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난 그런 아이와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의외이신가요?”
“……아니요.”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내 말에 꽤나 놀란 듯 보였으나, 황녀는 곧 차분함을 되찾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긴……. 오라버니가 임시 가주님을 품은 것보다, 본인이 먼저 북부의 울타리로 들어간 게 더 잘 어울리는 그림이네요.”
그렇게 웅얼거리던 아이가 이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누가 누구를 품었는지는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두 분이 같은 배를 탄 건 변함없으니까.”
황녀가 힐끔 시선을 내려 내가 닫은 상자를 응시했다.
“제가 이 상자를 그대로 들고 나가면, 전 이제 되돌릴 수 없이 두 사람의 편에 서야 해요. 설령 임시 가주의 말이 모함이고, 퍼델 오라버니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그 상자를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만으로 황태자를 의심했다는 증거가 되니, 당연한 말이지요.”
“반대로 제가 이 상자를 거절하면…….”
“그렇다면 황녀께서는 제 말을 거짓으로 판단한 것이니, 저희 사이는 그대로 동결될 겁니다.”
난 황녀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황태자가 폐하를 세뇌했다는 건, 반란으로 봐도 무방한 사안입니다. 전 이를 두고 어쭙잖은 저울질 따위 하지 않아요.”
솔직히 내가 이 정도까지 말하면, 황녀가 그대로 내게 붙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내 예상보다 더 객관적이었다.
“물론 임시 가주께서 신중한 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협조만 요구하시니, 선뜻 신뢰하기 어렵네요. 말뿐인 확신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당돌한 말과 달리, 황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손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헤라 황녀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렇게 당황하나 싶었는데, 황녀가 재미있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런 일도 없는 척, 태연하게 손을 뒤로 숨긴 것이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내게 요구했다.
“제게 증거를 보여 주세요, 앨턴의 임시 가주. 그럴 수 없다면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마치 자기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는 듯이.
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하하!”
이미 장성한 앨턴의 직계 앞에선 노련한 귀족들도 금방 기가 죽기 마련이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정계에 나서 본 적 없는 어린 황녀가 확고하게 본인의 주장을 펼치다니.
이걸 보고 어떻게 가만있겠는가.
‘아아, 지금 저 모습을 고스란히 킬리언에게 보여 주고 싶네.’
그 누구의 협박과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않을 뚝심 어린 표정.
저건 초상화 속 그리리카 선황과 정말이지, 쏙 닮아 있었으니까.
‘이제 헤라 황녀가 주관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 없겠어.’
나를 관찰한 것만으로도 저렇게까지 자신감을 회복했다면, 이쪽은 오히려 좋았다.
난 적당한 말로 헤라 황녀를 꾀어내려는 얕은수를 전부 철회하고, 선뜻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헤라 황녀님. 도움을 요청하며 가장 기본적인 걸 드리지 않았다니, 제 불찰입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헤라 황녀의 침착한 대답을 들으며, 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벨라디 님. 부르셨습니까.”
“들어와.”
문이 열리고 스티아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난 그런 그녀에게 링케의 가루에 대한 조사 결과와 꽃 차의 구성 성분표를 가져오라 일렀다.
갑작스러운 내 명령에도 스티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책상에서 쌓여 있는 서류 뭉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내게 가지고 왔다.
난 그걸 간단히 확인한 후, 그대로 황녀에게 넘겼다.
“확인하세요, 황녀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위를 멍하니 구경하던 헤라 황녀가 정신을 차리곤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재빠르게 서류에 적힌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난 그걸 기다리며 티테이블 위에 올려진 차를 한 입 마셨다. 매우 뜨거웠던 차는 마시기 좋게 식어 있었다.
“이만 나가 봐.”
“예, 벨라디 님.”
스티아가 나가고 나서도, 헤라 황녀는 정신없이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난 그걸 보며 작게 감탄했다.
‘어려운 용어가 많을 텐데, 막힘없이 읽는군.’
거기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용을 전부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추 상황을 파악한 헤라 황녀가 고개를 획 들어 날 주시했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최근 앨턴 공작님이 공표하신 ‘마물의 부산물 밀수입’ 건도…….”
“황태자의 짓입니다.”
난 헤라 황녀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황녀님, 전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당신께 보여 드렸어요. 이제 황녀님의 차례예요.”
“…….”
헤라 황녀의 두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영리한 아이는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는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건넸던 아이닝의 붉은 구슬이 담긴 상자를 집어 들었다.
“폐하께서 식사를 하신 후, 하루 한 알씩 이 약을 먹이면 되는 거지요?”
“예, 황녀님.”
“알겠어요.”
헤라 황녀가 상자를 꼬옥 쥐며 입을 열었다.
