서」

「실종자 유가족에게 전달한 합의금 내역서」

아글라 공작가와 사돈 관계인 챈스 공은 사실 오래도록 케스퍼와 합을 맞춘 최측근이었다.

그는 케스퍼가 수월하게 마물의 부산물을 실험할 수 있도록, 재료를 모으고 경비를 처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재료에는 당연히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필요하다면 실종이라는 이름 아래 납치도 서슴없이 진행했다.

그 역겨운 행태와 증거가 고스란히 기록된 서류를 보며 시온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게 다 무슨…….’

어떻게 이딴 더러운 짓을……!

시온의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던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챈스 공은 제 심경을 토해 내느라 바빴다.

“제 여동생이 소공작님께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아닙니다! 말이 안 돼요! 아글라 공도 앞으로 소공작님과 같이 일을 도모하게 됐으니, 부디 제 말을 전해 주십시오! 가뜩이나 위기인 지금, 저 같은 충신을 잘라 내면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챈스 공은 시온이 케스퍼에게 돈을 준 걸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시온도 이제 케스퍼와 한편이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말에 거침이 없었고,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도 손쉽게 넘겼다. 이 모든 사실이 시온의 숨통을 조여 왔다.

시온은 애써 숨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쥐어짜듯 꺼냈다.

“챈스 공……. 언제부터 형을 도운 거죠?”

“자그마치 12년입니다! 여동생이 소공작님과 결혼하기 전부터 함께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 긴 세월에 시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일단 진정해야 해. 동요하지 마.’

“……알겠습니다. 형과 상의해 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그는 침착하게 들고 있던 서류를 챙겼다.

챈스 공은 달라진 시온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화색이 되어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글라 공! 아, 제 여동생도 그만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못난 것이 친정으로 돌아온 뒤 방에서 나오질 않아요!”

그 말에 시온은 형수님을 떠올렸다.

시온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 본 적 없는 챈스 가문의 차녀.

그녀는 몇 달 전 친정에 일이 생겼다며 남부로 내려간 상태였다. 그 당시 시온은 한창 마법 연수로 바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혹시 형수님도 이 더러운 일에 연루되어 있는 건가…….’

시온은 암담한 기분으로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집사를 불렀다.

곧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시온 님.”

시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대신해, 챈스 공이 잔뜩 거들먹거렸다.

“당연하지! 이제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하게! 그리고 오늘 당한 수모는 결코 잊지 않겠어!”

챈스 공의 말에도 집사는 미동 없이 시온을 주시했다. 집사 뒤에는 가문의 기사들이 열에 맞춰 서 있었다.

시온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중죄를 저지른 죄인이다.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가둬라.”

“예, 시온 님!”

“아, 아글라 공!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사들이 재빠르게 챈스 공을 둘러쌌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행동에 챈스 공이 발악했지만, 기사들이 손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팔이 붙잡히고 입이 막힌 챈스 공이 질질질 응접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시온은 그런 그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집사를 바라봤다.

“형은 회의에 참여했어?”

“아직 저택에 귀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그가 없으면 방해받지 않을 테니까.

시온은 서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이 증거들이 조작이길 바랐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챈스 공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벨라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온, 이것만큼은 믿어 줘. 케스퍼 아글라가 엮인 가장 큰 죄는 반역죄야.

‘반역…….’

그 무게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시온은 문득, 무서운 사실 하나를 직감했다.

‘챈스 공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그 막역한 지인.’

그 인물이 설마…… 벨라디의 사람일까?

그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자신이 케스퍼에게 돈을 준 걸 알겠는가. 그걸 아는 이는 자신과 케스퍼, 그리고 벨라디밖에 없는데!

‘벨라디가 일부러 자신의 사람을 통해 챈스 공에게 그 정보를 알린 거야. 나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친구의 치밀함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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