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알겠다!”
타우딘이 휙 날아가 허공에서 마법 다이아몬드를 왕 물은 후 착지했다. 그러고는 늠름하게 내 쪽으로 다가오며 우물거렸다.
“보았나! 이 몸이 다이아몬드를 잡은 모습을!”
“잘했어.”
난 타우딘의 입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내 손바닥을 보고 나서야 타우딘은 이성을 되찾았는지, ‘앗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 이 몸이 무슨 짓을!”
투욱-.
난 타우딘이 떨어트린 다이아몬드를 능숙하게 잡아채고는 입을 열었다.
“실컷 놀았지?”
“논 게 아니다! 네가 이 몸을 농락한 거지!”
“이제 삼 초 줄게. 그 안에 나와 계약할지 말지 결정해.”
“뭐, 뭣?! 나와 계약하고 싶다고 소환한 건 너면서, 왜 너한테 주도권이 있는 듯이 행동하는 거냐!”
“삼.”
내가 정말 초를 세자 타우딘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렇게 나오기냐, 인간!”
“이.”
“기다려라! 아이닝, 이 몸은 어떻게 해야 하지?!”
“계약하면 되지~!”
“다이아몬드 하나로 이 몸이 평생 지켜 온 규칙을 깨라는 거냐! 이 몸은 그러기 싫다!”
“일.”
“잠깐, 잠깐!”
타우딘이 다급히 날 멈추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비장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좋다, 계약을 해 주지.”
호랑이는 밝은 갈색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다만 다이아몬드 하나로는 안 된다. 이 몸을 만족시킬 다른 마법 보석을 내줄 수 있다면 너와 계약하겠다.”
“흠, 욕심이 많네.”
“그게 이 몸의 매력이다.”
타우딘이 도도하게 턱 끝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씨익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 나도 욕심이 많으니까.”
말을 마친 뒤, 나는 곧장 소파에 고이 놓여 있던 정령검을 들었다. 그리고 검에 장식되어 있던 마법 루비를 거침없이 뜯었다.
“그럼 이것까지 함께 줄게. 우리 가문이 발견한 마법 루비 중 가장 마력을 많이 가진 거야.”
일전에 네시아를 치료했다는 핑계로 난 정령검에 장식되어 있던 정령석을 떼어 낸 후, 빈자리를 마법 루비로 대체했다. 그러나 아직 어느 마법도 담지 않았다.
‘멜도르와 시온의 연구가 완성되면 이중 마법을 넣을 생각으로 미루고 있었거든.’
그러다 보니 이 귀한 마법 루비는 하루하루 먼지만 쌓여 가고 있었다.
마침 저 매력적인 흑호가 마법 보석을 원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루비 중 가장 귀한 것을 내줄 용의가 있었다.
내 말에 타우딘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몸은 인간이 발견한 마법 보석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리 내게 루비가 없다고 해도 그딴 건 받지 않아!”
“뭐가 문제야? 우리가 계약하면, 너한테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닌데.”
내 말에 타우딘이 성질을 내던 걸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인상을 확 찡그렸다.
“아직 계약을 한 게 아니다! 그건 궤변이야!”
“그래. 그러니까 계약을 하고 이 마법 루비를 받아. 그럼 이 루비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닌, 네 첫 계약자가 선물한 보석이 되는 거야.”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타우딘. 그저 순서를 살짝 바꿀 뿐이니까. 인간이 싫어서 다이아몬드는 물론 이 루비도 받지 않을 거면, 날 너의 계약자로 만들면 되잖아?”
내 말에 타우딘이 눈을 감고 고뇌했다. 난 잠잠해진 흑호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운을 뗐다.
“그게 아니면…….”
내가 말을 흐리자, 타우딘이 슬며시 한쪽 눈을 뜨고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면?”
“역시 바람의 정령을….”
“그만!”
드디어 결심을 내렸는지 타우딘이 우렁차게 외쳤다.
“결정했다! 영광스럽게 여겨라! 이 몸, 널 첫 계약자로 받아들이겠어!”
“잘 생각했어.”
“흐음!”
타우딘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여, 네 이름을 말해라.”
“벨라디 앨턴.”
“그래, 벨라디! 이 몸이 정말 큰 결심을 한 거다. 그러니 앞으로 극진히 모셔야 한다!”
그 말과 함께 타우딘의 아래로 동그란 모양의 소환진이 형성됐다. 동시에 내 이마에 무언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난 손을 들어 그 부분을 더듬었다.
내 행동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킬리언이 속삭였다.
“정령의 소환진이 새겨진 거예요. 곧 없어질 테니 걱정 말아요.”
킬리언의 말처럼 뜨거운 기운은 금방 사라졌다. 이마에서 손을 떼며, 난 내 몸을 이리저리 점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령과 계약했으니 무언가 변한 게 있나 확인한 거지만, 안타깝게도 평소와 별 차이점은 없었다.
잠시간 나를 지켜보고 있던 타우딘이 턱을 들어 올렸다.
“애초에 넌 자연 친화력이 거의 없었다. 이 몸의 기운을 느끼려면 며칠은 걸릴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거라!”
“흠, 그래?”
“자, 그보다 어서 다이아몬드와 루비를 다오! 이 몸은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타우딘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날 바라봤다.
