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70화 (171/197)

170.

“미안……. 내가 실언을 했어.”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너와 내가 다른 건 당연하니까.

벨라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반응에 시온 역시 입을 다물고 자책했다.

‘왜 그런 말을 해서는……!’

벨라디를 상처 입힐 생각은 절대 없었는데!

잠시간 정적이 흐른 뒤, 벨라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넌 케스퍼 아글라를 버릴 수 없다는 거야?”

그 질문에 시온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을 버리라고?

그건 케스퍼 아글라를 가문에서 쫓아내고, 그 혼자 처벌을 받게 하라는 뜻이었다.

결국 시온은 새로운 후계자로서 형의 빈자리를 채우게 되겠지.

그 상황을 부모님이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가족은 언제나 하나라고, 가족끼리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기둥 중 하나를 내가……. 내가 내칠 수 있나?

시온은 거듭해서 고민했으나, 당장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벨라디 역시 그런 시온의 고뇌를 눈치챘으나, 여유롭게 기다리기는 힘들었다.

황태자를 절벽 끝으로 내몬 이 순간을 놓치면, 언제 회귀가 시작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시온, 케스퍼 아글라와 끝까지 같이 갈 생각은 아니지?”

약간의 초조함이 묻은 그 질문에 시온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벨라디를 응시했다.

지혜가 담긴 금안과 차갑지만 온기를 머금은 적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시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벨라디가 날 걱정해서 저렇게 말하는 거, 알아.’

자신을 위해서 일부러 모질게 말하는 것도.

안다, 전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정신 차려! 네 가족은 나야! 벨라디 앨턴이 아니라!

시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 몰아닥쳐서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벨라디는 그런 친구의 갈등을 꿰뚫어 봤다. 그리고 시온을 설득하기 위해선 결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함을 직감했다.

“시온.”

벨라디가 차분한 목소리로 시온을 불렀다.

시온이 고개를 들자 그녀가 내민 건 페리도트로 만든 브로치였다.

“이건…….”

익숙한 디자인에 시온이 벨라디를 바라봤다.

“일부러 케스퍼 아글라가 선호하는 디자인과 보석으로 만든 거야.”

벨라디의 붉은 눈이 순간 번뜩였다.

“안에는 추적과 감지 무효 마법이 담겨 있지.”

멜도르에게 부탁해 특별히 마련해 둔 것이었다.

시온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벨라디는 그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감지 무효 마법을 함께 넣었어. 케스퍼 아글라가 의심하지 않도록.”

“이 브로치를 형이 착용하도록 유도하라는 거야?”

“맞아. 그리고…… 케스퍼 아글라에게 숨겨 둔 비밀 공간이 있어. 네가 그걸 직접 확인했으면 해.”

“공간……?”

“아마 놈은 거기에 매일 방문할 거야. 불안하니까. 그중 하루라도 저 브로치를 착용했으면, 추적 마법에 기록이 남을 거고.”

“그 기록을 따라서 나도 그곳에 가 보라는 거구나.”

시온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브로치를 바라봤다.

‘비밀 공간이라니.’

그 말을 듣자마자 퍼뜩, 한 곳이 떠올랐다. 아글라 가문 내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 집무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가주인 아버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텐데…….’

아무리 아버지가 형을 아낀다고 해도, 벌써부터 그 위치를 알려 준 걸까?

아니면 벨라디의 말처럼 정말로 형이 별도의 은신처를 마련한 걸까?

시온이 생각에 잠긴 사이, 벨라디의 말이 이어졌다.

“케스퍼 아글라는 거기에 거울 하나를 보관하고 있을 거야. 난 그게 반드시 필요하고.”

“거울?”

시온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으나, 거울만큼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벨라디는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아, 마법 보석 연구에 대한 네 지분. 그걸 현금으로 바꿔 줄까 해.”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에 벨라디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날 급하게 찾아온 거. 전부 케스퍼 아글라가 널 닦달해서 그런 거잖아. 내 약점이라도 알려 달라고 그러니?”

“으응, 맞아. 하지만 난…….”

“그래, 네가 어떻게 그러겠어.”

‘너만큼 착한 애가 또 어디 있다고.’

“거기다 마침 넌 마법 보석을 부담스러워했잖아. 멜도르의 몫까지 네가 전부 차지했다고 생각하니까. 점점 올라가는 네 위상도 그렇고.”

벨라디는 시온의 속을 이미 파악한 듯, 유려하게 말했다.

“내 약점을 알려 줄 수는 없지만, 마법 보석 연구의 지분을 케스퍼 아글라에게 넘기면 도움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고민하는 중이지?”

벨라디의 말에 시온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찾아가겠다는 연락만으로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뭐, 어려울 것 없으니까.”

‘충분히 어려운 것 같은데…….’

벨라디의 추측이 전부 맞았다.

