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난 그대로 셰넌을 데리고 수도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네시아를 내보내려는데,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제 방으로 가 있을게요.”
네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줬다. 덕분에 내 방에는 셰넌과 나 그리고 타우딘만 남게 되었다.
난 소파에 편히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앉지.”
“내게 뭘 원하는 거야?”
하염없이 네시아가 사라진 방문만 바라보던 셰넌이 휙 고개를 돌렸다.
“빨리 끝내자. 난 네시아에게 가야 해.”
셰넌은 고개를 치켜들고 고고하게 말했다. 그런 셰넌이 가소로워,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순식간에 방 안이 긴장감으로 조여들었다.
셰넌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놀란 모양인지, 어깨를 움츠렸다.
난 그런 셰넌을 조롱하듯 말했다.
“인간과 어울려 지냈다면서, 상황 파악을 지지리도 못하네.”
“뭐?”
“지금 네가 그렇게 당당히 나올 형편이라고 생각해?”
“…….”
난 셰넌을 빤히 응시하며 명령했다.
“앉아, 셰넌.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게 하지 마.”
셰넌은 이런 내 태도에 사슴 같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며 힐끔 타우딘을 바라보니, 어느새 내 옆에 자리를 잡은 타우딘은 반항하지 말라는 듯, 셰넌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제야 셰넌은 스르륵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셰넌이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마 무작정 본인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고 목청을 높이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좋아, 빠르게 진도를 나가 볼까.’
난 셰넌에게 그동안 추측만 했던 질문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과 케스퍼 아글라가 기회의 눈물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린 게 맞나?”
“이름은 잘 몰라. 하지만 누군가가 시간을 되돌리긴 했으니, 그들인가 보지.”
“그럼 왜 나만 회귀 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지?”
내 질문에 셰넌은 그리 큰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시간을 되돌리면서 그들이 네 운명에 손을 댔으니까. 그러려면 수많은 정령의 보물을 재물로 바쳐야 했는데, 용케 그 수를 채운 모양이야.”
그 대답을 듣는 순간, 킬리언이 내게 보여 줬던 황제의 보물들이 떠올랐다.
그중 상당수는 감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정령의 보물들이었다.
‘황제가 가장 소중히 여긴 기회의 눈물도 멋대로 사용한 황태자야.’
그러니 다른 보물들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타우딘이 혀를 찼다.
“운명을 건드리는 건 정령들 사이에서도 금기에 해당한다. 그걸 셰넌 네가 한낱 인간에게 알려 준 거잖나.”
“한낱 인간이 아니야. 내 열 번째 계약자인 제인 티벤에게 말해 준 거니까. 그걸 후손들에게 알릴 줄은 몰랐지만.”
예상치 못한 명칭에 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티벤? 티벤 후작가의 그 티벤?”
“맞아, 데커딜 제국 동부에 있는 티벤 영지의 티벤. 그 아이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나만 바라봐 주었는데…….”
현 동부 연합의 수장이자, 킬리언의 외가.
티벤 후작가의 이름이 나오자, 하나하나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킬리언의 외가라는 건, 곧 퍼델 앨러만 데커딜의 외가라는 뜻도 돼.’
그리고 전 티벤 후작은 퍼델 앨러만 데커딜을 많이 아꼈다고 했지.
그러니 회귀하는 방법을 그에게 알려 줬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놈들은 왜 굳이 앨턴가의 첫째를 노린 거지? 고른다면 아버지도 있는데.”
회귀 전에 우리 북부는 킬리언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다.
네시아와 절친한 헤라 황녀가 킬리언의 손을 잡으면서, 아버지 역시 그에게로 마음을 굳히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앨턴을 건드리고 싶으면, 아버지에게 손을 뻗는 게 훨씬 수월했을 텐데.’
“내가 알려 준 방법에도 한계가 있거든.”
“방법이 아니라 금기겠지.”
“사족 붙이지 마, 타우딘. 하여튼 회귀를 일으키는 건 내 마법이야.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인간의 운명만 건드릴 수 있어.”
‘아…….’
그 말을 듣자 저절로 나머지 정황들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난 자연 친화력이 없지만, 다른 면에서 셰넌과 깊게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난 어머니와 혈연으로 이어져 있으니까.’
내가 한숨을 푹 쉬는 사이, 셰넌이 설명을 이었다.
“그들은 앨턴가의 힘을 축소하기 위해 후계자였던 첫째를 여자로 태어나게 했지. 참고로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바꾸는 건 엄청난 인과율이 소모되는 일이야. 그래서 벨라디 네 영혼이 빙의된 거고.”
“내 영혼이라…….”
“네가 선택된 것에도 다 이유가 있어. 애초에 넌 앨턴가의 첫째로 태어날 예정이었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자 옆에 있던 타우딘이 셰넌에게 경고했다.
“그 이상은 제약에 어긋나는 말이다, 셰넌. 잘못하면 네 존재가 소멸될 수 있어.”
“하지만 전부 말하지 않으면 네시아가 날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소멸되는 게 나아.”
“셰넌!”
타우딘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난 그런 호랑이를 힐끔 바라보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넌 이만 돌아가, 타우딘.”
“안 된다! 이 몸은 셰넌을 감시할 의무가 있어. 벨라디 너도 이제 그만해라. 이 정도면 네 의문을 해소하기에 충분하지 않나.”