난 싱긋 웃으며 다이아몬드와 루비를 휙 타우딘에게 던져 주었다. 타우딘은 황홀한 목소리로 두 개를 모두 낚아챘다.
“오오! 아름답다! 이 몸은 새로운 보석을 음미해야 하니, 필요하면 불러라!”
그렇게 말한 타우딘은 일말의 미련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과정을 모두 구경하고 있던 아이닝이 폴짝 뛰어 내게 안겼다.
“타우딘도 차암~. 모처럼 계약했으니까 조금 더 있다 가지.”
“아니, 오히려 좋아.”
애초에 난 정령과 쓸데없이 가까워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정령과의 교감이 아닌, 그 능력만 있으면 되니까.
그런 면에서 타우딘의 저 단호한 태도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원작에서 셰넌이 타우딘을 자주 언급해 다행이야.’
덕분에 타우딘의 약점은 물론, 계약자에게 줄 수 있는 능력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미리 알 수 있었어.
만족스러운 결과에 미소 지으니, 킬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벨라디, 당신의 계약이니 굳이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다이아몬드를 그렇게 사용해도 괜찮나요? 그래도 대륙에 단 세 개뿐인데.”
“처음부터 이렇게 사용할 생각이었어요.”
실제로 난 상당히 홀가분한 상태였다.
마법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귀하면 뭐 하나. 저건 꾸준히 내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골칫덩어리에 불과한데.
그렇다고 그냥 처분하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라 건드리기도 애매했고.
그런데 정령과 교섭할 때 유용하게 사용하게 됐으니, 이만큼 완벽한 상황이 어디 있단 말인가.
‘멜도르가 늦지 않게 저 다이아몬드를 넘긴 것도 다행이야.’
멜도르는 그 다이아를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착용하지도 않고 고이 모셔 두고 있었다.
슬슬 타우딘을 소환할 계획이었던 난 성인식 직전, 멜도르에게 그걸 넘길 생각이 있냐 물었고.
멜도르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네시아와 괴한의 습격을 받은 이후 결심을 내렸다.
-이 다이아몬드가 필요한 이유……. 우리 가문을 습격한 그 배후에게 되갚아 주려는 거지?
-맞아.
-……그럼 누나 마음대로 사용해. 감히 우리 가문을 노린 간 큰 놈에게 죗값을 받아 내야겠어.
멜도르는 어머니의 유품보다, 가문의 복수를 선택했다.
매번 어머니에게 목을 매달던 멜도르가 조금은 독립한 것 같아, 기특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
난 그때를 떠올리며 후후 웃다가 킬리언을 바라봤다.
“대신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다이아몬드를 빌려주실 거죠?”
내 말에 킬리언이 예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이에요, 벨라디. 원하신다면 그냥 이걸 드릴게요.”
“제게 준다고요?”
“아……. 부담스럽다면 공동 소유로 지정해도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킬리언이 뺨을 붉혔다.
난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수줍은 척 앙큼한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죠.”
그런 그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만, 지금은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난 서슴없이 킬리언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럼 이제 절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줘요. 지금쯤 내 실종으로 사냥 대회가 엉망이 됐을 테니, 슬슬 상황 정리를 해야겠어요.”
“알겠어요.”
킬리언이 마법 다이아몬드를 발동시킬 때였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아이닝이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동 소유! 데커딜 제국에서는 혈연이 아니라도 재산을 신고하면 공동 소유할 수 있다! 주로 부부가 신청한다!”
“…….”
“어때? 아이닝 인간 세상 공부 진짜 열심히 했지?!”
“아이닝, 제발 조용히 해.”
킬리언이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난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테오도르에게 지금 이 순간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이곳입니다! 이곳에서 전투의 흔적이 보입니다!”
“알렉산더가 제대로 저희를 안내한 모양입니다!”
테오도르는 부하들의 다급한 보고를 들으며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초조함과 터질 것 같은 심장이 계속 그의 이성을 헤집었다. 죄인 주제에 감히 침착해지려는 그를 벌하려는 듯이.
‘정신 차리자.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이 차가운 빗속에서 제 딸이 실종된 지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고, 어느덧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완전한 밤이 오면, 벨라디의 수색에 더욱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테오도르는 불안으로 조여 오는 가슴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모두 흩어져 벨라디를 찾아라! 무조건 찾아야 한다!”
“예!”
테오도르의 말에 앨턴가의 기사들이 급하게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도로 소식을 보냈으니, 기사단장인 브룩스 경도 곧 본격적인 수색대를 구성해 이 숲으로 올 것이다.
‘그 안에 벨라디를 찾는 게 제일 좋겠지만…….’
혹시라도… 혹시라도…….
테오도르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불길한 생각을 떨쳤다.
‘아직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싸늘한 표정으로 사냥 대회에서 야영을 하겠다 통보한 것이 벨라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바보 같은 자신은 제 자식에게 거절당하는 게 마냥 낯설고 두려워 머뭇거리기만 했고.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그 아이가 자신을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테오도르는 먼저 사과해야 했다.
아니, 최소한 벨라디 앞에서 인정해야 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아내를 말리지 않았던 자신의 과오를.
어린 제 딸에게 무심했고 상처를 줬던 지난날의 잘못을.
‘사실 그럴 기회가 수없이 있었는데.’
벨라디가 드물지만 제 앞에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당황하느라 그 귀중한 기회를 전부 놓친 것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후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