“제게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폐하께 의심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이가 한정적이라 해도……. 저처럼 어린아이를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으셨을 텐데.”
난 그렇게 말하는 헤라 황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황녀님. 얼마 안 있어, 앨턴 공작가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겁니다.”
“발표요?”
“후계자를 변경하겠다는 발표죠.”
내 말에 헤라 황녀가 눈을 깜박이다,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드디어 임시 가주께서 소공작이 되는군요.”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사실 항상 생각하고 있었어요. 벨라디 앨턴이란 사람은…… 임시 가주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든 법을 바꿔서 가주의 자리에 올라갈 그릇이라고.”
‘사람 보는 눈이 나쁘지 않네.’
난 헤라 황녀에게 후한 점수를 주며 싱긋 웃었다.
“황녀께서는 정상의 자리에 흥미 없으신가요?”
헤라 황녀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황태자는 머지않아 폐위될 테고, 킬리언 황자님은 황위에 큰 회의감을 가지고 계시죠. 그렇다면 헤라 황녀님.”
“아…….”
“당신은 다음 황권을 차지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군요.”
***
퍼델 앨러만 데커딜은 결단을 내렸다.
“킬리언을 내 심복으로 삼는 건 실패한 모양이군.”
그 결단에 케스퍼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본인이 그렇게 수상하다고 간청해도 모조리 무시했으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서야 현실을 직시하다니!
그러나 뒤늦게서라도 정신을 차린 게 어디일까.
케스퍼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세뇌가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향초의 공급을 중단할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계획대로 다음 타깃인 서부의 프레도 공작을 노린다.”
퍼델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아드득 갈았다.
지난번, 긴급회의에서 ‘벨라디 앨턴 암살 사건’의 수사를 본인이 맡겠다고 나선 킬리언이 떠오른 탓이다.
장성한 킬리언은 더 이상 자신의 눈치를 보던 어린 동생이 아니었다. 이를 깨닫자, 퍼델의 가슴 깊은 곳에 웅크리던 열등감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놈이 이미 마물의 부산물을 알고 있었을 줄이야.’
그날 회의의 마지막에, 테오도르 앨턴은 마물의 부산물이 제국에 유통되고 있다며 공표했다. 그때 회의장에서 유일하게 동요를 보이지 않은 건 둘이었다.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과 황제.
퍼델은 회의가 끝난 즉시, 황제를 따로 찾아가 그동안 그가 보고 들은 정보들을 전부 실토하게 했다.
‘이 방법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전자에게 약간의 두통도 유발하는 터라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는데…….’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늦장 부리다 큰코다친 격이라, 속이 쓰렸다.
그렇게 퍼델은 헤라가 벨라디 앨턴을 주기적으로 독대하는 것, 그리고 킬리언이 황제의 허락하에 마물의 부산물을 조사하고 있는 걸 알아냈다.
‘헤라가 앨턴 공작가를 자주 찾아가는 건 알고 있었는데. 네시아 앨턴이 아니라 벨라디 앨턴을 만나러 가는 거였나.’
그게 살짝 거슬렸지만, 그 어린 계집애가 벨라디 앨턴을 만나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지금이라도 아이가 황궁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외출을 금지하면 그만이지.
그것보다 퍼델을 불안하게 만든 건, 킬리언이 마물의 부산물을 조사하고 있다는 거였다.
‘심지어 생각보다 더 이른 시기에 조사에 들어갔었다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쯤 킬리언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퍼델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다 버럭 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킬리언! 이번에도 내 앞길을 막다니-!”
퍼델이 습관처럼 눈앞에 있는 재떨이를 휙 던졌다.
쨍그랑!
날아간 재떨이에 명화가 담긴 액자가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걸 신호로 퍼델이 더더욱 난동을 부리자, 케스퍼는 침착하게 그에게서 멀어져 몸을 피했다.
저런 상태의 퍼델은 절대 말릴 수 없었다.
‘젠장, 집무실을 새로 단장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케스퍼는 엉망으로 변해 가는 자신의 비밀 집무실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이곳이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고 해도, 퍼델에게까지 공개하는 건 역시 섣부른 선택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케스퍼는 후회했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출입을 막아야겠어.’
그리고 이곳은 온전히 본인만의 공간으로 만들어야지.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퍼델의 히스테리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곧 그가 숨을 거세게 몰아쉬며 소리쳤다.
“케스퍼 아글라!”
“예, 전하.”
퍼델의 부름에 케스퍼가 서둘러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분했는지, 눈에 핏발까지 선 퍼델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명령했다.
“위다나 왕국에 위장시킨 마물의 부산물 창고를 전부 폭발시켜라!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