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시온은 아주 드물게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제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시온의 정색에 가신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한 후, 넉살 좋게 웃었다.
“이런, 저희의 대화를 오해하셨나 보군요. 생각하시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 푸십시오, 시온 님.”
‘가증스러워.’
저들은 시온이 딱 싫어하는 부류였다. 저 꼴을 보기 힘들어 권력을 멀리했던 것인데…….
‘이렇게 틈이 생겼다고 바로 나한테 들러붙는구나.’
시온이 인상을 찡그리는데, 복도 맞은편에서 케스퍼가 빠르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가신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온에게서 멀어졌다.
“소, 소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작님!”
케스퍼는 그런 가신들의 인사를 전부 무시한 채, 시온의 팔을 낚아챘다.
“혀, 형?”
“따라와.”
그 거친 행동에 시온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끌려갔다.
그 행동에 가신들이 자기들끼리 뭐라 수군거렸으나, 케스퍼의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시온을 데리고 간 케스퍼는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동생의 어깨를 확 잡았다.
“시온, 벨라디 앨턴의 약점이 필요해.”
“뭐?”
“그 건방진 년이 지금 날 끌어내리려고 작정을 하고 있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내가 당할 거야!”
“형, 진정해. 벨라디가 그럴 리 없잖아.”
시온은 케스퍼를 진정시키려 했다.
“황태자 전하가 궁에 구금당해서 그래? 내가 말했었잖아. 황태자 전하가 벨라디를 죽이려고 했다고. 공녀의 암살을 사주한 거야. 그러니 처벌을,”
“지금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드는 거야! 어린 게 알면 뭘 안다고!”
성질이 확 올라온 케스퍼가 시온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너도 벨라디 앨턴이랑 어울려 다니니까 이 형이 우스워 보여?!”
“으윽, 형. 아파……!”
시온이 신음하고 나서야, 케스퍼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초조하다고 이렇게 소리만 빽빽 지르는 건 수준 낮은 황태자나 저지르는 짓이었다.
케스퍼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애써 웃으며 시온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미안하다, 시온. 이 형이 마음이 급해서 못 할 짓을 했네.”
“형…….”
“하지만 기억해. 벨라디 앨턴은 황태자 전하만 노리는 게 아니야. 지금 내 목도 조이고 있어. 내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고.”
“형이 잘못 알고 있는 걸 거야. 벨라디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그러지 않아.”
“시온 아글라.”
케스퍼가 시온을 노려봤다. 애써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지만, 눈빛에는 배신감이 가득했다.
“지금 네 형이 아니라 벨라디 앨턴의 편을 드는 거냐?”
“그게 아니라,”
“지금 그년 때문에 내가, 그리고 우리 가문이 얼마나 큰 곤경에 빠졌는지 알아?”
“형, 나는.”
“정신 차려! 네 가족은 나야! 벨라디 앨턴이 아니라!”
“……난.”
“네가 믿어야 할 건 이 형이라고! 알겠어?!”
시온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케스퍼가 다다다 쏘아붙였다. 그 말에 시온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동생의 행동에 케스퍼는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쳤다.
“벨라디 앨턴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잘 들어. 우리는 운명 공동체야. 내가 살아야 너도 살아.”
“…….”
“지금 우정이다 뭐다 그딴 놀음 할 때가 아니라고. 도대체가 가족을 두고 왜 생판 남의 편을 드냔 말이야.”
케스퍼는 그렇게 말하며 시온의 기색을 살폈다.
시온은 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상태였다. 케스퍼는 그런 시온에게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온, 벨라디 앨턴이 내게 먼저 시작했어. 이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지. 그리고 너.”
케스퍼의 손가락이 시온의 명치를 쿡 찔렀다.
“내가 승자가 되어야만 너도 살 수 있는 거야. 우린 가족이니까. 같은 아글라니까.”
“…….”
“내 말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지금 당장 벨라디 앨턴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짜증 나지만, 제 동생과 벨라디 앨턴의 사이가 꽤나 돈독하니까.
그래도 뭐가 중요한지 모른 채, 철없게 행동하는 동생을 다그쳤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벨라디 앨턴에 관한 거라면 뭐든 좋아. 너도 한 번쯤은 아글라의 일원으로서 이 형의 도움이 돼라, 시온 아글라.”
케스퍼는 그렇게 시온을 내려다본 뒤, 방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시온은 입을 꾹 다물고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벨라디가 형을 노리고 있다고?’
순간, 벨라디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그 사건에…… 우리 형도 포함돼 있어?”
-아니. 네 형이 내 암살과 관련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어.
시온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벨라디의 암살을 사주한 게 형이었구나.’
형과 관련된 증거가 발견된 거야.
시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기 때문이다.
‘벨라디를 만나야겠어.’
케스퍼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벨라디와 만나기 위해 시온도 서둘러 빈방을 나섰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케스퍼의 말이 시온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신 차려! 네 가족은 나야! 벨라디 앨턴이 아니라!
그게 비수가 되어 시온의 죄책감을 계속 들쑤셨다.
