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53화 (154/197)

153.

‘어째서 아글라 공작가의 차남이 마탑주와?’

‘황태자 쪽에서는 특별한 지령이 없었는데…….’

‘벨라디 앨턴 암살이 실패한 것과 관련 있나?’

‘심문 중인 놈들에게는 미리 침묵의 마법을 새겨 놓았지만……. 그래도 뭔가를 분 건 아니겠지?’

그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마탑주는 날카로운 눈으로 몇몇 인사들을 관찰했다.

한편, 회장 맨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멜도르는 쓰고 있던 모자를 깊숙이 누르며 발표회장을 나왔다.

그리고 무전 마법이 담긴 루비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곧 벨라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니?]

“응, 무사히 끝났어.”

[마탑 마법사들의 반응은?]

“난리지. 이제 저놈들이 어떻게 나오나 기다리면 되는 거야?”

[그래, 수고했어.]

벨라디의 말에 멜도르가 씰룩 입꼬리를 올리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마차로 향하며 속삭였다.

“그동안 누나는 뭘 하려고? 황태자 측을 확실히 막을 방안이 뭔지 물어도 돼?”

[궁금해?]

“흠흠, 조금?”

그 말에 벨라디의 웃음소리가 반지를 타고 들려왔다.

[그쪽이 매번 자극적인 소문으로 날 방해했으니, 이번에는 이쪽에서 자극적인 여론을 만들려고.]

알 수 없는 말에 멜도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동생의 반응을 눈으로 본 것처럼, 벨라디가 후후 미소 지었다.

[보면 알 거야. 조금만 기다려.]

“알겠어.”

벨라디는 멜도르의 대답을 들은 후, 무전을 끊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

“실례했습니다, 급한 연락이라서.”

“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붉은 머리의 소녀, 헤라 황녀는 멍한 얼굴로 집무실 티테이블 위에 올려진 고급스러운 상자를 바라봤다.

황녀는 상자를 뚫어지게 노려보면서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난 그런 아이를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헤라 황녀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그렇게 눈앞의 차를 마시며 기다리니, 마침내 헤라 황녀가 상자를 집고는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딸깍 소리와 함께 안에 든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킬리언 오라버니가 넘긴 정령의 보물인가요? 치유 효과가 있는?”

“맞아요.”

아이닝이 치유 마법을 담아 만든 붉은 구슬 몇 개가 비단에 감싸인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헤라 황녀는 그 구슬을 가만히 주시하다,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헤라 황녀의 작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걸 받아 든 순간, 전 퍼델 오라버니와 척을 지게 되겠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황녀님. 당신은 그저 간악한 형제의 손에서 아버지를 구하는 것뿐이니.”

내 말에 황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어리다고 하여 그런 듣기 좋은 소리 할 필요 없습니다. 임시 가주께서 지금 제게 피할 수 없는 선택지를 내민 것,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황녀의 눈이 이지적으로 빛났다.

“퍼델 오라버니에게 세뇌당한 폐하의 치료를 도와 달라, 그리 요청하셨으니……. 여기서 확실하게 제 입장을 밝혀야겠군요.”

헤라 황녀의 총명한 말에 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원작에서 황제가 헤라 황녀의 재능을 안타까워할 만했다.

‘저 나이에 벌써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 나간단 말이지.’

헤라 황녀의 말이 맞았다.

난 오늘, 집무실을 찾아온 헤라 황녀에게 비공식적인 독대를 요청했다. 황제의 세뇌에 대해 알리고, 그 치유를 협조받기 위해서.

킬리언이 조사했던 황제의 ‘꽃 차’. 그 구성 성분의 결과가 최근 나왔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 차에는 마물의 부산물인 링케의 가루가 섞여 있었어.’

내게 그 결과를 공유한 킬리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탄했다.

-폐하께서 정말로 세뇌를 당한 상태셨다니……! 아무리 유심히 관찰해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그게 바로 놈들이 완성해 낸 세뇌의 최종형이겠죠.

주변인은 물론, 심지어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할 그런 암시. 그 무서운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됐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런 피해 사례들을 전부 파헤치면 좋겠으나, 일단은 황제를 세뇌에서 깨워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모든 병과 상처를 치유해 주는 아이닝의 구슬이 있단 말이지.’

사실 이 구슬이 마물의 부산물에 의한 세뇌까지 치유할 수 있다는 건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킬리언이 돌아간 후, 난 어떻게 하면 황제의 세뇌를 풀 수 있을지 깊이 고뇌하고 있었다.

이런 내게 아이닝의 구슬 이야기를 꺼낸 건 심심하다고 놀러 온 타우딘이었다.

-답답하군! 아이닝이 있는데 왜 고민하는 것이냐!

-아이닝? 아이닝의 마법이 정신적 타격인 세뇌에도 효과가 있어?

-효과가 있다마다! 오히려 아이닝의 마법보다 마물의 부산물에 효과 좋은 약이 없다! 아이닝은 마물과 상극 중에서도 상극이니까!

