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57화 (158/197)

157.

“모두 나가 있거라.”

누군가 침실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본 헤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킬리언 오라버니!”

헤라의 외침에 킬리언이 성큼성큼 다가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는 나한테 맡기고 나가 있어.”

그 말에 멈칫한 헤라가 킬리언과 시선을 마주했다.

황제가 아픈 상황에서도 킬리언의 두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일이 잘못된 건 아닌 모양이야.’

헤라는 본인의 역할이 전부 끝난 걸 눈치채고, 머뭇거리는 시종들과 하녀들을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황제의 침실에는 킬리언과 황제, 단둘만 남게 되었다.

황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분명 출입을 금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폐하. 사정이 급해 명을 어겼습니다. 이에 대한 벌은 나중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신음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짐이 왜 네 출입을 금지한 거지……? 왜……?”

감정을 숨기는 것에 노련한 황제였지만, 지금만큼은 혼란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본인이 킬리언의 알현을 막은 건 맞는데……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사이, 킬리언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버지.”

킬리언의 말에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온 이후,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단호하게 선을 그었는데.’

그는 그런 킬리언의 태도를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안타깝게도 킬리언은 황위를 잇지 못하는 황족, 그것도 남성이다. 그런 그가 조금이라도 황제인 자신과 친밀하게 지낸다면, 욕심 많은 퍼델이 무슨 오해를 할지 몰랐다.

‘퍼델이 퍽 다정한 놈이었다면 몰라도…….’

“으윽!”

이상한 일이었다. 왜 퍼델을 생각하자 머리가 더 깨질 듯 아파 오는지.

황제가 다시 인상을 쓰자, 킬리언이 속삭였다.

“아버지, 무언가 떠오르는 것 없습니까?”

순간, 킬리언의 말 뒤로 퍼델의 목소리가 겹쳤다.

-아버지, 뭔가 들은 것 없습니까?!

“뭐든 좋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뭐든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하다고 생각하신 것들, 전부 제게 말씀하세요!

동시에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퍼델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벨라디 앨턴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씀하란 말입니다!

-킬리언 그 자식에게 마물의 부산물 추적을 허용했단 말입니까?! 빌어먹을! 왜 그딴 쓸데없는 짓을!

-앞으로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래,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로 침실에서 나오지 마세요! 국정은 제가 살필 테니까!

물꼬가 트이자, 그동안 퍼델이 자신에게 한 만행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황제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 스산한 물음에 킬리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님이 마물의 부산물을 밀수입한 범인입니다. 그 부산물로 아버지를 세뇌했고요.”

“세뇌라고?”

“아버지가 자주 드시던 꽃 차가 문제였습니다. 그 차에 마물의 부산물이 섞여 있었어요.”

그 대답을 듣자, 황제는 자신의 머리를 괴롭히던 두통이 한순간 사라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어지럽게 부유하던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곧 모든 걸 깨달은 황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아…….”

그런 황제를 본 킬리언은 혹시 몰라 끌어올리고 있던 자연 친화력을 풀었다.

황제가 계속 제정신을 못 차리면 본인이 직접 치유 마법을 시전하려 했으나, 표정을 보니 그럴 필요 없어 보였다.

“두통은 괜찮으십니까, 아버지?”

그 물음에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느리게 눈을 떴다. 그리고 킬리언과 시선을 마주했다.

“머리가 아주 맑아졌어. 최근 이만큼 정신이 선명하던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그렇게 말한 황제는 나라의 주인답게 모든 동요를 완벽히 숨겼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킬리언은 그의 착잡함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로 황제가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면, 굳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필요 없으니까.

곧 황제가 물었다.

“헤라가 내게 먹였던 붉은 알약. 그걸 네가 준비했느냐?”

“예, 아버지.”

“넌 언제부터 내가 이상하단 걸 눈치챘지?”

“송구합니다. 사실 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건 앨턴 공작가의 임시 가주가 계획한 일입니다.”

“앨턴 공작가의 임시 가주? 벨라디 앨턴을 말하는 것이냐?”

“예.”

그렇게 대답하며, 킬리언은 이제까지 퍼델이 벌인 만행들을 보고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숨김없이 전부 다.

황제가 가만히 말을 듣고만 있었기에, 킬리언의 보고는 빠르게 끝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제게 명하신 마물의 부산물을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제서야 보고드려 죄송합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상냥한 킬리언은 황제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까, 황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른 무엇보다 위다나 왕국에서의 폭발을 퍼델이 일으켰는지가 중요하다.”

황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것이 입증되어야, 퍼델이 마물의 부산물을 이용해 제국민과 짐을 농락했다는 죄가 성립되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놈은 패러그린 후작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벗어날 확률이 높다.”

벨라디가 염두에 둔 상황이었다. 킬리언은 차분하게 물었다.

“그 경우, 형님의 처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국의 지엄한 법도에 따라 황태자의 지위를 거둬들이고 오지로 유배형을 내릴 것이다.”

