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그 말에 시온과 멜도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탑주는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그동안 자리를 비운 이유는 알고 있소?”
시온이 살짝 안타까운 얼굴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마차 사고로 실종된 손자분을 찾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지금은 벨라디 님 덕분에 그 일을 마무리 지었지.”
“역시 우리 누나야……!”
멜도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탑주 역시 멜도르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이다, 깊게 한숨을 쉬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 마차 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오. 누군가 일으킨 타살이지. 그리고 그 당시, 아들 부부가 위다나 왕국으로 향했던 건 꽤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소. 마탑 내에서도 오래도록 날 보좌한 이들만 알고 있었고.”
“그렇다는 건…….”
시온이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마탑주는 아주 어두운 목소리로 시온의 말을 이었다.
“그래, 정보가 새 나간 거요. 그게 아니면 훌륭한 마법사였던 내 아들과 며느리가 그리 허무하게 죽지 않았겠지.”
그걸 떠올리며 마탑주는 잠시 눈을 꾹 감고 울컥 치솟는 울화와 슬픔을 정리했다.
자신이 멍청하고 아둔해서 이제껏 그런 것 하나 의심하지 못했다. 그저 손자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에 매달려, 행방을 찾기 급급했다.
‘만약, 벨라디 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이성을 찾지 못한 채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할아버지.
그래도 손자의 마지막 인사는 마탑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떠나기 직전, 그 아이가 보여 줬던 편안한 미소를 떠올리면 아득하기만 하던 고통도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자신과 아들 부부를 배신한 놈들을 향한 복수심이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최측근이고 뭐고 죄다 벌하고 싶어. 하지만…… 벨라디 님이 내 성급한 판단을 말렸소.”
그 말에 벨라디가 이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최측근이 합심해서 배신했을 리 없으니까요. 배신자는 그중 일부일 거예요. 물론, 그 일부가 언제나 흙탕물을 일으키죠.”
벨라디가 가만 보니, 마탑주는 뛰어난 마법 실력과 함께 괴팍하고 화끈한 성격에서 기인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리의 구심을 잡는 리더는 될 수 있었으나,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고 설득하는 능력은 다소 부족했다.
가뜩이나 지금의 마탑주는 개인적인 일로 마탑을 버렸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확실한 증거나 자백 없이 최측근을 전부 숙청한다고?
‘그럼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마탑이 단번에 와해될 거야.’
마탑의 노동력을 원하는 벨라디로서, 그건 딱히 매력적인 그림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최측근의 가면을 쓴 배신자를 축출해야만 해.”
벨라디의 말에 멜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마탑주님에게는 그 일이 시급해 보여. 하지만 그놈들이 누나를 암살할 이유는 없잖아.”
“아니, 있어.”
벨라디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손을 잡은 이가 황태자거든.”
그 말을 들은 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황태자? 퍼델 앨러만 데커딜 전하 말이야?”
“그래. 그가 내 암살을 주도한 인물이야.”
“뭐라고?!”
충격적인 소식에 멜도르가 버럭 소리쳤다. 물론 벨라디의 눈짓 한 번에 성질을 고이 접었지만.
그사이 시온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황태자 전하가? 거기다 마차 사고는 8년 전 일어난 일인데……. 그럼 그때부터?”
그렇게 중얼거리던 시온은 곧 뭔가를 깨달은 듯, 벨라디와 눈을 마주했다.
“설마, 이번 연구 발표에 날 주축으로 세우겠다는 건……. 우리 가문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거야?”
시온이 습관처럼 안경을 치켜올렸다.
“난 형과 같은 아글라니까.”
“맞아, 시온.”
사실 귀족들 중에서도 제국 중앙 정치에 뿌리 깊이 관여된 자가 아니면, 대부분 아글라 가문 자체를 황태자의 수하로 여겼다.
어찌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케스퍼가 의도적으로 여론을 그렇게 만들었고, 가주인 아글라 공작도 황태자와의 친분을 기꺼이 여겼으니까.
‘거기다 어머니와 난 정치에 아예 관심 없고…….’
귀족들도 이런 입장이니, 마탑에 소속된 이들에게는 시온이나 케스퍼나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신자들에게는 달랐다. 이제 막 은둔에서 벗어난 마탑주가 전혀 연이 없던 아글라 공작가의 차남을 띄워 준다고?
