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65화 (166/197)

165.

네시아도 활짝 웃으며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를 돌아다녔다.

“와아-! 눈이다!”

강아지처럼 다다다 뛰어다니는 네시아를 따라 뽀득뽀득 발자국이 생겨났다.

타우딘은 그런 네시아를 부르며 말했다.

“이 몸이 훈련 중 알려 준 셰넌의 소환진과 계약 수식은 잘 기억나나?”

“응! 다 외웠어!”

“좋다, 그럼 어서 셰넌을 소환하자. 이 몸, 추운 곳은 딱 질색이다.”

“알겠어!”

네시아가 열심히 끄덕인 후,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언제 주웠는지, 굵직한 나뭇가지로 눈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나와 타우딘은 그런 네시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몇 걸음 물러났다.

“저렇게 눈 위에 그려도 되는 거야?”

“그럼! 셰넌의 소환진은 다른 정령들보다 간단한 편이니 문제없다. 오히려 눈 위에 직접적으로 그려 넣으면, 더 강한 친화력을 끌어올릴 수 있지.”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부디 이곳까지 이동한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내가 타우딘을 소환할 때는 정령석이 있어 굳이 장소를 이동할 필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령석이 없으니, 난 몸소 네시아를 북부의 숲으로 데리고 와야 했다.

‘원작에 셰넌이 잠든 둥지의 위치가 자세히 나와서 다행이었지.’

덕분에 수월하게 그 둥지의 근처로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내 중얼거림에 타우딘이 호언장담을 했다.

“걱정 마라, 이 몸이 확실히 굴렸으니까! 소환과 계약 정도는 이제 가뿐하다!”

그러는 사이, 네시아는 도도도 바쁘게 움직이며 거대한 소환진을 완성한 상태였다.

“그럼 소환할게요!”

네시아가 그렇게 외치며 힐끔 날 바라봤다.

내가 그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니, 용기를 얻었는지 네시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곧 아이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환진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타우딘이 그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아주 풍만한 자연 친화력이로군. 과연 셰넌이 만든 아이야.”

그렇게 말하며 타우딘은 슬쩍슬쩍 내게 눈짓을 보냈다.

“이런 순간은 아주 보기 드물지. 어때, 벨라디. 아무리 너라도 뭔가 느껴지지 않나?”

당연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부정해서 일을 귀찮게 만들기는 싫었으므로,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물론, 속으로는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빴지만.

‘셰넌이 소환되면 가장 먼저 네시아를 내가 붙잡고 있어야 해.’

그래야 본인의 계약자가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깨닫고, 내게 꼼짝 못 할 테니까.

이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타우딘은 살짝 감동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이렇게 서로 동상이몽을 꿈꾸는 동안, 네시아가 끄적인 계약 수식이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그러곤 내가 타우딘을 소환했던 것처럼 글자가 커지며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네시아가 소리쳤다.

“셰넌!”

그 외침이 끝나자마자, 하얀 덩어리가 사람의 모양으로 변해 갔다. 그러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네시아…….”

그 말과 함께 발끝에서부터 완전한 형태가 생기며 새하얀 옷과 긴 백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성별을 알 수 없는 묘한 인상의 정령이 둥둥 땅 위에 떠 있었다.

정령을 본 네시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셰넌!”

네시아가 셰넌의 품에 뛰어들었다. 정령 역시 자신에게 안겨 드는 아이를 소중하게 품었다.

“네시아, 드디어 날 소환해 줬구나.”

“너무 보고 싶었어.”

“귀여운 나의 네시아.”

중성적인 목소리의 셰넌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셰넌의 커다란 눈은 흰자가 없이 검은 동공만 있었다.

피부와 머리, 옷까지 하얘서 그 모습이 꼭 흰 사슴처럼 보였다.

“이렇게 빠르게 내 수식을 완성하다니. 너무 기쁘다.”

“셰넌, 나랑 계약해 줄 거지?”

“물론이야, 네시아. 난 계속 너와의 계약을 꿈꿨는걸.”

그 말과 함께 셰넌이 네시아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러자 아이의 이마에 또렷한 은색의 소환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셰넌과 네시아의 계약이 무사히 완료되었다는 표식이었다.

난 계약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즉시, 걸음을 옮겨 그쪽으로 다가갔다.

“고생했어, 네시아.”

내 목소리가 설원의 잔잔한 풍경을 뚫고 선명하게 울렸다.

그러자 셰넌과의 재회를 만끽하던 네시아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언니!”

네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소개했다.

“언니! 여기는 제 친구인 셰넌이예요! 셰넌! 우리 언니야, 벨라디 앨턴!”

“아아, 네가 도헤미아의 딸이로구나.”

셰넌이 네시아를 안아 들고 내게 다가왔다. 나와 비슷한 키의 정령은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헤미아의 흔적이 전혀 없는……. 도헤미아의 딸.”

‘그래서 참 다행이지.’

내게 어머니의 흔적이 있었다면, 거울을 볼 때마다 원망했을 테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버지를 닮은 것이 나았다.

난 셰넌에게 싱긋 미소 지으며 네시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내 행동에 네시아가 활짝 웃다가,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저…… 이건 어리광처럼 보일 것 같은데.”

