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난 그의 혼란스러움을 이해했기에 굳이 재촉하지 않고, 남은 차로 목을 축이며 기다렸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모스틴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시온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날 부른 게 아니구나.”
모스틴의 갈색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모스틴 프레도. 너도 서부의 차기 주인으로서, 제국의 핵심 권력층에 속하지. 그러니 지금 사태에 관망자가 될 수 없어.”
“…….”
“그래서 미리 알리는 거야.”
“아오!”
모스틴이 인상을 확 찡그리며 자연스럽게 빗질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케스퍼 아글라는 도대체 왜 그딴 짓을 벌인 거야?! 이미 남부의 기반을 충분히 다져 놓았으면서!”
“글쎄…….”
‘당연히 회귀 전에는 케스퍼 아글라도 별 볼 일 없는 머저리였으니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케스퍼 아글라와 황태자가 성공시킨 업적은 전부, 회귀 전 킬리언이 일으킨 것들을 따라 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원래의 아글라는 점점 성장하는 남부 가문들을 통솔하지 못하며, 상당한 권위를 잃었었다.
‘케스퍼 아글라는 그런 자신의 가문을 어떻게 해서든 일으키려 발버둥 쳤었지.’
그 발버둥의 최종 결과가 결국 황태자와 함께 회귀하는 것이지만.
뭐, 케스퍼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그놈이 또다시 회귀를 하기 전에 거울을 찾아야 한다는 거니까.
난 흥분한 모스틴에게 침착히 말했다.
“모스틴, 내가 처음 했던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 줘.”
“처음 했던 질문?”
모스틴이 잠시 멈칫하다, 나와 눈을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가족의 죄를 파헤치기 위해 날 이용한다고…….”
“그래.”
“케스퍼 아글라에게 더 알아낼 게 있는 거야?”
“맞아. 그러기 위해서는 케스퍼의 동생인 시온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야.”
“…….”
“난 제국의 대귀족이자 또 한 명의 피해자로서, 케스퍼 아글라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어. 아무리 시온의 가족이라고 해도.”
난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시온이 반역죄로 엮이게 두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애써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렸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이 괴로웠다.
“난 화목한 가정에서 지내본 적이 없어 모르겠어. 모스틴, 넌 네 형제를 진창으로 끌어내린 친구를 용서할 수 있겠니?”
“벨라디.”
“이 일이 지나고, 시온이 내 얼굴을 다신 보지 않겠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어. 이성과 감정은 다르니까. 하지만, 시온이 끝까지 가족과 함께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벨라디 앨턴.”
“내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가족을 선택하면? 시온은 아글라 가문의 직계야. 가문의 반역죄가 성립하면 사형을 피할 수 없게 돼.”
말을 내뱉을수록 안에 웅크리던 불안이 점점 덩치를 부풀렸다.
난 입술을 잘근 깨물며, 초조히 중얼거렸다.
“이번 일이 오로지 ‘나’를 위한 일이었다면 이렇게 망설이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해야 시온을 구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어이, 이 친구야!”
퍽!
찌릿한 통증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모스틴이 아까의 복수를 하듯, 내 등을 호쾌하게 내려쳤기 때문이다.
“애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 이상한 곳에서 생각이 많네.”
“아프잖아, 모스틴 프레도.”
“벨라디, 넌 그렇게 시온을 못 믿겠어?”
분명 같이 불안해하던 모스틴이었는데, 어느새 그는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모스틴은 소파에 등을 푹 기대며 간단히 해답을 냈다.
“그렇게 시온의 반응이 예상 안 가면, 직접 물어보든가!”
“물어보라고?”
“그래! 아무리 천재적인 책략가라고 해도 결국 전부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야. 그렇게 혼자 굴만 파고 있을 거면 그냥 대놓고 말해 버려!”
“그러다 시온이 상처라도 받으면?”
“어차피 시온은 상처를 받게 되어 있어.”
모스틴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건 벨라디 네가 고민할 몫이 아니야. 시온의 몫이지. 시온이 건너야 할 시련까지 네가 해결하려 드는 건,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게 내 소견이다.”
“…….”
“벨라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넌 너무 시온을 유약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 시온이 케스퍼 아글라를 포기하지 못하고 같이 나락으로 빠지면 어떻게 하냐고?”
모스틴은 편한 자세로 차와 함께 나온 쿠키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분명 아글라 공작가는 가족끼리 똘똘 뭉친 아주 화목한 가정이지. 네 걱정도 충분히 공감해.”
그렇게 말한 모스틴은 진정하라는 듯 내게도 쿠키 하나를 건넸다. 난 조용히 그걸 받은 채, 모스틴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시온도 대책 없이 타인에게 휘둘릴 놈이 아니야. 아글라 공작가와 얽힌 수많은 이들을 무책임하게 버릴 위인은 더더욱 아니고.”
