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난 혼란스러워하는 마법사들을 빠르게 휘몰아쳤다.
“솔직히 말하는 자만 살려 주겠다.”
마법사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내게로 모였다.
“케스퍼 아글라가 너희들에게 마물의 부산물을 제공했다는 증거, 한 놈은 가지고 있겠지.”
이 배신자들도 완전한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은 내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려 어버버거리고 있지만, 오랫동안 마탑주와 세간을 속인 범죄자들이니까.
그러니 케스퍼 아글라의 약점이 될 무언가를 쥐고 있을 게 확실했다.
“기회를 줄게, 그걸 내게 넘겨.”
내 제안이 끝나자마자, 마법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버럭 외쳤다.
“그딴 협박에 우리가 흔들릴 줄 아나! 함께 뜻을 모으고 몇 년을,”
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그 노인에게 살기를 뿌렸다.
그러자 내 위압감을 이기지 못한 노인이 쿵 테이블에 엎어진 채 기절하고 말았다.
“자, 장로님!”
“이런, 노인이 견디기에는 향초가 너무 강했나?”
내 태연한 말에 마탑주가 혀를 찼다.
“그렇다면 곧 몸이 녹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기 무섭게, 찻물을 뒤집어썼던 마법사가 태도를 바꾸었다.
“……제가! 제가 드리겠습니다!”
“이봐! 자네 제정신이야?!”
“어차피 우리는 이제 끝이라고!”
그놈은 다른 마법사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히 물었다.
“케스퍼 아글라가 마물의 부산물을 제공했다는 증거만 내밀면, 그 치유제라는 걸 제게도 주는 거 맞지요?!”
“네가 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케스퍼 아글라가 당신의 암살을 사주했던 때의 녹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녹음이라…….”
“그거면 확실하게 당신의 암살 배후로 케스퍼 아글라를 지목할 수 있을 겁니다!”
난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그럼 남은 놈들은 전부 실험실에 가두면 되겠어.”
“자, 잠깐! 실험실이라니요?!”
“이, 인체 실험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이 배신자! 지만 살겠다고 그런 녹음을 만들어 놔?!”
그 말을 시작으로 배신자들은 앞다투어 정보를 판 마법사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 마법사는 당당했다.
“그 사냥 대회 건으로 내 제자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나! 그러니 난 여기서 죽을 수 없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말장난하지 마라, 이 비겁한 새끼!”
난 그런 놈들을 보며 조소를 숨길 수 없었다.
‘잘들 놀기는.’
참고로, 어차피 이놈들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었다. 아니, 차라리 곱게 죽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지.
내가 절벽을 오르며 다짐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저들에게 철저한 복수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남은 일은 맡겨도 되겠지요?”
난 마탑주를 보며 말했다.
그는 한참이나 언성을 높이며 서로를 탓하는 제 최측근들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는 믿었던 자들을 향한 배신감과 분노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사실 내가 직접 저 괘씸한 놈들을 처단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흔쾌히 마탑주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아마 그가 나보다 더 잘근잘근 저 마법사들을 도륙 낼 테니 말이다.
“그럼 놈들에게 얻을 건 다 얻은 것 같으니.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예, 벨라디 님. 케스퍼 아글라에 대한 증거는 조속히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탑주의 손에서 불길한 마력이 일렁였다.
난 상황 파악을 아직도 못 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힐끔 바라보다, 텔레포트로 그 방을 빠져나왔다.
***
저택에 돌아오니, 늦은 밤이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하녀가 미리 준비해 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침대 한가운데에 무언가 커다란 것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난 그걸 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러자 검은 털 뭉치처럼 웅크리고 있던 타우딘이 휙 고개를 들고는 날 노려봤다.
“이 몸의 자연 친화력을 좋다고 펑펑 써 댔군.”
“아~, 그랬지.”
난 타우딘을 보며 싱긋 웃었다.
“덕분에 유용하게 잘 썼어. 고마워.”
“이 몸은 갑작스럽게 친화력이 빠져나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런 태평한 반응이라니!”
타우딘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난 그런 흑호를 보며 후후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타우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단 말이지.’
정령이 계약자와 공유할 수 있는 고유의 힘.
아이닝의 매혹이나, 셰넌의 향수처럼 타우딘도 재미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도대체 몇 명에게 최면을 건 것이냐!”
상대방의 동요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최면을 말이다.
난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진 않고. 가볍게 다섯?”
“다섯?! 내 자연 친화력을 쓰면서 다섯에게 동시에 최면을 걸었다고?”
“내 친화력을 쓰는 건 아니니까.”
“이 몸! 역시 계약자를 잘못 골랐구나!”
타우딘이 분한 듯 침대에서 버둥거렸다. 난 그런 호랑이를 발로 쑤욱 밀어 내고 침대에 누웠다.
‘그 배신자들도 어지간히 동요하긴 했나 봐.’
생각해 봐라.
