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황제의 되물음에 킬리언이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 한편에 언제나 아련하게 박혀 있는 진실을 입에 올렸다.
“어머니를 죽인 것도…… 형님의 짓입니다.”
킬리언의 말에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남부의 치료제는 퍼델이 만들었고, 그녀는 그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때문에 수많은 의혹이 퍼델에게 향했으나, 퍼델은 무려 3년 동안 황후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 덕분에 모든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 본인도 퍼델의 행동에 내심 감동했었으니까.
하지만…….
“짐을 세뇌했던 놈이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황후의 목숨을 노렸을 수도 있겠구나.”
“예,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숨을 거두기 직전, 제게 이걸 남기셨습니다.”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그동안 꽁꽁 감추었던 첫 번째 황후의 다이아몬드를 꺼냈다.
“아카데미에 있을 무렵, 어머니께서 이 다이아몬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오지 말라 하셨죠.”
황제는 그걸 보며 여러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퍼델이 따로 관리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날 속였군……. 아니, 굳이 따지자면 세뇌를 이용한 건가.”
입 안이 너무나도 썼다.
첫 번째 황후는 황제의 든든한 파트너로서 2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의 비통한 죽음의 진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전부 내 탓이다.’
무엇보다 어미를 죽인 범인도,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낸 이도 모두 자신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이 큰 착잡함으로 다가왔다.
‘나라를 선택하고 가정을 버린 결과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구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지만, 짙은 회의감과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퍼델 앨러만 데커딜에게는 패러그린 후작 외의 가장 적극적인 협조자가 있습니다. 그자에 대한 증거까지 함께 확보해 처벌하려 합니다.”
“아글라 공작가로구나.”
“공작가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킬리언이 서둘러 덧붙였다.
“시온 아글라만큼은 황태자와 관련 없습니다.”
벨라디가 어떻게 해서든 시온 아글라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에게 괜한 선입견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황제는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 일을 처음 알아낸 건 너이니, 남은 일도 모두 맡기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렇게 황제의 허락을 받은 킬리언이 곧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바로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이 더 고역이니, 차라리 저 호칭이 나았다.
황제는 차마 킬리언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말해라.”
그 물음에 킬리언은 벨라디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의 행보가 너무 거침없어요. 마치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그 말은…….
-그놈에게는 당신의 ‘매혹’이 통하지 않았죠? 정령의 마법에 걸린 적이 있으니.
-맞습니다.
-하지만 퍼델 앨러만 데커딜은 정령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죠. 그러니 보물 창고를 조사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형님이 정령과 접촉할 수 있는 수단은 정령의 보물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틈틈이 황실 보물 창고를 조사했지만, 사라진 건 없었어요. 특별히 효과가 있는 보물도 없었고요.
-제가 확인하고 싶은 건 황실의 것이 아니에요.
-설마…….
-이 기회에 제국의 주인이 어떤 보배들을 가지고 있는지 구경해 보죠.
그렇게 말한 벨라디는 생각해 둔 바가 있는지 당당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설레는지 알고 있을까?
‘덕분에 모든 진실을 말해도 아무렇지 않아.’
벨라디를 만나기 전에는 황제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는데…….
킬리언은 더 이상 황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한 사람으로 넘칠 듯 출렁거려서,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킬리언은 풀리려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폐하의 보물 창고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출입을 허락해 주십시오.”
“짐의 보물 창고를? 이유는?”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킬리언의 확고한 말에 황제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폐하께 얻을 협조는 전부 얻었다.’
그럼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갈 차례였다.
마침,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퍼델을 끌어내리면, 네가 차기 황위에 오를 생각이냐?”
“그건…….”
***
네시아는 스르륵 감았던 눈을 떴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렇게 의문을 가지자, 어둠이 일렁이더니 떨어지는 낙엽의 풍경을 가진 정원으로 변했다.
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나무를 배경으로 동그란 티 테이블이 놓여 있고,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네시아의 옆에 앉은 영애가 싱긋 웃었다.
“앨턴 양, 이 차 좀 마셔 보세요. 이번에 마갈라 제국에서 새로운 차를 가지고 왔답니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고, 얼굴은 흐릿했다.
그러나 네시아는 그녀가 버그만 후작가의 영애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정원이 후작가의 저택이라는 것도.
딱 한 달 전, 네시아는 버그만 후작 영애의 티타임에 초대받았으니까.
