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그 말에 난 표정을 지운 채, 가만히 아버지를 주시했다. 아버지 역시 이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말했던 증표를 주려고 해.”
증표?
그 말을 들은 순간, 일전에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확실한 증표를 내주세요.
-증표라고?
-감시자들에게 아버지 입으로 직접, 절 후계로 삼겠다고 공표하세요.
사실 그때 했던 말은 크게 생각하고 내뱉은 게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분풀이로,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여도 상관할 바 아니라고 여겼기에 떠오르는 대로 말한 건데…….
‘갑자기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라…….’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제가 요구한 내용과 살짝 다르네요.”
“마음을 정했으니, 굳이 단계를 나눌 필요 없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드리면요?”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룰 수 있다. 하지만 너라면, 이미 후계를 이을 모든 준비를 끝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날 향한 신뢰가 담겨져 있었다. 순수하게 앨턴가의 가주로서 내 능력을 확인했다는 눈빛.
난 입을 다물고 아버지의 제안을 곱씹었다.
‘저 말이 맞긴 해.’
임시 가주로 임명받은 후, 마법 루비와 증기 기관차를 선보이며 내 명성은 대륙으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난 성별을 떠나, 앨턴과 북부를 충분히 이끌 수 있는 재목임을 입증했지.
‘실제로 역대 그 어떤 앨턴의 소공작도 나만큼의 실적을 내지 못했거든.’
거기다 제국법을 바꾸려면, 슬슬 입장 정리를 해야 했다. 현재의 앨턴가는 후계자와 임시 가주가 나뉘면서, 서열이 뒤엉킨 상황이니까.
때문에 날 향한 호칭에도 약간의 혼선이 있던 와중이었다.
‘이런 때 아버지가 나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다시 발표하면, 여러 잡음은 확실히 정리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이 적기인 건 맞는데…….
난 아버지를 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갑자기 결심을 굳히신 계기가 있나요?”
아버지는 약간의 침묵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벨라디 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을 만큼 후회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듣자 저절로 눈이 커졌다.
“후계의 자리에 너를 세우기로 결심한 건 좀 됐어. 그런데 바보같이 꾸물거리는 바람에……. 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만약, 결심한 순간에 바로 널 후계자로 공표했으면 그 누구도 함부로 이런 일을 꾸미지 않았을 텐데……. 난 언제나 어리석고 늦구나.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진심이 스며 들어가 있었다.
그의 사과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저렇게까지 뼈저리게 자책하는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난 그걸 용납할 수 없어, 일부러 툭 말을 내뱉었다.
“많이 변하셨군요, 아버지.”
“뒤늦게나마 내 잘못을 깨달았지.”
“전부…… 네시아 때문인가요?”
내 물음에 고개 숙이고 있던 아버지가 시선을 들어, 날 바라봤다. 난 그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물었다.
“북부에서 네시아를 키우면서, 그렇게 변하신 건가요?”
“……그래.”
아버지의 입가에 살짝 온화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아이의 영향이 커. 네시아가 나에게 용기를 줬어.”
아…….
그 한마디에 아주 작게 흔들리던 감정이 소리 소문도 없이 뚝 멈추었다.
‘그래, 내가 뭘 기대한 걸까.’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전부 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가슴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부정해 주길 바랐다.
날 향한 후회와 사과가 다른 누구도 아닌 네시아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건……. 어린 시절의 날 기만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래도 참 고맙네.’
아버지의 저 한결같은 태도 덕분에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으니. 난 조금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국 진실과 그 소문이 다를 바 없었군요.”
“소문?”
아버지의 되물음에 난 친절히, 지난봄 사교계를 강타했던 소문을 읊어 주었다.
“앨턴 공작의 총애를 받으며, 친딸의 자리를 차지한 양딸.”
“뭐?”
“아버지께서 그렇게 눈물 나는 부성애로 네시아를 키우시니, 홀대받았던 친딸로서 소문을 부정할 수가 없네요.”
내 말에 아버지가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호사가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라! 내게는 네시아도 너도 둘 다 소중해!”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그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다급히 말했다.
“물론 네시아의 존재가 낯설 수 있어. 그 아이는 평범한 사람과 다르니까. 그래도 네시아는 도헤미아가 우리에게 남겨 준 선물과 같다. 너도 그걸 다 알기에 네시아를 받아들였다고….”
난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렸다.
“하하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치자, 마력으로 급조해서 만든 음성 차단막이 옅게 진동했다.
