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역시 벨라디 님은 정령사로군요!”
“일단 그렇죠.”
비록 가지고 있는 자연 친화력이 한없이 적어, 타우딘의 친화력을 빌려 쓰는 입장이지만.
방금 사용한 정령검 소환도 타우딘에게 배운 기술이었다.
마법 보석에 검을 넣어 놓는 것보다 훨씬 유용한 기술을 알려 준 타우딘에게 작은 감사를 전하며, 난 자세를 잡았다.
그 사이 마탑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납득했다.
“어떻게 죽은 그 아이를 불러낸 건지 조금 궁금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립니다. 정령의 마법은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 제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요.”
“제가 정령사인 건 아직 비밀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벨라디 님.”
마탑주가 굳건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그 말을 들으며 고목을 주시했다.
순간, 내 살기가 느껴졌는지 가만히 늘어져 있던 고목의 나뭇가지들이 채찍처럼 변해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앙-!
나뭇가지들은 사정없이 내가 서 있던 곳을 내리찍었다.
그걸 가뿐히 피한 난 검을 고쳐 잡으며 채찍처럼 꿈틀거리는 나뭇가지들을 잘라 냈다.
부웅-!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굵직한 나뭇가지들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어느새 방어막을 형성해 나와 본인을 감싼 마탑주가 감탄했다.
“검술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과연, 앨턴가의 핏줄이야.”
성별에 구애받지 않은 마법사라 그런지, 마탑주는 그 연령대의 남성과 다르게 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마탑주에게 난 조용히 가산점을 주며, 다시 공격해 오는 나뭇가지들을 상대했다.
쿠웅!
내 공격에 화가 났는지, 고목이 크게 흔들리더니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나뭇가지들이 내게 뻗어 왔다.
물론, 마탑주가 내게 만들어 준 견고한 방어막을 뚫지 못했지만.
“이제 끝내 볼까?”
난 가볍게 뛰어올라, 나뭇가지들 중 가장 굵은 놈을 밟고 올라갔다.
내가 순식간에 고목의 몸통과 가까워지자, 마탑주가 잽싸게 방어막을 없앴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목 한가운데에 정령검을 깔끔하게 세로로 박아 넣었다.
쩌저적!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자, 고목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위아래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가볍게 땅에 착지한 난 양옆으로 갈라진 고목을 가만히 바라봤다.
죽은 고목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아…… 아아…….”
마탑주가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텅 빈 고목 아랫부분에 구겨져 있던 옷가지를 꺼냈다.
얼룩지고 엉망으로 구겨진 옷이었지만, 마탑주는 그걸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마탑주는 그 옷가지를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그사이, 난 고목 안에 들어 있던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허리를 숙여 그걸 집어 든 난 마탑주에게 물었다.
“손자분이 어쩌다 이 마물에게 먹혀 버렸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내가 알기로 마차 사고는 분명 마물의 숲 초입 부분에서 났다.
주변 환경을 보니, 지금 이곳은 사고 지점과 그렇게 멀진 않았다. 그러나 추락 사고를 겪은 어린아이가 혼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내 질문에 마탑주가 다시 고이는 눈물을 황급히 닦으며 말했다.
“그 아이 말로는 추락 사고가 있기 전, 마차를 몰던 마부가 이상했다고 했습니다.”
“마부가요?”
“예. 분명 마차가 출발할 때는 평소와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성을 잃었다고 했죠. 갑자기 괴성을 지르더니 마차를 절벽 쪽으로 몰았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마탑주는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들 내외는 탈출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 손자에게만 방어막을 펼쳐 준 모양입니다.”
“그럼 사고 당시, 마차에서 발견된 탈출의 흔적은…….”
“맞습니다. 방어막으로 살아남은 손자가 도망친 흔적이에요.”
“왜 굳이 사고 현장을 벗어난 거죠? 보호막도 있으니, 그 근처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의문에 마탑주가 아주 깊게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자신을 쫓아왔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손자가 가지고 있는 마법 보석에 속도 향상 마법이 걸려 있어, 무사히 이곳까지 도망쳤지만……. 추락 당시 보호막으로도 막지 못한 상처를 입어서 그만…….”
“저런…….”
난 잠시 이승을 떠난 손자의 영혼에 명복을 빌어 준 후, 입을 열었다.
“손자분을 쫓아온 자들은 누구죠?”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아이 말로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제대로 된 언어도 구사하지 못했다고 해요.”
익숙한 묘사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내 의심에 근거를 더하려는 듯, 마탑주가 말을 이었다.
“사실…… 발표하진 않았지만, 전 손자가 누군가에게 쫓겼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흔적들이 아주 약간씩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 오랜 조사 끝에…… 그 망할 놈들과 마차를 몰던 마부까지 모두 마물의 부산물을 섭취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 마물의 부산물이라…….
