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난 그동안 킬리언과 내가 차곡차곡 수집해 온 증거들과 증인들을 떠올렸다.
-황후가 킬리언에게 남긴 편지.
-킬리언이 가지고 있는 향초와 전염병 치료제의 성분 분석표.
-치료를 목적으로 실험을 당한 황태자궁 시종장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증언.
-킬리언이 위다나 왕국 암시장에서 얻은 패러그린 후작의 구매 목록들.
-그 증거에 함께 엮일 황태자비궁에서 복사한 패러그린 후작의 차명 거래 내역서.
‘마지막으로 황제가 마시고 있는 꽃 차의 정체.’
이 증거들로 황태자를 실각시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케스퍼와 관련된 증거가 거의 전멸인 건 의외의 일이었다.
‘모든 증거를 모으고 보니, 대부분 패러그린 후작가와 엮여 있거든.’
패러그린 후작가의 몰락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황태자 역시 첫 번째 황후를 살해하고, 제국민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벌였으니 유배를 떠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케스퍼가 남아 있는 이상, 황태자는 어떻게 해서든 복권을 노릴 것이다.
‘이걸 노리고, 의도적으로 패러그린에게 모든 증거를 몰아준 걸까?’
거기다 분하게도 놈은 나보다 원작에 대해 많이 알고 있기에, 어떤 기상천외한 행동을 할지 몰랐다.
그러니 꽃 차 분석표와 함께 황태자와 케스퍼가 마물의 부산물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놈들을 반역죄로 몰고 가, 완벽하게 뿌리 뽑을 수 있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킬리언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그들이 마물의 부산물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를 찾아야 하죠.”
황태자가 그동안 패러그린 후작을 통해 밀수한 어마어마한 물량의 부산물. 그 부산물이 분명 대륙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황태자와 케스퍼를 옭아맬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다.
‘안타깝게도 창고에 대한 정보는 원작에 없었지만.’
이에 관한 건 킬리언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난 그를 믿고 기다려야겠지.
다만 킬리언이 목적을 잊고 잠시 집중을 흐트러트릴 때는, 그에게 조언해 바로잡아 줄 생각이었다.
“방금 버그만 후작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당신이 이번 납치 사건의 총책임자가 되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라고.”
“버그만 후작에게요?”
“그는 외무대신이라 위다나 왕국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워요.”
그 주요 인사들이 부패 세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자에겐 한없이 약한 놈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킬리언은 강자에 속하는 사람이니,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지.
내 말의 의도를 깨달은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커딜 제국을 아무리 뒤져도 그럴듯한 창고가 나오지 않아서, 이제 외국으로 시선을 돌릴 참이었어요. 특히 위다나 왕국을 중심으로요.”
“버그만 후작의 인맥을 이용하면 훨씬 수월할 거예요.”
그러니까 한눈팔지 말고, 우리의 최종 목표에 집중해.
굳이 말로 내뱉지 않아도 킬리언은 내 속뜻을 정확히 읽어 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곧 주먹을 꽉 쥐었다.
“고마워요, 벨라디. 딱 적절할 때 정신을 깨워 줬네요.”
그 인사에 얌전히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아이닝도 의지를 불태웠다.
“응! 아이닝도 킬리언을 도와서 열심히 마물의 부산물을 찾아볼게!”
상황이 이렇게 되니, 킬리언이 정령사라 참 다행이었다.
마물의 부산물에게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는 아이닝은 위장시킨 부산물을 탐지할 가장 확실한 수단이니까.
난 그런 둘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요.”
“네, 벨라디.”
“아자자!”
이렇게 셋이 각오를 다지는 사이, 식빵을 굽고 있던 타우딘이 하품을 했다.
“하~암. 이야기는 이제 끝난 거냐?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타우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쭈욱 기지개를 켜며 어슬렁어슬렁 내게 다가왔다. 난 그런 흑호를 힐끔 바라봤다.
‘타우딘 저 녀석, 분위기 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놈이군.’
“뭐지? 순간 이 몸을 업신여기는 시선이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난 건성으로 대답하며 킬리언의 마법 다이아몬드에 마력을 넣었다.
이동할 위치는 미리 봐 둔 마물의 숲 중심부.
텔레포트를 하기 전, 킬리언이 상냥하게 웃었다.
“다녀와요, 벨라디.”
“다녀올게요, 킬리언.”
그렇게 킬리언의 배웅을 받으며 마물의 숲에 도착한 것이 방금 있던 일이다.
***
데커딜 제국의 수도는 밤이었지만, 이곳은 해가 쨍한 한낮이었다.
마물의 숲은 사실 숲보다 정글과 비슷했다. 때문에 항상 고온 다습한 날씨였지만,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는 자연 친화력이 마법보다 편리하네.”
지금 난 자연 친화력으로 내 몸에 딱 맞는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간단한 체온 조절은 가능했으나 이런 습함의 정도까지는 컨트롤할 수 없었기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자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타우딘이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지. 지금 네 몸을 보호하고 있는 건 바로 이 몸의 힘이니까!”
