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그러니 킬리언이 다스릴 제국은 분명 평화로운 나라가 되겠지.
‘그의 가능성을 내 욕심으로 처음부터 닫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말을 아끼는데, 킬리언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따듯한 체온에 난 시선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킬리언의 맑은 회색 눈이 온전히 나만 담고 있었다.
“분명 제가 몇 년 만에 황위를 헤라에게 넘기면, 엄청난 반대가 따르겠죠. 그 반대를 모두 물리치려면 저에게도 큰 결함이 생겨야 할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무슨 수로 당신에게 결함을 만들죠?”
저렇게 멀쩡한 사람에게 어떻게?
못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킬리언의 두 볼이 발그랗게 물들여졌다.
“그 결함에…… 당신이 엮여도 괜찮을까요?”
“…….”
날 잡은 킬리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걸 느끼고 나서야 난 저 질문에 킬리언의 사심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역사가 있었어.’
데커딜 제국의 황제 중 가장 최악으로 꼽히는 이글라스 3세.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제국의 금고를 텅텅 비운 머저리로 유명했다.
저 머저리의 집권을 거치며, 데커딜 제국은 사랑에 눈이 먼 황제를 멸시하는 풍조가 자랐고.
‘그래서 현 황제도 헤라 황녀의 모친과 결혼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어.’
……그렇단 말이지?
킬리언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전부 파악한 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요. 재밌겠네요.”
귀족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즐거운데?
이런 내 대답에 킬리언의 얼굴이 환해졌다. 난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려면 일단 당신의 복수를 완성시켜야겠어요.”
내일 마탑에서 벌어질 일이 몹시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
다음 날도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간단한 훈련으로 몸을 푼 후,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식사를 하는 그런 일과.
그렇게 늦은 밤이 찾아오니, 끼고 있던 루비 반지가 빛나며 마탑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난 킬리언의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마탑주가 알려 준 위치값으로 이동했다.
잠깐 빛이 반짝이더니 눈앞에 낯선 환경이 펼쳐졌다.
방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원형 테이블과 둘러앉은 다섯 명의 사람들.
모두 마탑의 상징인 검은 로브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등장하자 마법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마탑주님! 분명 아글라 소공작이 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벨라디 앨턴이 등장한 거죠?!”
“저희를 속인 겁니까?!”
난 그 소음 사이로 빠르게 테이블 위를 살폈다.
놈들 앞에는 반쯤 남은 차가 있었고, 방 구석구석에 작은 향초들이 켜져 있었다.
‘내가 말한 대로 잘 준비해 줬군.’
난 마탑주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모두 앉아.”
그 순간이었다.
내 한마디에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치려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의자에 주저앉았다. 말 잘 듣는 짐승처럼.
“무, 무슨!”
“내 다리가 저절로?”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난 마지막으로 소리친 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남은 찻물을 머리 위로 부었다.
쪼르르-.
붉은 찻물이 마법사의 머리와 얼굴을 적셨다.
“앗, 뜨거!”
“시끄러우니 입 다물어.”
“웁!”
내 명령에 입에 지퍼라도 채워진 듯, 마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걸 본 다른 마법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난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기 전에 먼저 명령했다.
“너희들 모두 내 허락 없이는 움직이거나 입을 열지 마.”
“으읍!”
“끄으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사들은 전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난 그걸 보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다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작은 방 안에 울렸다.
“너희는 무서운 것도 없니?”
내 한마디에 마법사들이 의문을 가득 품은 얼굴로 내게 집중했다.
난 그런 마법사들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상냥히 미소 지었다.
“마물의 부산물이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알면서, 이렇게 순진하게 굴다니……. 그래, 차 맛은 좋았어?”
그러자 마법사들이 온 얼굴로 경악을 표현해 냈다.
그들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앞의 차를 빤히 노려보다 휙휙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들의 눈에 타들어 가고 있는 향초가 들어온 모양이다.
마법사들의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걸 보며 난 마음껏 마법사들을 비웃어 줬다.
“날 죽이려 할 땐 신나서 부산물을 사용했을 텐데……. 어때? 그 효과를 본인들이 직접 체험하니까?”
동시에 5명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꽂혔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으나,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머저리라서 상황 파악도 잘 안되나? 모두 고개 박아.”
콰앙!
날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마법사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군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난 걸음을 옮겨 마탑주에게 다가갔다.
“남은 향초는요?”
“여기 있습니다, 벨라디 님.”
난 그걸 받아 들며 말했다.
“세뇌할 수 있는 비율을 케스퍼 아글라만 완성시켰다고 믿으면 안 되지.”
