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황태자가 마물의 부산물을 여러 곳에 분산해 보관할 거란 가능성, 그걸 잊고 있던 건 아니다. 다만, 놈이 워낙 단순하니까 메인 창고가 분명 존재할 거라 여겼지.
‘이제껏 그걸 추적하기 위해 공을 들였던 거고.’
그런데 증거 인멸을 위해 메인을 포함한 모든 창고를 폭발시켰다니. 욕심 많은 놈치고 큰 결단을 내린 게 분명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킬리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늦어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를 실패한 건 아쉽지만, 이 순간을 놓칠 순 없어요.”
“…….”
“일은 계획대로 진행해요. 설령 잘못돼도, 책임은 전부 제가 지겠어요.”
“킬리언.”
내가 조용히 그를 부르자, 킬리언이 살짝 긴장한 게 느껴졌다.
그는 가만히 내 다음 말을 기다렸고, 난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결정적인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고 누가 그래요?”
내 말에 킬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 옆에서 대기하던 더너스와 스파이를 바라봤다.
“아……! 혹시 저들이 빈민가에 있는 보조 창고에서 마물의 부산물을 확보했나요?”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난 어리둥절한 표정의 킬리언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꼭 마물의 부산물이라는 물질적인 증거만 결정적이라 볼 수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난 더너스에게 힐끔 눈짓을 했다. 그러자 더너스가 차분하게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난 그걸 받아들며 여유롭게 말했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괜히 확인 작업만을 위해 저들을 타국으로 보냈겠어? 그것도 거의 한 계절 동안?
내 당당한 미소에 킬리언은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난 주머니 안에 든 것을 확인하며, 내가 뭘 확보했는지 천천히 설명했다.
내 설명을 다 들은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
시녀들과 하녀들을 전부 물린 헤라는 테이블 위의 붉은 구슬을 빤히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이게 마지막인데…….’
벨라디로부터 받아 온 정령의 보물이라는 구슬. 이제 이것도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헤라는 그걸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버지는 정말 세뇌에 걸린 걸까?’
벨라디와의 약속대로 헤라는 하루에 한 번, 매번 저녁 식사 때마다 황제에게 이를 먹였다. 그러나 황제는 딱히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받자마자 바로 먹일 수는 없었지만…….’
붉은 구슬을 받아 온 그날, 퍼델이 자기를 불러 외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황제도 아프고 앨턴가도 난리이니, 황족으로서 궁을 지키라는 것이 그 명목이었다.
‘그때는 정말 들킨 줄 알았어.’
때문에 얼마나 심장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퍼델은 외출 금지 말고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황제를 만나는 것도 말이다. 혹시 몰라 며칠 상황을 살피던 헤라는 그제야 슬금슬금 행동에 들어갔다.
다행히 황제에게 붉은 구슬을 먹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아예 대놓고, 내가 직접 구한 귀한 약이라며 식후에 드시라고 들이밀었으니까.’
황제는 아끼는 막내딸이 내미는 약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허허, 우리 헤라가 벌써 짐을 챙기는구나.
-제가 의원에게 직접 받아 온 약이에요. 이거 드시고 아프지 마세요, 아버지.
-착하기도 하지.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헤라 황녀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헤라는 놓치지 않았다. 기특하다며 웃는 황제가 뒤편에 서 있는 황실 의원에게 슬쩍 눈짓한 것을.
한평생 독살과 암살의 위협을 받는 권위자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 헤라는 그걸 눈치채며, 아무도 모르게 손바닥에 고인 땀을 드레스 자락에 닦아야 했다.
어머니가 보셨다면 황녀 된 몸으로 품위 없이 군다며 꾸짖으실 행동이었지만, 자꾸 긴장돼서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그 의원이 킬리언 오라버니의 사람이라 무사히 넘어갔지.’
붉은 구슬을 받은 그날, 킬리언의 측근이 은밀히 저 의원을 소개해 줬다.
그 의원은 헤라와 약속한 대로, 황제에게 약이 안전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신호를 보고 나서야 황제는 붉은 구슬을 입 안에 넣었다.
헤라는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경계심이 철저하신데, 정말로 세뇌에 걸리신 거야?’
헤라는 본인이 황제에게 예쁨받고 있음을 잘 알았다.
이런 자신이 약을 바칠 때도 일단 의심부터 하는 걸 보면, 황제의 이성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앨턴 소공작님은 물론, 킬리언 오라버니도 아버지가 세뇌당했다고 확신하니까…….’
벨라디가 얼마나 뛰어나고 안목 있는 사람인지는 굳이 떠올릴 필요 없고.
킬리언도 벨라디 못지않게 대단한 인물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황실 의원들을 기어코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것만 봐도 그랬다.