‘꿈이구나.’
벌써 몇 번째 이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네시아는 애써 웃으며 그녀가 따라 주는 찻잔을 들었다. 꿈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듯, 차에서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시아는 의무적으로 차를 마시며 곧 다가올 순간을 대비했다.
머지않아, 정원 너머로 한 노부인이 다가왔다.
한 치의 잔머리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하얀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은 노부인이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네시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게 앨턴 공작이 새로 들인 아이라고?”
그녀의 등장에 버그만 후작 영애가 당황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할머님!”
“그 공작 부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입양됐다던데, 그리 똑같지도 않구나.”
“할머님, 안으로 들어가요. 제가 모실게요.”
“놔라, 외양만으로 공작가에 들어간 운 좋은 아이라니. 나도 구경 좀 하자꾸나.”
“할머님……!”
“테오도르 앨턴이 평민 출신의 여자와 결혼할 때부터 알아봤다. 그자가 귀족의 격을 전부 떨어트렸어! 심지어 이번에는 출생도 불분명한 걸 딸이랍시고 들여?”
버그만 후작 영애가 서둘러 노부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노부인은 하녀와 버그만 영애에 의해 돌아가는 와중에도 날카로운 말을 멈추지 않았다.
“평민들이 우리를 뭐라고 업신여길까! 같은 귀족으로서 수치스럽기 그지없어! 넌 염치도 없다. 머리와 눈색이 똑같다는 이유로 공작가의 한자리를 차지하니, 네가 정녕 귀족이라도 된 듯싶으냐?”
맞아, 저 부인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지.
네시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 테이블 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때도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런 말도 못 했어.’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위 영애들이 네시아를 위로했다.
“앨턴 양, 신경 쓰지 말아요.”
“버그만 대부인께서 요즘 편찮으셔서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말이 파다해요.”
상냥한 말들이 오갔다.
현실에서 이미 겪었던 일이었기에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곧, 네시아의 양심에 푹 박혔던 한마디가 들렸다.
“그리고 저희는 앨턴 양이 작고하신 공작 부인과 닮아서 입양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은 다시 들어도 네시아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그럼요, 분명 앨턴 공작께서는 앨턴 양 자체를 보고 입양을 결정하셨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가만 보면 앨턴 양과 공작 부인께서는 다른 부분이 많은걸요!”
“맞아요. 키도 공작 부인보다 더 크실 것 같고!”
“무엇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걸요!”
“그렇게 다른데 왜 네가 거기에 있는 거야!”
앞의 말들과 전혀 다른 섬뜩한 목소리에 네시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너 따위가 분수도 모르고 감히 남의 자리를 넘봐?!”
꿈속 광경이 어지럽게 엉키며, 이번에는 은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불쑥 팔을 뻗어 네시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뻣뻣하게 고개를 들어!”
남자는 그렇게 소리치며 네시아를 거칠게 던졌다.
바닥에 나뒹군 네시아는 뼈가 아릴 듯한 추위에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급하게 주위를 살피니, 따뜻한 색감의 가을 정원과 영애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아주 낡고 허름한 집 안이 보였다.
나무판자로 허술하게 만들어진 창문에서 찬 바람이 휘잉 들어와, 간신히 켜진 촛불을 일렁이게 만드는 그런 집.
젊은 남자가 네시아의 옆에 침을 퉤 뱉었다.
“쓰레기 같은 게. 오늘 기분도 안 좋았는데 너 잘 걸렸다.”
그 말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네시아가 바닥을 기며 누군가를 향해 갔다.
촛불 옆,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여자였다.
“어, 엄마……!”
네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며 여자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여자가 힐끔 자기 맞은편에 서 술을 마시던 이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의 손을 떼어 냈다.
“매달리지 마. 네 아버지 또 화내신다.”
“하지만 오, 오빠가……!”
“계집애가 시끄럽기는!”
여자의 맞은편에 앉은 이가 혀를 찼다.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남자는 벌게진 눈으로 네시아를 흘겨봤다.
“여자는 저렇게 주기적으로 혼 좀 나 봐야 해! 너, 감히 오빠한테 대들기만 해 봐!”
그 말과 함께 네시아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오빠라는 작자가 손을 치켜올린 것이다.
곧 다가올 고통을 예감했는지 네시아의, 아니 어린 도헤미아의 푸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
“허억!”
네시아는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숨을 헐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