황제가 킬리언을 바라봤다.

“그러나 너와 벨라디 앨턴은 유배형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 것 같구나. 굳이 짐을 깨워 이 일을 알리는 것을 보면.”

“예, 아버지. 저희는 퍼델 앨러만 데커딜의 황족 신분을 박탈한 후, 사형하길 원합니다.”

황족의 사형. 그건 딱 하나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처벌이었다.

“반역의 죄를 물자는 말이냐.”

“증거는 충분합니다.”

그 말과 함께, 킬리언이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벨라디가 더너스에게 받은 결정적 증거! 그건 다름 아닌 마법 루비 하나였다.

“그게 뭐지?”

황제의 물음에 킬리언이 루비를 건넸다.

“마력을 불어넣어 안에 담긴 마법을 발현시켜 보십시오.”

말보다는 증거를 먼저 보여 주겠다는 건가.

‘얼마나 자신 있으면.’

황제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낀 채, 순순히 루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루비가 은은하게 빛나더니, 곧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마지막인가?

-예, 아버님. 그분께서 명하신 대로 비밀 창고에 설치한 원거리 폭탄을 전부 발동시켰습니다.

무언가 불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제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 녹음 마법을 이용했군.’

어차피 요점은 그 창고의 소유주가 황태자라는 것을 입증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니 간편하게 녹음 마법을 활용하는 건 나쁘지 않은 수였다.

황제는 흘러나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수고했다. 이제야 우리도 마음 편하게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그동안 텔레포트 진도 없이 제국과 왕국을 오가느라 아버님께서 더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돌아가면 바로 널 내 호적에 올리겠다. 우리 패러그린 후작가를 이을 후계자는 이제 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패러그린 후작…….”

대화를 듣던 황제가 혀를 찼다.

‘그동안 아프다며 영지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곧 그분께서 통치하는 제국이 올 거다. 그분은 우리에게 공작 위를 약속하셨어. 넌 미래의 패러그린 공작이 되어 제국의 실권을 잡아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에는 네 누이도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여성이 되겠지. 차기 황족들도 전부 우리 핏줄이 되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벅차군요. 이것도 전부 누이를 그분과 혼인시킨 아버님의 능력 덕입니다.

-하하하! 당연한 소리를! 그나저나, 최근 킬리언 황자가 위다나 왕국을 뒤지고 있다는데……. 우리를 따라온 이들은 없겠지?

-그럼요. 제가 꼼꼼하게 살핀 결과, 주위에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마력 방해 장치도 잘 작동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좋아, 잘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속 편한 소리였다.

벨라디가 심어 둔 정보망은 아주 광활하여, 진작 패러그린 후작가의 심층부까지 뻗어 있었으니까. 때문에 종종 패러그린 후작의 행방이 묘연하단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원작에서 후작은 은밀히 원거리 폭탄 개조에 관심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스파이에게 폭탄 관련 보고를 들으니,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벨라디는 흩어진 정보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더너스 일행을 위다나 왕국으로 보냈다. 이 정보들로 그들은 무사히 숨겨진 보조 창고 몇을 물색할 수 있었고.

물론, 아무리 보조여도 삼중 보안으로 감추어져 들어갈 수 없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보안이 삼엄하다고 해도, 곧 폭탄이 터지는 창고 내부에서 대화를 하진 않으니까.

벨라디는 그 찰나를 위해 근방에 녹음 마법을 넣어 둔 마법 루비를 숨기라 명했다.

물론 패러그린 후작 측도 이런 사태에 대비해 마력 방해 장치를 작동시키긴 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 이길 수 있는 장사 없다고.

벨라디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대량의 마법 루비를 촘촘히 숨겨 두니, 방해 장치를 뚫고 그들의 대화를 담은 루비를 건질 수 있었다.

‘그 귀한 증거가 바로 이거란 말이지…….’

킬리언은 빛이 꺼진 마법 루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녹음을 제출하겠습니다.”

“아주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구나.”

퍼델의 이름만 숨기면 뭐 하나,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대화에서 ‘그분’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다 알겠는데.

이로써 퍼델 측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대화를 모두 들은 황제는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으로 머리가 차갑게 굳어 갔다.

‘내가 그동안 저딴 놈을 믿고 있었다니.’

황제의 목소리가 저절로 냉혹해졌다.

“당장 퍼델 앨러만 데커딜을 구금하라 명하겠다.”

“아버지, 그 전에…… 자식으로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자식이라는 말에 황제가 멈칫했다.

“뭐지?”

“퍼델 앨러만 데커딜에 관한 모든 일을 제게 일임해 주십시오. 또한, 당분간은 세뇌당한 연기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놈을 사형에 처할 것이다. 이 정도 증거면 반역의 죄를 물고도 충분해.”

“형님에게는 절대로 씻을 수 없는 마지막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직접 그를 심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죄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