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깊은 밤이라 방은 아직 어둡기만 했다.
“으으…….”
극도의 불안을 느낀 아이가 숨을 가쁘게 쉬며 다급히 손을 더듬었다.
곧 마법 전등의 줄이 잡혔고, 아이는 망설임 없이 그걸 잡아당겼다.
달칵-.
방이 환해졌다. 밝은 빛 아래에서 네시아는 한참 동안 자기 어깨를 비비며 주변을 살펴야 했다.
이곳은 앨턴 공작가의 2층, 벨라디가 넘겨준 자기 방이었다. 온몸이 굳어질 정도로 춥고 허름한 나무판자 집이 아니라.
그제야 네시아는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래, 꿈이야……. 전부 꿈…….’
비록 버그만 후작가에서의 티타임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그 낡은 판잣집에서의 일은 네시아의 꿈일 뿐이다.
아이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창가에 비친 푸른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네시아는 서둘러 그 눈물을 닦아 냈다.
“난 아무렇지 않아. 그건 내 기억이 아니야.”
애써 그리 중얼거렸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추위가 아직도 몸을 휘감은 것 같았다. 네시아는 몸을 잘게 떨며 창가에서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네시아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으응…….”
곧 문이 열리고 잠옷을 입은 네시아의 하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창가 근처에서 서성이는 네시아를 보고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불이 켜져서 왔어요. 또 악몽을 꾸셨나요?”
하녀는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있던 담요를 들고 네시아의 몸을 감싸 주었다. 아이가 악몽을 꾸고 나면 항상 추위에 괴로워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네시아는 하녀가 감싸 준 담요를 꼭 끌어안고는 애써 웃었다.
“별거 아니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잠을 설치네. 미안해.”
안 그래도 한 달 전부터 그녀는 네시아의 방 옆에 붙어 있는 응접실에서 잠을 청했다.
네시아가 계속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 걱정하며 내린 조치였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전 작은아가씨의 하녀이니, 언제나 아가씨의 상태를 살피는 게 일인걸요.”
하녀는 네시아를 이끌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데려갔다. 자신을 이끄는 다정한 손에 기대, 네시아가 침대에 누웠다.
“아직 일어나시기에는 시간이 많이 일러요. 주무시기 전까지 곁에 있을까요?”
“아니야. 나 혼자 있고 싶어.”
“알겠어요, 아가씨. 방 불은 끄지 않을게요.”
“응…….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일, 말하지 않았지? 공작님이나, 벨라디 언니나.”
네시아의 염려에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가씨. 제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데요! 주치의님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그 말에 네시아가 작게 한숨을 쉬며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렸다.
“고마워. 모두 바쁜데 굳이 나까지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아가씨…….”
하녀가 안쓰러운 얼굴로 네시아를 바라보다 침대 위 협탁에 곱게 접어 두었던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아무도 아가씨를 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시면 너무 속상해요.”
네시아는 그 말에 답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조금 내렸다.
소심한 아이의 반응에 하녀는 마음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모두 얼마 전에 갔던 버그만 후작 영애의 티타임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런 모진 이야기만 듣지 않았어도…….’
그녀도 네시아의 수행 하녀로 그 모임에 따라갔기에, 그때 일어났던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
비록 버그만 후작가가 대부인의 행패를 정중히 사과하며 네시아에게 각종 귀한 선물들을 보냈어도……. 그날 입은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네시아는 계속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녀는 명랑하던 아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이 가여워, 연신 네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얌전히 받던 네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전에 처방받았던 수면제는 이제 없어?”
그 물음에 하녀는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저었다.
“다 드셨어요. 애초에 주치의님께서 벌써부터 수면제에 의존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네시아가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금방 마음이 약해진 하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일단 날이 밝으면, 주치의님께 말해 봐요.”
“알겠어. 너도 얼른 가서 자.”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응!”
네시아의 대답을 들은 하녀는 잘 자라 인사를 한 뒤,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네시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잠들기 무서워.’
꿈속에서 네시아는 언제나 철저한 약자였다.
무시와 폭력이 일상인 삶. 그게 싫어, 다시 잠들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새 수마가 찾아왔다.
네시아는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며 생각을 이어 갔다.
‘이게 전부, 내가 공작 부인과 달라져서 생긴 일인 걸까?’
사실 네시아는 버그만 대부인이 했던 말보다, 다른 영애들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세세히 살펴보니 자신과 공작 부인은 다르다는 그 말.
테오도르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네시아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북부 성에 걸린 공작 부인의 초상화와 자신이 비슷하다는 걸.
‘내가 공작님이랑, 벨라디 언니랑, 멜도르 오빠와 같이 살게 된 건 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을 닮아서일 텐데…….’