‘여기서도 그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난 마탑주의 말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예,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놈들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는 겁니다.”
“시체가 녹은 게 확실합니까?”
내 물음에 마탑주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겨우 찾은 괴한의 시체가 제 눈앞에서 녹아내린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상을 계속 찾아보니….”
“마물의 부산물을 오남용했을 때 나오는 부작용이죠.”
마탑주의 말을 이어서 말하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벨라디 님도 이를 알고 계셨습니까?”
알다마다, 이미 몇 번이나 그걸로 곤욕을 치렀는데.
이쯤 되니 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 부부께서 국경을 넘어 이 숲까지 방문한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마물의 부산물에 알고 계신다면…… 숨길 필요 없겠지요.”
마탑주는 그렇게 대답하며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아들과 며느리는 오래전부터 패러그린 후작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문에서 마물의 부산물을 밀수입하고 있는 것 같다고요.”
“그럼…….”
“맞습니다. 아들 부부는 그걸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이 숲에 온 겁니다. 비밀리에 오느라 별다른 호위나 보호 도구도 없이 말이죠. 그때 제게 손자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거절하는 바람에…….”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연신 후회로 범벅된 한숨을 쉬었다.
난 그런 그를 보며, 아까 고목 안에서 주운 것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들이 남긴 증거 같은 게 있을까요?”
“글쎄요……. 아들이 기록을 위해 녹음 마법을 담은 보석을 들고 다니긴 했지만, 사고 현장에서 그게 발견되지 않긴 했습니다.”
“그 보석이 이것인가요?”
난 깨진 마법 자수정을 마탑주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마탑주가 의문 담긴 얼굴로 날 주시했다. 난 그 시선에 간단히 대답했다.
“옷가지들과 함께 저 고목 안에서 발견했어요. 다만, 이렇게 깨져서 담긴 마법을 복원할 수 있을지.”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마탑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손자의 유품과 함께 발견된 보석이라면, 분명 뭔가가 담겨 있을 겁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원하겠습니다.”
난 그런 마탑주의 손에 조심스럽게 마법 자수정을 넘겼다.
그걸 받아 든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 가족은 사고가 아닌 살인을 당한 겁니다. 전 늙은 몸으로 혼자 살아남아 버렸으니……. 반드시 그 범인을 잡아낼 겁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내 말에 마탑주가 자수정에서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전 아주 유력한 범인을 알고 있거든요.”
내 말에 마탑주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
마탑주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눈 후, 난 수도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이곳은 날이 밝아와 아침 해가 뜨고 있는 시간이었다.
‘밤을 새워 버렸네.’
하지만 그만큼 마탑주를 만난 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 케스퍼 아글라! 그 우라질 놈들!
내게 사건의 진상을 들은 마탑주가 우레와 같은 분노를 표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어느새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그 마탑주는 원래 한 성깔 한다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곧 그의 복수와 다름없지.
덕분에 그는 내게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조만간 마탑주와 멜도르를 연결시켜야겠어.’
난 책상에 있던 고운 천을 들고 카우치에 앉았다. 그리고 정령검을 정성껏 닦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생각의 정리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타우딘에게 루비를 넘기고 텅 비어 버린 보석의 자리를 닦으며 난 상황을 정리했다.
‘황태자도 케스퍼도 부산물의 부작용을 아주 맹신하는군.’
그러니 똑같은 방법으로 몇 번이고 제국의 강자들에게 업보를 쌓는 거겠지.
물론, 그들의 오만함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피해자에게 부산물을 먹이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명령만 수행하는 기계가 되니까. 거기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녀석들이니 그게 얼마나 편했을까. 심지어 그 마탑주조차 그 부작용의 실마리를 잡는 데 몇 년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러니 놈들이 계속 그 수법을 우려먹었는데도 상당한 세월 동안 꼬리를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놓고 방심하면…….
‘나 같은 빙의자에게 전부 들키는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어?’
아니, 어쩌면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던 난 깨끗하게 닦은 정령검을 보관함에 잘 넣어 두었다.
마탑주의 아들 부부가 일찍이 마물의 부산물을 알아채고 그를 조사하고 있는 건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물론, 사고 현장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혹시나 싶었지만.
‘킬리언에게 증거를 모으라 시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지.’
마탑과 황태자 무리에게 원한을 갚아 주는 것과는 별개로, 내 ‘빙의’에 대해서 말이야.
난 그대로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앨턴가의 주치의가 최근 네시아에게 내린 처방전과 버그만 후작 영애가 보낸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걸 가만히 쓰다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슬슬 다가오는 건가.’
네시아에게 의도적으로 보여 줬던 상냥함의 결실을 거둘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