“시온에게 가족은 타인이 아니야.”
“그렇다면 이 일을 계기로 배우게 되겠지.”
쿠키가 입에 맞았는지 하나를 더 먹으며, 모스틴은 가볍게 말했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결국 나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남이라는 걸.”
물론,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사실 내 기준에선 모스틴의 가족 역시 화목한 편이었다.
‘그래서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는데.’
모스틴과 난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지냈고, 함께 성장한 친구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결국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게 ‘사람’이었다.
난 멋대로 시온을 재단했음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모스틴의 말이 맞아. 아마 시온에게도 내가 모르는 면모가 있겠지.’
그걸 생각하니 다양한 최악의 수로 뒤엉켰던 머리가 차츰차츰 정리가 됐다.
모스틴도 어느새 혼잣말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이제 시온에게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거야. 남부를 다스리는 대귀족의 일원으로서, 가문의 흥망을 결정지어야 할 결단을.”
“…….”
“개인적으로는 시온이 언제나 따뜻하고 상냥한 놈으로 남길 바랐는데. 세력 다툼, 계략, 권력 이런 것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먼 곳을 보며 그렇게 속삭인 모스틴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지낼 수 없는 게, 우리의 숙명 아니겠냐.”
모스틴이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 벨라디?”
그 웃음에 내 입가에도 짓궂은 호선이 그려졌다.
“옳은 말이야, 모스틴.”
난 가볍게 한숨을 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네 말대로 내가 복잡하게 생각했네. 이용이니 뭐니, 애초에 시온에게 솔직히 말하는 게 먼저인데.”
“어때, 이만하면 훌륭한 상담이었지?”
“그래. 고맙다, 모스틴.”
내 인사에 모스틴이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조금은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케스퍼 아글라와 황태자 전하를 반역죄로 넣으면. 곧바로 법을 개정할 생각이야?”
이미 편지로 내가 앨턴의 후계자가 된다고 그에게 전한 상태였다.
그러니 일이 어떻게 굴러갈지 궁금하기도 하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서부가 기꺼이 동의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앨턴의 새로운 소공작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모스틴의 대답에 난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며, 문득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시온도 함께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먼저 시온과의 이야기를 잘 풀어야겠지.
그 순간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
화려한 장식과 벽지로 장식된 아글라 공작가의 저택 내부. 그러나 흐르는 기류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살벌했다.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던 시온이 문득 창문을 바라봤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지 나뭇잎이 전부 떨어진 앙상한 정원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이맘때의 시온은 어머니와 함께 따뜻한 남부로 내려가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올해는 그러기 힘들 듯싶었다.
‘형은 괜찮은 걸까…….’
쌓아 올리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쉽다고 누가 그랬던가.
정상에서 빛나던 황태자가 한순간에 추락한 이후, 그의 오른팔이었던 케스퍼 역시 크게 휘청이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아글라 공작가의 분위기도 그야말로 살얼음판이 되었고.
케스퍼는 황태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저택에 붙어 있질 않았고, 아버지도 불안해하는 내부의 가신들을 잠재우느라 바빴다.
어머니도 연신 티 파티를 열어 외부의 인맥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런데 나 혼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멜도르와 함께한 마법 보석 연구. 그 이후로 당연히 엄청난 투자와 협업 제의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벨라디와 멜도르는 이에 관한 결정권을 시온에게 맡겼다. 투자처를 비롯한 모든 것을 전부 다.
덕분에 시온은 생전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본인 일에 온 정신을 쏟게 되었다.
그만큼 시온의 값어치도 수직으로 상승하게 됐다. 바로 지금처럼.
“오오, 시온 님! 좋은 오후입니다! 회의장에 가시는 겁니까?”
“아, 백작.”
“마침 저희도 그리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시온은 복도에서 마주친 가신 무리들과 속도를 맞췄다.
그들은 가는 길 내내, 혀에 기름칠을 하고 시온에게 아부했다.
“보석에 두 가지 마법을 넣는 것에 성공하다니.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업적 아닙니까.”
“맞습니다. 역시 제국 최고의 마법사 가문답습니다!”
그 말에 무리 중 한 남작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은밀히 속삭였다.
“크흠, 솔직히 차기 남부의 주인은 시온 님처럼 뛰어난 마법사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어색하게 웃던 시온이 멈칫했다.
남은 가신들은 그런 시온을 힐끔 관찰하다, 조심스럽게 남작의 말에 동조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물론, 무역업 역시 남부의 중요한 사업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마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긴 하니까요.”
“흠흠, 케스퍼 님도 훌륭한 마법사지만, 그럼에도 살짝 아쉽긴 합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불안한 면모가 많기도 하고요.”
그들의 말에 시온은 조용히 안경을 치켜올렸다.
‘몇 달 전만 해도 형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순식간에 태도를 뒤집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