그런데 내가 크면서 점점 그분과 달라지면…….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버려질까?
‘꿈에서처럼.’
꿈에서 느꼈던 추위가 불안이 되어, 네시아의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네시아는 셰넌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네시아, 너에게는 도헤미아의 기억이 잠들어 있단다.
사실, 그때에나 지금이나 셰넌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자신이 검을 배우거나, 귀족 영애들과 어울릴수록 잠들어 있던 공작 부인의 기억이 깨어난다는 것.
공작 부인은 여자가 검을 휘두르는 걸 싫어했고, 친구들과 교류를 하기보다는 저택에서 마법을 연구했으니까.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억울해졌다.
왜 나에게 공작 부인의 기억이 있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 힘들고 아픈 기억들만.
그녀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덩달아 네시아도 아프고 힘들었다. 그러나 북부 성에서 지낼 때처럼 천진하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모두 어른스러운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말을 잘 듣고, 얌전하고, 똑 부러졌으며, 괜한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아이.
‘그건 벨라디 언니도 마찬가지겠지.’
공작님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응석을 잘 받아 줬으니 혹시 몰랐다. 하지만 벨라디 언니는 벌써 오래도록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 공작 부인과 다른 점을 발견한다면,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네시아는 지금처럼 혼자 끙끙 앓는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
이런 때 셰넌이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공작 부인의 기억이 왜 나한테 있는 건지, 그리고 내 진짜 엄마와 아빠는 누구인지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아주 근본적인 물음들이 아이의 작은 머리를 어지럽게 휘저었다.
***
난 집무실 소파에 앉아 들고 있던 보고서를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저택의 주치의가 네시아에게 내린 진단서였다.
「지속적인 불면과 약간의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음. 이에 따라 소량의 수면제를 처방함.」
‘벌써 이 단계까지 온 건가.’
네시아가 수면제를 먹고 있다는 게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그 아이는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약을 먹는 시기가 상당히 이르기는 해.’
아무래도 버그만 후작가에 있었던 티타임이 촉진제가 된 듯했다.
난 버그만 후작 본인이 몸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후작의 어머니인 버그만 대부인의 행패를 정중히 사과하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걸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후작도 속이 꽤나 쓰렸겠어.’
내 납치 사건으로 가을 사냥 대회의 결과가 많이 연기되었지만, 당연하게도 우승은 내 차지가 되었다.
어차피 버그만 영식이 내 지도를 훔친 순간 명예 졸업은 물 건너갔으나, 막상 우승을 놓치게 되니 어지간히 씁쓸했겠지.
그런 와중에 자기 어머니까지 사고를 쳤으니……. 아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뭐, 사실 그것까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나저나…….
‘네시아가 어머니의 기억을 자각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지.’
하나는 어머니가 겪었던 과거의 편린들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때. 그리고 남은 하나는 네시아 스스로 본인의 주체성을 찾으려 할 때였다.
이건 결국, 그 아이가 어머니의 과거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따지면, 네시아도 마냥 편안한 인생은 아니군.’
그리 생각하는 찰나, 노크 소리와 함께 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시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네시아가 들어왔다.
아이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했다.
“부르셨어요, 언니.”
“그래.”
난 살짝 자세를 고치며 네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아,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네시아는 휙휙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대답했다.
확실히 네시아는 아직 어리고, 정령의 기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얼굴색이 크게 나빠지진 않았다.
그러나 주치의의 진단서로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걸 아는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버그만 후작가에서의 일은 들었어. 가서 고생이 많았네.”
“아……. 전 괜찮아요! 다들 너무 상냥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대부인의 폭언을 들은 후에도?”
“그, 그건…….”
네시아는 그렇게 머뭇거리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소심한 반응을 관찰하며 난 속으로 혀를 찼다.
‘악몽 때문에 그런가, 위축이 많이 됐어.’
고작 몇 달 안 만나는 사이, 네시아는 처음 보였던 해맑음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게 내게 긍정으로 다가올지, 부정으로 다가올지 가늠하는 중 스티아가 차를 준비했다.
난 차분히 차를 한 입 마시며 생각했다.
‘저런 때 아버지가 나서서 위로를 해 줘야 할 텐데.’
그게 부모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애초에 앨턴 공작으로서 하는 일도 많고…….
‘나와의 관계로 머리가 어지럽겠지.’
하지만 그럴수록 네시아를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날 내치고 그 아이를 선택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문득, 그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난 언제나 어리석고 늦구나. 미안하다.
‘아버지, 당신은 그걸 깨닫고 나서도 변화가 없으시군요.’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 대신 네시아를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저, 이 아이의 불안을 내가 이용할 수 있을까 계산할 뿐.
난 치열한 계산 끝에 나온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시아, 이 기회에 셰넌을 직접 소환해 보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