***
“벨라디.”
예고도 하지 않고 찾아온 시온을 벨라디는 말없이 받아 줬다.
응접실 소파에 앉은 시온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벨라디는 그런 시온을 보며 속이 쓰렸다. 저 다정하고 상냥한 친구에게 자신이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을 예감했기에.
“솔직히 말해 줘.”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시온의 입술이 떨어졌다.
“형이…… 널 죽이려 한 거야?”
“맞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긍정의 대답.
그 순간, 시온은 벨라디의 두 눈이 금속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채, 그저 빛에 의해 반짝이는 무언가.
“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끝이 아니야. 케스퍼 아글라가 저지른 죄목을 나열하면 끝이 없어.”
“…….”
“말만으론 믿기 힘들 거 알아. 모든 증거를 다 보여 주지는 못해도, 이건 줄 수 있어.”
벨라디는 자연스러운 손길로 소파 옆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마법 자수정이었다.
“마탑주님의 가정사는 다 알고 있지?”
벨라디는 마법 자수정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이 자수정은 마탑주님이 복원한 증거야. 어째서 그분이 나를 도왔는지, 이걸 본 후에 알려 줄게.”
곧 자수정이 빛나며 위로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안에 담긴 영상이 재생되었다. 익숙한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영상이.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아, 일정량은 소공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로 나누어 두었습니다.
-잘했습니다, 후작. 그건 전부 연구 재료로 쓰일 예정이니 제일 좋은 상등품으로 준비해야 하는 거, 잊으면 안 됩니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위다나 왕국의 왕족들에게만 진상되는 것들로 마련했으니.
중간중간 끊기고 버벅거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알아보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시온은 꼭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멍하니 그 영상을 바라봤다.
곧 자수정이 빛을 잃었다. 벨라디는 그걸 시온의 앞에 두었다.
“너도 알겠지만, 저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너희 저택의 응접실이야.”
“아…….”
“상대는 패러그린 후작이고.”
“이걸 어떻게 얻은 거야?”
시온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벨라디는 그런 시온의 상태를 살피며, 설명을 이었다.
“마탑주님의 아들이 케스퍼 아글라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어. 이 영상은 그 과정에서 얻은 것 같아. 아마 너희 가문 하인을 하나 구워삶았겠지.”
물론 그 하인은 저 영상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스퍼 아글라에게 살해당했지만.
벨라디의 중얼거림에 시온은 현실감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형이 그럴 리 없어.”
“시온.”
“우리 형……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시온은 케스퍼를 떠올렸다. 비록 언제나 거리감이 느껴지던 형이지만 시온은 그를 존경했다.
남부 내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 가던 아글라 공작가를 단숨에 제국 최고의 자리로 이끌었으니까.
그가 아글라 공작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저 영상만으로 형이 마탑주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건 납득할 수 없어. 애초에 왜 형이 그들을 죽여? 마땅한 이유가 없잖아.”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벨라디를 바라봤다.
벨라디가 뭐라도 설명해 주길 바라는 마음 반,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반.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진 채.
벨라디는 그런 시온에게 냉정히 말했다.
“네 형이 저지른 죄 중 하나. 그건 패러그린 후작과 손을 잡고 제국에 마물의 부산물을 밀수입했다는 거야.”
“……뭐?”
시온의 두 눈이 요동쳤다.
“마물의 부산물 밀수입은 황태자 전하와 패러그린 후작가의 문제잖아. 형이 그 일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어.”
“그 증거를 내가 찾아낸 거지.”
벨라디는 슬쩍 시선을 내려 시온의 앞에 둔 자수정을 바라봤다.
“저 자수정에 담긴 대화를 다시 들어 보면, 그들이 지칭하는 게 뭔지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아…….”
“물론 더 뚜렷한 증거 역시 마련되어 있어. 시온, 케스퍼 아글라는 본인이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 해.”
이렇게 말하는 벨라디는, 자신의 친구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 이성적이고 냉정했다. 마치 이 장면을 계속 연습했던 것처럼.
“시온, 이것만큼은 믿어 줘. 케스퍼 아글라가 엮인 가장 큰 죄는 반역죄야.”
“…….”
“내가 가진 증거를 제출하면, 케스퍼 아글라는 물론이고 너희 가문 전체가 반역죄로 처형당할 거고. 난 그걸 원하지 않아.”
그 뒤로도 벨라디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시온의 귀에는 그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마냥 천진하게 있을 동안, 벨라디와 형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구나.’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걸까?
멍하니 자신이 생각에 잠겨 있던 시온은 벨라디의 마지막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케스퍼 아글라를 버려, 시온. 이게 네가 살 길이야.”
“형을 버리라고?”
시온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벨라디, 형은 내 가족이야.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생활해 온 가족. 그런데 어떻게 가족을 버릴 수 있어?”
홧김에 말을 내뱉은 시온은 곧바로 후회했다.
계속 차갑다고 느껴졌던 벨라디의 눈에 순간 슬픈 빛이 휘감긴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