내 말에 엎어져 있던 마법사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우스운 모습을 보며 난 옆에 있는 마탑주에게 물었다.
“배신자는 저들이 끝인가요?”
“예, 벨라디 님. 놈들의 연구실을 급습해 숨겨 둔 마물의 부산물과 비밀 일지도 확보했습니다.”
마탑주의 마지막 말에 배신자 중 일부가 흠칫 어깨를 좁혔다.
난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증거까지 나왔으니, 저들도 끝이로군요.”
난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갑자기 절벽을 타게 된 그 순간. 날 죽이려던 마탑 놈들을 반드시 찾아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그 원흉들이 지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내가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장면을 위해 내가 이제껏 함정을 판 거지.’
시온을 통해 황태자와 마탑주에게 연결 고리가 있음을 어필하자, 예상대로 두 놈은 혼란에 빠진 마법사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애초에 황후와 관련된 기사들도 수습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이 배신자들은, 자연스럽게 마탑주에게 모여들었다.
그동안 마탑주가 계속해서 황태자와 연이 있는 척, 그리고 마물의 부산물에 관심이 생긴 척 어필을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놈들이 황태자와 케스퍼에게 붙은 이유도 마물의 부산물을 노린 거니까.’
이건 조금만 눈여겨보면 충분히 유추 가능한 가설이었다.
일이 벌어진 타이밍이라든가, 암살의 수법이라든가.
거기다 마탑주의 말에 따르면, 지금 모여든 놈들은 옛날부터 연구 재료에 제한을 두면 안 된다고 주장한 놈들이었다.
‘아마 본인들 연구에 부산물을 쓰고 싶었겠지.’
마탑주가 그걸 금지하니 불만이 생긴 것이고.
그래서 마탑주를 배신했는데, 믿고 있던 뒷배가 흔들리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런 때에 돌아온 마탑주가 부산물에 호의를 보였으니, 놈들은 정말 불빛을 찾아드는 나방처럼 스스로 날아온 것이다.
‘지들이 그에게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새까맣게 잊고 말이야.’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는 법인데…….
혀를 차는 사이, 마탑주가 내게 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건 저놈들의 연구 일지 중 하나입니다. 마물의 부산물을 이용한 세뇌의 비율이 소상히 적혀 있습니다.”
난 그걸 받아 들고 빠르게 훑었다.
가만 보니, 일지 곳곳에 비율에 대한 조언들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래, 케스퍼 아글라가 마물의 부산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이렇게 도움을 줬나 보구나?”
마법사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조금 전에 내가 차를 쏟아부은 놈을 지목했다.
“거기, 너. 일어나.”
내 말에 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에는 날 향한 분노와 웅크린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며 말했다.
“네가 대답해. 케스퍼 아글라가 네놈들한테 세뇌에 대해 가르쳤나?”
그러자 그 마법사의 입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런 대답도 하고 싶지 않지만, 내 명령을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모양이지?
잠시 미약한 반항 끝에, 결국 마법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존댓말.”
“……그렇…습니다.”
“그럼 세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잘 알겠네?”
“맞습니다.”
“지금 너희들의 무슨 상태인지도 가늠이 가겠지?”
마지막 물음에 마법사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저건 대답하기 싫다기보다는,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다는 제스처였다.
‘당연하겠지. 마물의 부산물을 남에게는 먹였어도, 본인들이 먹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난 아까 마탑주에게 받은 향초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향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들 고개 들어. 넌 다시 앉고.”
찻물로 로브가 젖어 있던 마법사가 자리에 앉고, 엎어져 있던 다른 마법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날 주시했다.
“지금 너희는 세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상태야.”
그리고 향초 하나를 가리켰다.
“이 향초의 향을 조금만 더 맡으면, 지금처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겠지.”
“거짓말!”
찻물을 뒤집어쓴 마법사가 소리쳤다.
“그럼 왜 당신들은 그렇게 무사한 겁니까? 향을 맡고 있는 건 똑같은데!”
“우리는 이미 치유제를 먹었거든.”
“……치, 치유제라고요?”
“아~, 케스퍼 아글라는 아직 세뇌의 치유제까지는 완성을 못 했나?”
내 말에 마탑주가 옆에서 거들었다.
“저희보다 연구를 훨씬 이전에 시작한 걸로 아는데, 느리기도 하군요.”
“하긴, 원래 범재는 천재를 따라갈 수 없는 노릇이니.”
우리가 대화를 나눌수록 마법사들의 얼굴에 점점 공포감이 더해 갔다.
세뇌를 연구했던 이들이니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지금, 내 말 한마디로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겠지.’
아마 정신이 없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도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