그 말에 난 타우딘의 갈색 눈을 빤히 응시했다. 이번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듯, 타우딘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대치하고 있으니, 맞은편에 있던 셰넌도 덩달아 긴장하는 게 눈에 보였다.
“타우딘.”
난 천천히 내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타우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많이 놀랐는지 타우딘의 눈이 커졌다.
난 그런 타우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게는 아주 중요한 대답이야. 그러니 꼭 들어야겠어.”
내 말에 가만히 손길을 받던 타우딘이 얼굴을 조금 내밀며 말했다.
“계속 듣다가는 셰넌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후폭풍이 다가올 거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거야.”
“그렇다고 내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안 들을 수는 없어. 그리고 난 그런 후폭풍 따위 간단히 넘어서는 사람이야.”
“인간은 늘 그런 오만함으로 무너지지.”
“그래서, 내가 무너질 것 같아?”
내 질문에 타우딘은 입을 꾹 다물고 지그시 날 바라봤다. 그 시선에서 날 향한 타우딘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까이 다가온 정령에게 부드러이 속삭였다.
“날 믿어, 타우딘.”
“…….”
타우딘은 말없이 내 손길을 몇 번 더 받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마음대로 하거라. 나중에 후회해도 이 몸은 모른다.”
그렇게 투덜거린 타우딘이 곧 사라졌다.
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셰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저 말해 봐.”
“……타우딘을 제대로 길들였구나.”
“길들인 게 아니야. 타우딘이 멋대로 내게 정을 붙인 거지.”
난 정령과 딱히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물론, 나도 할 말은 없었다. 나 역시 이러나저러나 저 까다로운 정령이 내 영역 안에 자리 잡았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방금 같은 순간에 타우딘을 억지로 보냈을 텐데.’
킬리언에게 진작 소환한 정령을 돌려보내는 기술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걸 사용해서 타우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마 타우딘도 이런 내 심정을 알았기에, 순순히 물러난 게 아니었을까?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난 셰넌을 보며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마저 말해 봐. 내가 앨턴가의 첫째로 태어날 예정이었다니?”
“아……. 말 그대로야. 원래 네 영혼은 세계의 규율에 따라 정제된 후, 이곳에서 도헤미아의 아들로 태어났어.”
“세계의 규율이라…….”
“하지만 시간이 되돌아가면서 그들이 네 성별을 여자로 바꾸었고, 그에 따라 영혼이 정제되지 않았지.”
“내가 원래는 여자였으니까?”
“그렇게 보면 돼. 사실 구체적인 과정은 나도 몰라. 그건 자연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거든.”
“그렇다면 내가 회귀 전을 기억하는 건?”
“글쎄……. 운명을 바꾼 건 내 마법이 아니야. 그러니 아마 그에 따른 부작용이겠지.”
그제야 난 언제나 내 마음속 한구석에 깊이 박혀 있던 찝찝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내가 원작 속 장남의 자리를 빼앗은 건 아니구나.’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없애고 태어난 게 아니야. 그걸 깨닫자 묘하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어떻게 태어났든 내가 앨턴 공작가의 정당한 첫째라는 건 변하지 않았어.’
“잠깐, 이 사실을 어머니도 알고 있었나?”
“아니. 하지만 도헤미아에게 네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긴 했어. 그래서 기억을 지운 거고.”
“쓸데없는 소리를.”
“그, 그 상태로 자랐다면 넌 분명 미치광이가 되었을걸? 그때의 네 육체는 미완성 단계였단 말이야.”
그건 사실이기에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그 대신 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넌 왜 나에게 직접 마법을 걸지 않고, 어머니를 거치며 일을 번거롭게 만든 거지?”
“그건…… 도헤미아가 원했으니까.”
“어머니가?”
“도헤미아는 자신의 첫 번째 아이인 널 정말로 사랑했어. 그래서 너와 관련된 모든 걸 본인이 직접 하고 싶어 했지.”
“비효율적이군.”
난 작게 혀를 찼다.
‘그따위 사랑, 아직 아들이 없으니까 나에게 쏟아부은 거면서.’
그래도 어머니의 그 극진한 사랑이 내게는 천운이었다. 덕분에 그녀가 죽고 나서 전생을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
“전생의 기억 외에 내게 따로 손을 댄 건 없겠지?”
“당연하지. 애초에 도헤미아가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 마법을 펼쳤는데. 넌 네 어머니에게 정말로 감사해야,”
“닥쳐.”
난 이제껏 누그러트렸던 모든 분노를 폭발시키며 셰넌을 노려봤다.
내 사나운 기세에 주절주절 떠들던 셰넌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런 정령을 보며 난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아 봐. 그럼 네가 그토록 원하는 소멸, 내가 몸소 이루어 줄 테니까.”
내 말에 셰넌이 크게 움찔거리더니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 미안. 앞의 말은 취소할게. 내 생각이 짧았어.”
사과를 듣고 나서야, 난 쥐고 있던 분위기를 풀었다. 그러곤 소파 손잡이를 검지로 툭툭 쳤다.
‘내가 알고 싶어 했던 근본적인 의문은 다 풀렸으니.’
이제 셰넌을 또 다른 질문 지옥으로 보내 볼까. 바로, 본인의 자아에 의문을 가진 네시아에게 말이야.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었기에, 난 흔쾌히 저 정령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럼 이제 가 봐.”
“의문은 다 풀린 거지?”
“그래.”
내 대답에 셰넌이 서둘러 네시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벨라디, 기회의 눈물이 두 개인 건 알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