내가 마물의 부산물로 그놈들을 세뇌했다면, 아마 놈들은 한순간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법에 일가견 있는 케스퍼 아글라도 수많은 인체 실험을 통해 겨우 자연스러운 세뇌를 완성시켰는데, 내가 어떻게 단기간에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내가 등장한 것부터, 마물의 부산물을 먹였다며 사기를 친 것까지. 여러 일들이 동시에 벌어져 마법사들은 순간 정상적인 판단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 찰나 덕분에 타우딘의 최면이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으니,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거기다 케스퍼를 잡을 증거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
마음속의 짐 하나가 덜어진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때, 꿍얼거리던 타우딘이 진지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벨라디.”
“왜.”
“곧 셰넌을 소환할 예정이다.”
그 말에 난 감았던 눈을 뜨고 타우딘을 바라봤다. 호랑이는 내 옆에 엎드린 채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네시아의 훈련은 성공적으로 끝났니?”
“당연하지.”
“언제 소환할 생각인데?”
“내일이다.”
“빨라서 좋군.”
케스퍼 아글라를 체포하기 전에, 셰넌과의 계약이 마무리되는 것까지는 직접 확인해야지.
‘개인적으로 눈의 정령에게 받을 빚이 아주 두둑해서 말이야.’
난 새로 들어올 패를 어떻게 굴릴까 생각하며, 씨익 미소 지었다.
***
“언니!”
아이를 보자마자, 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찰랑이던 긴 은발이 숏컷으로 싹둑 잘려 있었기 때문이다.
“네시아, 너 머리가…….”
내 말에 네시아가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 어제 타우딘이랑 마지막 훈련을 하다가 머리카락만 마물에게 먹혔거든요!”
“마물에게 먹혔다고?”
“제 몸에 있는 정령의 기운을 극대화해서 기척을 없애는 훈련이었는데, 머리카락까지 감추는 걸 실패해서…….”
네시아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타우딘이 두툼한 앞발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괜찮다. 결국 너 혼자 그 마물을 쓰러트리며 복수에 성공했으니. 과연, 이 몸의 제자야.”
“헤헤, 고마워 타우딘.”
네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머리가 막 잘렸을 때는 상태가 엉망이었는데, 밤에 제 하녀가 정리해 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가볍고 시원해요!”
그런 네시아의 행동은 귀족의 예법과 많이 어긋났으나, 저 모습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난 가만히 짧아진 머리를 관찰하다 말했다.
“원한다면 마법을 써서 머리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
“응? 괜찮아요! 머리가 짧으니까 씻을 때 간편해서 마음에 들어요!”
그 말에 난 조금 충격을 받았다.
‘확실히 네시아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구나.’
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아이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다니. 그런 건 이제껏 그 누구도 선보이지 않은 파격적인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평민들의 한해서 단발 정도가 허용되는 길이일까.’
혹여 피치 못할 사고로 그보다 더 짧게 잘라야 하면, 모자나 두건으로 머리를 꽁꽁 감추었다.
그만큼 목이 훤히 드러나는 머리는 이례적이었으나, 아이는 자신의 짧아진 머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갛게 웃었다.
그 모습이 본인의 긴 머리를 자랑스러워하던 어머니와 크게 대조되며, 어쩐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만약 네시아를 귀족 사회로 다시 내보내면…… 저런 당당함을 잃어버리겠지.’
그곳은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파격을 배척하는 곳이니까.
거기다 네시아는 타인과 주변 환경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 편이고.
……난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네시아를 굳이 수도에 둘 필요 없겠어.’
어디든 여기보다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네시아가 점점 어머니에게서 벗어난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 어머니의 흔적을 하나라도 더 지울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쁠 것 없는 그림이었다.
난 손을 뻗어 네시아의 짧아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어.”
손 아래로 부드러운 은발이 사라락 흩어졌다. 내 다정한 말에 네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저, 언니처럼 훌륭한 정령사가 되기 위해서 더 노력할 거예요!”
그 말에 타우딘이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
“훌륭한 정령사는 무슨! 이 몸이 훌륭한 정령인 거지.”
네시아는 그런 타우딘의 투덜거림이 들리지 않는지, 내게 시선을 고정하며 눈을 빛냈다.
나 역시 그런 타우딘을 가볍게 무시하며 네시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셰넌도 훌륭히 소환할 수 있겠지?”
“네! 전 준비됐어요!”
그렇게 외치는 네시아는 위축되었던 지난번의 모습을 완전히 떨친 상태였다.
아무래도 타우딘과 훈련을 하며, 자연스럽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내가 일일이 봐주지 않아도 알아서 시련을 극복하고, 알아서 성장하니.
일이 척척 진행되어,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럼 가자.”
난 킬리언에게 빌린 다이아몬드의 텔레포트를 이용해 미리 선정한 위치로 이동했다.
발밑에 마법진이 생기며, 우리는 눈이 가득 쌓여 있는 설원에 도착했다.
순식간에 찬 공기가 폐부에 밀려 들어왔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타우딘이 두리번거리며 설원을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