-……그게 정말이야?

-이 몸이 네게 거짓을 말할까! 아무래도 아이닝 본인조차 마물과 접촉한 적이 없어 모르는 모양인데, 저것!

타우딘은 그렇게 외치며 내 책상 한쪽에 보관된 붉은 구슬을 가리켰다.

그건 내가 타우딘과 막 계약을 마친 후, 비 내리는 서부 숲으로 돌아가기 전 킬리언이 건넨 아이닝의 붉은 구슬이었다.

‘내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된다며 줬었지.’

그때 날 보던 킬리언의 눈빛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집중력이 흩어졌는데, 타우딘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버럭했다.

-이 몸이 이야기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다니! 빈정 상하는군!

-아, 미안. 내 실수야.

내가 순순히 무례를 인정하자, 타우딘이 잠시 새초롬하게 날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붉은 구슬을 몇 번 먹이기만 해도 깊은 암시에 빠진 정신을 일깨울 수 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저 구슬은 인간 세상에 두 번 다시 없을 영약이다! 정령의 마법은 인간들에게 기적과 다름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제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죽은 망자도 소환하는 것이 정령의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닝이 수련한 정령의 치유 마법 역시, 그와 비견된 효과를 가지고 있을 터.

‘그동안 아이닝이 틈만 나면 아프지 말라고 저 구슬을 내민 통에 실감이 안 났어.’

-그렇다면 정확히 몇 번을 먹여야 할까?

-다섯 번이면 충분할 거다.

-다섯 번? 생각보다 적네?

내 말에 타우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벨라디. 그 세뇌를 풀기 위해서는 기적이 다섯 번은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니까.

-흠…….

-오히려 이 몸은 놀랍다. 조잡한 마물의 부산물을 이용해 이 정도로 효력이 있는 비율을 찾아내다니……. 역시 그 둘도 어지간히 독하단 말이지.

-그런데 타우딘.

-고마워할 필요 없다! 이 몸, 아무리 자연 친화력이 빵점인 계약자라고 해도 이 정도 친절은 베풀 줄 아는 의리 깊은 정령이니!

-그게 아니라.

난 타우딘의 밝은 갈색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둘? 내가 상대해야 할 인물이 두 명이라고 너에게 말한 적 있나?

내 지적에 타우딘이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열심히 헛기침을 해 댔다.

-크, 크흠! 크흠! 하여튼 알려 줬으니 이 몸은 이만 간다!

타우딘은 그렇게 말하며 곧 내 방을 떠나 버렸지.

난 그런 흑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타우딘이 뭔가를 알고 있는 건 어차피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니까.

‘무엇보다 그건 네시아와 셰넌을 통해 알아낼 예정이거든.’

지금은 그것보다 황제를 세뇌에서 깨우는 게 더 중요했다.

일단 아이닝 덕분에 치유법은 이미 손에 넣었는데…….

‘문제는 황제에게 먹일 방법이었지.’

현재 황제는 몸이 아프다며 병상에 누워 버렸다. 그러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칩거에 들어간 상태다.

‘정확히는 킬리언이 내 암살 사건의 총책임자가 된 후부터였어.’

그것 때문에 황태자가 무척 분노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바로 황제가 아프다며 쓰러졌으니, 이건 누가 봐도 황태자의 술수가 분명했다.

‘사냥 대회에서 난 사고의 책임도 피할 겸, 킬리언이 활약할 기회도 날릴 꿍꿍이겠지.’

세뇌라는 믿을 만한 카드가 있으니, 그리 나섰던 걸까.

확실히 이로 인해 골치가 좀 아프긴 했다. 본인 궁에 칩거한 황제가 특히나 킬리언의 방문을 철저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보고할 사항들은 전부 황태자에게 일임하고 말이야.’

때문에 세뇌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귀족들 사이에서는 황제가 슬슬 황위 이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이 사태를 가만히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난 이래서 황태자가 참 고맙다니까.’

본인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믿겠지만, 그의 행적에는 항상 허술한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건강하던 황제가 아무와 만나지 않으면 그것도 그림이 이상하거든.’

황태자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주 소수의 인원만 만나도 된다고 암시를 건 모양이었다.

그리고 놈이 놓친 사실 하나. 난 그중 한 명과 이미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다는 것.

바로, 지금처럼.

“황녀께서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 주시니, 저 역시 태도를 바꾸어야겠군요.”

난 눈앞의 붉은 머리와 상반되는 파란 눈을 가진 황녀를 바라봤다.

“황녀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원래 정치는 파벌 싸움. 황녀님처럼 권력의 최정점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중립을 유지하기 애매한 법이죠.”

“임시 가주께서는…… 벌써 파벌을 정하셨군요. 킬리언 오라버니를 선택하신 건가요?”

그 물음에 난 싱긋 웃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헤라 황녀가 열어 놓은 상자를 닫았다.

탁-.

무거운 뚜껑이 만들어 낸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그가 선택한 거죠. 나랑 손을 잡는 것을.”

내 말에 헤라 황녀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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