그렇게 말한 타우딘은 사기당했다는 얼굴로 꿍얼거렸다.
“아무리 정령술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타고난 자연 친화력이 아이닝의 새끼발톱보다 적을 줄이야. 아직도 믿을 수 없다.”
정령사들은 정령과 계약하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연 친화력과 계약한 정령의 힘을 합쳐 능력을 사용했다.
그럼 나같이 친화력이 0인 사람은?
“덕분에 온전히 이 몸의 친화력만 사용하게 됐잖나!”
그렇다. 타우딘의 말처럼 내가 정령의 마법을 사용할 때면, 필요한 친화력을 전부 타우딘이 짊어지게 된 것이다.
난 원통해하는 타우딘을 보며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정령술까지 잘해 버리면 너무 인간미 없지. 이 정도가 딱 좋아.”
“하나도 좋지 않다! 결국 이 몸이 고생하는 거라고!”
“그래, 좀 더 수고해.”
“크윽! 이 몸의 첫 계약자가 이런 인간이었을 줄이야!”
타우딘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참을 투덜거렸다.
난 그런 흑호에게서 시선을 떼,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이런 여유도 오랜만이네.’
마물의 숲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타우딘 덕분에 정확한 위치를 몰라도 금방 마탑주가 머물고 있는 오두막을 발견했다.
우린 그 오두막이 잘 보이는 거리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마탑주는 저 안에서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자를 찾는 것에 지친 마탑주는 어느 순간부터 마법을 이용해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니까.’
마탑주의 괴로움은 잘 알겠으나, 그렇다고 계속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난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타우딘에게 정령의 마법을 부탁한 상황이었다.
곧 옆에 있던 타우딘이 입을 열었다.
“벨라디.”
“응.”
“준비가 끝났다.”
그 말이 들림과 동시에 타우딘이 있던 방향에서부터 무언가 오싹한 기운이 전신을 스쳤다.
난 양팔에 돋은 소름을 티 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나무 그늘에 늘어져 있었으나, 타우딘은 어느새 거대한 몸을 일으키고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창백한 인상의 소년. 난 그 소년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내 인사에 소년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나가 날 부른 거예요?]
“그래, 네 도움이 필요해.”
[전 아무런 힘도 없어요.]
“걱정하지 마. 너에게 뭘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난 그렇게 말하며 그늘에서 쓰윽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 마탑주의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그저 지금 하고 싶은 행동을 해.”
[하고 싶은 행동이요?]
“네가 정말 간절히 바라 왔던 소원이 있잖아.”
그 말에 소년 역시 내 시선을 따라 오두막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뜨며 오두막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 그런 아이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어서 가.”
내 말이 신호탄이 된 듯, 아이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그렇게 외치는 소년, 마탑주의 손자가 달릴 때마다 반투명한 몸체에 햇빛이 투과됐다. 열심히 달린 손자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멈칫거리다 그냥 쓰윽 통과해 버렸다.
난 그 장면을 보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타우딘이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물었다.
“안 따라가도 되는 거냐? 저 아이에게 원하는 바가 있어서 소환한 걸 텐데.”
“일단 해후의 시간은 줘야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두막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흐윽! 불쌍한 내 새끼!”
[할아버지!]
가만히 그걸 들으며 난 새삼 놀라운 눈으로 타우딘을 바라봤다.
“정령의 마법은 정말 경이롭네. 죽은 이도 소환할 수 있다니.”
“흥! 당연한 소리를!”
내가 네시아와는 다른 방법으로 마탑주를 손에 넣을 방법. 그건 바로, 그에게 죽은 손자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이었다.
‘타우딘이 연마해 온 정령의 마법이 망자 소환이거든.’
타우딘은 아주 잠시, 죽은 이의 영혼을 소환할 수 있었다. 특히 삶에 미련이 많아 성불하지 못한 영혼일수록 소환은 쉬웠고.
그런 면에서 저 손자는 소환이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마탑주는 결국 손자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
바꿔 말하면, 저 아이는 제대로 묻히지도 못한 채 계속 구천을 떠돌고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 남아 있는 미련이 많을 수밖에.
그렇게 비극으로 끝날 뻔했으나, 내가 몸소 서로를 만나게 해 줬으니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
“잠깐. 결국 이 마법을 수련한 것도, 죽은 영혼을 소환한 것도 다 이 몸이 수고한 일인데 왜 네가 전부 해결했다는 표정을 짓는 거지?”
어쨌든 그 타우딘을 설득해 계약한 건 나니까, 내가 한 일이라 봐도 무방했다.
난 불만스러운 눈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미는 타우딘의 이마를 쭉 밀어내며 나무 그늘에서 벗어났다.
마침 해후가 끝났는지, 오두막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걸음을 옮겨 오두막 근처로 다가가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은 마탑 특유의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노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아니, 왜 나를 보고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