“오늘은 허락할게.”

그러자 네시아의 표정이 밝아지며 단숨에 안겨 들었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는 듯, 내 얼굴을 빤히 관찰하던 셰넌은 허무하게 네시아를 빼앗겼고. 그게 저 정령의 실책이었다.

“언니이-.”

네시아가 내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난 아이가 뒤쪽을 바라보도록 한 손으로 고쳐 안으며, 셰넌을 응시했다. 검은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자 셰넌이 흠칫 몸을 굳혔다.

“어, 어째서 소름이……?”

난 그런 셰넌에게 말했다.

“너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사고들. 그 중심에 전부 네가 있었거든.”

“그게 무슨…….”

“기회의 눈물.”

내 말에 셰넌이 움찔거렸다.

“네가 만든 게 맞지?”

난 그렇게 말하며 힐끔 타우딘에게 눈짓을 보냈다.

[타우딘, 네시아를 데리고 자리 좀 피해 줘.]

[지금?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지?]

[흐음, 이 아이를 인질로 셰넌을 협박할 생각?]

하지만 그걸 굳이 네시아 앞에서 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 안긴 네시아를 슬쩍 내려다보는데, 그사이 내 눈빛을 읽었는지 셰넌이 인상을 찡그렸다.

“네시아에게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 말과 동시에 우리를 주위로 거대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그걸 본 타우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감히 누구 계약자에게 겁박하는 거냐, 셰넌!”

“도헤미아의 딸이라지만 믿을 수 없어! 당장 네시아를 이리 줘!”

“눈보라를 멈춰라! 그러지 않으면 이 몸도 가만 있지 않겠다!”

그렇게 말한 타우딘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다. 순식간에 두 정령이 대치했다.

난 작게 혀를 차며 조용히 정령검을 소환했다.

‘정령검으로 정령도 벨 수 있던가?’

당연히 셰넌을 소멸시킬 정도의 위력은 낼 수 없겠다만, 위협만으로도 충분한데.

솔직히 네시아의 눈앞에서 셰넌을 상대하는 게 좀 찝찝했으나, 저 정령이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 하는 수 없었다.

네시아를 땅에 내려놓은 난 검을 쥔 채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셰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기는 도대체 왜 꺼낸 거지!”

그때였다.

“언니한테 화내지 마!”

네시아가 그렇게 소리치며 셰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언니 질문에 대답해 줘, 셰넌!”

“네, 네시아…….”

“분명 셰넌이 언니한테 잘못한 게 있는 거지?!”

혹여 네시아가 다칠까, 셰넌이 급하게 눈보라를 멈췄다.

“아니야, 네시아. 난 도헤미아의 딸에게 어떤 짓도 한 적 없어.”

“거짓말! 셰넌은 나한테도 제대로 안 알려 줬잖아!”

어느새 타우딘 옆에 선 네시아가 셰넌을 올려다봤다.

“나한테 왜 공작 부인의 기억이 있는지, 내 진짜 부모님이 누군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그러고 앨턴 공작가로 날 보냈잖아!”

“그건…….”

셰넌이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네시아는 그런 셰넌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벨라디 언니는 너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만 했는데, 왜 화부터 내는 거야?”

“네시아. 도헤미아의 딸이 먼저 너에게 불순한 눈빛을 보냈어.”

“언니가 그럴 리 없잖아!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건 다 셰넌 때문이야!”

네시아는 아주 당당하게 선언했다.

“벨라디 언니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언니가 얼마나 이성적이고 정의로운데!”

……오호라, 날 아주 정확히 판단했군.

난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나저나 네시아가 먼저 저런 말을 꺼낼 줄 몰랐는데.’

저 아이와 셰넌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내 편을 들기 위해 셰넌과 맞서다니.

‘네시아가 어머니와 똑같이 자랐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흥미로움에 씰룩 입꼬리를 올리는 사이, 큰 충격을 받은 셰넌이 비틀거렸다.

“네시아… 내 아이…….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런 모진 말을…….”

그런 셰넌을 보던 네시아가 휙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도도도 이쪽으로 다가와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셰넌은 감춘 게 너무 많아. 그걸 다 말해 주기 전까지 얼굴도 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네시아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했다.

네시아도 나름대로 셰넌을 향한 서러움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셰넌이 간절하게 네시아를 불렀다.

“네시아, 내가 잘못했어. 그런 말 하지 말아 줘. 너마저 그러면 나는…….”

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흠, 이런 상황이면 입 아프게 말을 많이 할 필요 없겠는데?’

네시아가 저렇게 나와 주니 상황이 내게 아주 유리해졌는걸?

난 잘했다는 의미로 네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와 대화할 마음이 들었나?”

“도헤미아의 딸아. 네시아를 내게 보내 줘. 그 아이와 할 말이 있어.”

난 질척이는 셰넌에게 냉정히 말했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계속 쓸데없는 호칭을 언급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정령검을 다시 움켜잡으니, 셰넌이 서둘러 말했다.

“베, 벨라디. 네 이름 벨라디 맞지?”

난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정령검을 집어넣었다.

“그럼 장소를 옮겨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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