그러나 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어떻게 비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이 웃음의 의미를 눈치 못 채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웃지?”
그래도 내 기류를 읽었는지, 그의 눈빛에 얼핏 긴장이 서렸다. 난 그런 아버지를 관찰하며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제게 솔직히 말씀해 주셨으니, 저도 좀 솔직해질까 하고요.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불행이었겠지만, 제게는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내 입가에는 아까의 웃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덕분에 난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제 인생에 몇 없을 행운이었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행운이라고?”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으니 전 운이 무척 좋았어요.”
이 대답에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날 빤히 응시했다.
“어째서? 분명 넌 도헤미아를 사랑했잖아. 나완 다르게, 네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았잖아.”
하긴, 저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 이제껏 난 어머니에 대한 반감을 한 번도 표현한 적 없으니까.
그러니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어머니를 사랑하고, 예쁨받고 싶어 하는 착한 딸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본인을 거부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머니만큼은 계속 그리워한다고 여겼겠지.’
그래서 내게 네시아를 소개하는 것에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을 테고.
‘어머니의 선물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니, 참 속도 편했다. 어머니와 관련되면 저렇게 단순해지다니 말이다.
내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아버지는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서 장례식 때도 넌….”
“아버지.”
그냥 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난 간단하게 그 말허리를 잘라 냈다.
“놀라울 게 있나요? 아버지가 변한 만큼, 저도 변한 건데.”
“…….”
“이왕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한번 잘 떠올려 보세요. 제가 두 분께 등을 돌리게 된 이유를.”
“벨라디…….”
“아무리 어머니에게 맹목적인 당신이라도 눈치가 있으면 알겠죠. 알게 모르게 보고 들었던 것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난…….”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고 굳어 버렸다. 난 그런 그에게 선심 쓰듯 말했다.
“아니면 그때처럼 귀찮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 눈감으셔도 좋아요. 어차피 기대하는 것도 없으니.”
“…!”
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마력으로 만든 임시 장막을 해체했다. 그리고 동굴 바깥쪽에서 대기하고 있을 도로시에게로 향했다.
‘내가 실종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려 했는데.’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일단 밤이 늦었으니 잠시 휴식하고, 아침이 오면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시선은 내 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차마 날 붙잡지 못하고 혼자 침음할 게 눈에 선했으나,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난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
동이 트자마자 우린 동굴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어제 종일 내리던 비가 그쳐 길을 돌아갈 때는 방해받지 않았다.
난 알렉산더를 몰며, 내 앞에 탄 도로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버그만 후작 영식이 데리고 온 마법사들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텔레포트 진으로 황궁 감옥에 이송됐어요~. 거기서 본격적인 심문이 있을 거라고 들었어요~!”
“내가 먼저 그놈들을 봤어야 했는데.”
아쉽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사정을 모르다 보니, 버그만 후작 영식 입장에서는 그놈들을 황제에게 데리고 가는 게 최선이었을 테니까.
문제는 황태자의 끄나풀들이 황궁에 득실거린다는 건데…….
‘황제가 직접 심문해도 그쪽에서 마법사들을 처리할 수 있으니 안심할 수 없어.’
거기다 황태자가 이번 사건으로 받을 문책의 무게 역시 주시해야 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황제가 그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지는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또한 이 사건의 또 다른 배후인 마탑도 살펴야 했다.
‘분명 황태자도 마탑도 각종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 거야.’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다 틈을 노리고 꼬리를 자르겠지.
물론, 그렇게 놔둘 내가 아니었다.
일행은 알렉산더가 선두로 달리며 지름길로 안내한 덕에 예정보다 일찍 황실 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새벽녘이라 순찰하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별장 밖은 사람이 없었다.
난 도로시를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명했다.
“도로시, 스티아와 함께 내 짐을 챙겨.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네, 벨라디 님~!”
도로시가 신속하게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걸 보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전 텔레포트 진을 이용해 지금 수도로 돌아갈 거예요.”
아버지는 지난 대화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수도 저택으로 간다고?”
“예. 어차피 용의자들은 제 손을 떠났고, 사냥 대회도 중지된 것 같으니. 이 별장에 굳이 남아 있을 필요 없지요.”
“폐하께서 널 만나고 싶어 할 텐데.”
“납치 후유증으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전해 주세요.”
마침 난 피해자라 명분은 충분했다.
아버지는 퀭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돌아가서 푹 쉬어라. 뒤처리는 내가 하겠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