이런 둘이 손을 잡고 퍼델을 경계하니, 같은 배를 타기로 결심한 헤라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다음 황권을 차지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군요.
문득, 벨라디가 한 말이 떠올랐다. 헤라의 볼이 기대감에 붉게 달아올랐다.
‘나한테도 결혼 외에 다른 길이 생긴 건가.’
황제가 되지 못하는 황족에게는 죽음 아니면 결혼밖에 선택지가 없다.
물론 차기 황제와 잘 합의하면 대공이라는 작위를 받을 수 있겠으나, 여자인 헤라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황제가 될 수 있어……!’
어린 헤라의 가슴에 깊이 숨어 있던 욕망과 희망이 꿈틀 움직였다.
헤라는 어느새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치하게 될 제국을 떠올렸다. 상상만으로도 조심스러웠던 꿈이었다.
그렇게 눈을 반짝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녀님, 폐하와의 식사 시간입니다.”
“알겠어.”
헤라는 구슬을 챙기고, 시녀들과 함께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침실로 향하며 작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 이 꿈을 현실로 이루려면 지금부터 잘해야 해.’
다짐하는 사이, 황제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황제의 방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헤라에게 말을 걸었다. 일전에 만났던 킬리언의 사람이었다.
“황녀님, 오늘도 약을 가지고 오셨군요. 제게 주시면 식사 후, 따로 물과 함께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구한 약이니까 끝까지 직접 챙길래.”
“그러시겠습니까? 황녀님의 정성 덕분에 폐하께서도 금방 쾌차하시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의원이 웃자, 근처에 있던 시종들도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 그렇다면 혹시 약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폐하께서 현재 그 약 외에 다른 약은 드시고 있지 않아서요. 남은 약의 개수에 맞춰 새로운 약을 준비하려 합니다.”
그 질문에 헤라가 말했다.
“딱 하나 남았어. 오늘이 마지막이야.”
“알겠습니다, 참고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의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짧은 사이 헤라와 의원이 시선을 교환했다.
곧 의원은 자연스럽게 응접실을 벗어났다. 헤라는 그 뒷모습을 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시녀들과 함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라버니에게 알리러 가는 거야.’
마물의 부산물을 조사하기 위해 떠났던 킬리언이 최근 돌아왔으니까.
자신과 같은 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상기하자, 헤라의 부담감이 한결 덜어졌다.
동시에 속으로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대범하게 일을 완수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황제가 되기 이전에, 몸도 마음도 성장할 시간이 필요한 듯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테이블 상석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황제는 반갑게 아이를 맞이했다.
“헤라 왔구나. 어서 들어오거라.”
“네, 아버지.”
헤라가 총총총 테이블로 다가가자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의자를 빼 주었다. 그렇게 아이가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테이블 위로 음식을 올려놓았다.
“그래, 우리 딸.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지?”
“오늘은요.”
부녀는 다정한 대화를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황제가 식사를 마친 후 식기를 내려놓자, 헤라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이 서 있는 트레이로 향했다.
미리 헤라에게 명을 들은 시종은 물 한 컵과 빈 접시가 담긴 작은 은쟁반을 내밀었다.
헤라는 몸소 챙겨 온 함의 뚜껑을 열어 마지막 남은 붉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이것까지 먹으면 그래도 뭔가 변화가 있겠지?’
떠오르는 의문을 애써 억누르며, 구슬을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시종에게서 쟁반을 받아 든 후, 황제에게 향했다.
“아버지, 약 드실 시간이에요!”
“허허허! 우리 막내가 이렇게 효심이 깊으니 아픈 게 절로 날아가는구나!”
황제는 가까이 다가온 헤라의 뺨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러곤 아무런 의심 없이 헤라가 들고 온 약을 물과 함께 먹었다.
‘삼켰다……!’
황제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헤라는 시선을 올려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황제는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으음, 그래. 바로 효과가 나올 리 없지.’
살짝 긴장하던 헤라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흠…….”
물컵을 내려놓은 황제가 살짝 인상을 쓰며 미간을 눌렀다.
그가 약간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자, 침실 내에서 시중을 들던 시종 몇과 하녀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폐하, 편찮은 곳이 있으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황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미간을 몇 번 누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통이 조금 있군.”
그 말에 헤라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이런 딸의 반응에 황제가 애써 웃으며 아이를 진정시켰다.
“혹여 네가 준 약 때문이라는 생각은 말거라. 며칠 전부터 편두통이 있었, 으윽!”
말하다 말고 황제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행동에 침실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폐하!”
“어서 의원을!”
헤라 역시 사색이 되어 황제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반응이 생기길 바랐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황제가 아파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내가 괜한 일을 한 건 아닐까?’
헤라가 후회를 느끼던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