시온은 도움이라도 되라는 케스퍼의 말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껏 아글라 공작가를 지탱하고 있는 건 케스퍼뿐이고, 자신은 언제나 뒤로 쏙 빠져 혜택만 누리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법 보석으로 가신들이 알랑거리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라도 도움이 되려 했는데……. 그걸 벨라디가 먼저 간파했을 줄은 몰랐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저 정도는 돼야, 가주를 꿈꿀 수 있는 걸까?’

그러는 사이, 벨라디가 담담히 말했다.

“그 지분, 전부 현금으로 바꿔 줄게. 그걸 케스퍼 아글라에게 갖다줘.”

“그래도 괜찮겠어?”

“당연하지.”

벨라디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그 돈을 주면 케스퍼 아글라는 좋다고 너에 대한 경계심을 풀 거야. 그럼 네가 더 수월하게 놈의 본색을 확인할 수 있을 테고.”

그 말에 시온은 살짝 입 안을 깨물었다. 형의 본색이라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벨라디는 잠시 멈칫했다.

시온의 반응이 벨라디의 예상보다 온화한 건 다행이었다. 이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 말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아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이라는 정에 휘둘려서, 네가 책임져야 할 것들에 눈을 돌리지 마.”

“…….”

“단순한 친구가 아닌, 고위 귀족으로서 말하는 충고야.”

책임.

그 단어 하나가 시온의 가슴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었다.

***

벨라디에게 받은 현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평생을 대부호로 살아온 시온도 쉽게 보지 못한 액수인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역시 부담스러워.’

물론, 마법 보석 연구의 성과는 액수로 측정할 수 없긴 했다.

그럼에도 이런 어마어마한 현금을 한 번에 받자, 마음이 매우 무거워졌다.

케스퍼에게 돈을 주기 직전, 시온은 망설였다.

‘어쩌면 이건 형을 배신하는 행위일지도 몰라.’

시온도 알고 있었다.

이 돈을 건네는 순간, 자신도 벨라디의 계획에 일조한다는 걸.

어쩌면 화목하기만 했던 가족의 균열을 촉진하는 걸 수도 있고.

‘……그렇다고 나만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벨라디의 말처럼 뭐라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니까.

시온은 다짐을 되새기며 케스퍼의 방에 찾아갔다.

그리고 상당히 어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벨라디의 약점은 알려 줄 수 없지만, 마법 보석 연구의 지분을 전부 현금으로 바꿨어.”

“현금이라고?”

케스퍼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이런 연기가 낯선 시온은 머뭇거리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응, 그래도 형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전부 형에게 줄게.”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액수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케스퍼는 자신의 조끼를 벗기던 하인의 손을 매섭게 내치고, 성큼성큼 시온에게 다가갔다.

“이깟 돈이 아니라, 그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걸 말하라니까.”

혀를 찬 케스퍼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두 눈으로 확인한 액수가 본인의 상상을 가히 초월했기 때문이다.

“…….”

“그 정도면 부족하진 않을 거야.”

“……시온! 내 동생!”

케스퍼가 활짝 웃으며 시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드디어 이 형의 마음을 알아줬구나!”

케스퍼는 정말로 기쁜 듯 연신 액수를 확인했다. 시온은 살면서 저렇게 들뜬 형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고맙다, 시온. 네 덕분에 숨통이 틜 것 같아! 네 도움은 절대 잊지 않을게!”

“……응, 다행이네.”

순식간에 바뀐 케스퍼의 행동에 시온은 속이 상했다.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행동을 제 형이 그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스퍼는 만족스럽게 턱을 쓰다듬었다.

‘차라리 잘됐어.’

안 그래도 마법 보석 연구로 시온의 위상이 올라가는 게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은 참이다.

저보다 한참은 어린 주제에 제 권위에 도전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스스로 명예를 포기하고, 그걸 전부 돈으로 바꿔서 저에게 바치다니.

역시 시온 아글라는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충실한 동생이었다.

“두고 봐라, 시온. 내가 반드시 누명을 벗고 아글라는 건재하다는 걸 증명할 테니.”

“믿어, 형.”

시온은 케스퍼가 한눈을 파는 사이, 슬쩍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하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시온은 하인에게 페리도트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어머니가 보낸 브로치야.”

“예, 시온 님.”

하인은 공손히 브로치를 받아 들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시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의 선물이라 했으니까 조만간 형에게 착용시키겠지.’

눈치 빠른 하인들은 어머니가 고른 액세서리들을 바로바로 사용했으니까. 시온의 하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것으로 당장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냈다.

시온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그래, 시온. 가서 편히 쉬어라. 자세한 이야기는 날이 밝으면 하자.”

신경질적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케스퍼는 여유롭게 웃으며 시온을 배웅했다.

시온은 자신에게 일말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 케스퍼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 그의 방을 나섰다.

그러나 다음 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던 케스퍼는 이른 아침부터 저택을 비우고 없었다.

그리고 시온은 그의 하인을 통해, 케스퍼가 바로 페리도트 브로치를 착용했다는 걸 들을 수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