배신자들의 배후에 황태자가 있다면, 이 행위는 그들에게 아주 큰 혼란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탑주님과 황태자 전하의 접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혼란…….’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고위 귀족으로 자란 시온이기에 이 정도 감각은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쪽이 황태자 전하 측과 연락하면 바로 해결되는 문제 아닐까?”
벨라디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황태자는 그 배신자들과 한가로이 연락할 여유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벨라디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 모습에 멜도르가 참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역시! 계략을 꾸미는 누나도 멋있어! 난 무조건 찬성이야!”
이미 이 계획을 알고 있던 마탑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벨라디 님 같은 주군이 있다니, 북부의 앞날은 탄탄대로 그 자체로군요.”
앞선 둘의 반응과 다르게 시온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벨라디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입에 올리기조차 싫은 그런 질문.
시온이 그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벨라디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시온을 기다리기만 할 뿐.
어쩐지 그게 더욱 시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 억측이야.’
시온은 속으로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다.
‘벨라디랑 내가 얼마나 친한지 다 알면서, 이런 무서운 짓에 관여되었을 리 없어.’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시온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사건에…… 우리 형도 포함돼 있어?”
벨라디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미칠 듯 뛰었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간절한 눈으로 벨라디를 바라봤다.
그 시선과 마주한 벨라디는 아주 잠시 갈등하다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대답한 벨라디는 읽기 어려운 얼굴로 대답했다.
“네 형이 내 암살과 관련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어.”
“정말? 정말이지?”
“그래.”
시온은 원했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긴장으로 쿵쾅거리던 심장을 애써 진정시킬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불안했는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시온은 그걸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알겠어. 멜도르만 괜찮다면 이번 결과는 내가 발표할게. 아무래도 그 이상은 도와주기 힘들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고마워, 시온.”
“아니야. 그런데…… 지금 이 일을 형에게 말하는 건 좀 이르겠지?”
“……응, 아직은 일러.”
벨라디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최소한 그 무리를 잡고 나서 말하자. 그게 좋겠어.”
머릿속에 너무 다양한 생각들이 엉켜서 그랬을까?
시온은 벨라디의 말속에 담긴 그 묘한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아직 남아 있는 불안함을 차분히 달랬다.
‘만약 황태자 전하가 정말 이 일의 배후면……. 나도 마냥 눈을 돌릴 수는 없어.’
황태자와 아글라 공작가는 서로 깊이 엮여 있으니까.
그러니까 시온도 이 일을 잘 지켜보고 있다, 형에게 발을 뺄 타이밍을 알려 줘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친구의 목숨과 가족의 안위를 저울질하게 된 것 같아, 속이 무척 상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정치가 싫었는데…….’
***
“아글라 공자.”
시온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정신을 차리니 몰려든 기자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온을 부른 마탑주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부담스러우면 내가 말할 수도 있소.”
“아…….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애초에 시온은 아름다운 외모로 언제나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그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법 보석에 두 가지의 마법을 넣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도 기술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온은 연구를 진행한 마법사로서 발표를 시작했다. 시온이 말할수록 기자들의 손은 취재로 인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걸 보며 시온은 흔들리는 다짐을 다시 부여잡았다.
‘일단 집중하자.’
지금은 벨라디의 암살범부터 확실히 가리는 게 중요했다. 거기다 언제나 모든 걸 혼자 끌어안는 친구를 언제 또 도와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러니 시온은 이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는 훌륭하게 발표를 마무리 지었다.
“대략 이런 방식을 이용하면, 안정적으로 보석 안에 두 가지의 이상의 마법을 담을 수 있는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들렸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 기술에 대해 따로 투자를 받을 계획이십니까?”
“상품화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글라 공작가의 단독 기술로 활용하실 가능성이 높은가요?”
“아니면 마탑주께서 공언하셨으니, 앞으로 마탑에서 이 기술을 사용한다는 의미입니까?”
기자들은 그렇게 질문하며, 힐끔 발표회장 한구석을 바라봤다. 그쪽에는 마탑주가 데리고 온 그의 최측근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발표 공개 전, 마탑주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은 터라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아니, 마탑주가 아니었어도 그들은 아무 말 하지 못했으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마탑주님!’
마탑주에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그들은 오히려 본인들이 더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8년 만에 얼굴을 비치고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리고 최측근 중 소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