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각오를 마친 난 망설임 없이 뒤돌아 허공을 뛰었다.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협곡이었다.
휘이이이잉-!
떨어지는 순간, 엄청난 풍압이 날 덮쳤다. 거센 바람에 본능적으로 눈물이 고였지만, 난 오히려 눈에 힘을 줬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난 두 손을 치켜들고 쥐고 있던 검을 절벽에 내리꽂았다.
콰앙-!
돌에 박힌 정령검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추락하는 내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강-!
반작용으로 정령검에 의해 부서지는 돌들이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일부는 내게로 날아와, 칼날처럼 얼굴을 스쳤다.
뺨과 이마 할 것 없이 얕은 열상이 그어지는 게 느껴졌으나, 지금의 난 그것까지 막을 재간이 없었다.
그저 검의 손잡이를 놓지 않도록 손에 힘을 꽉 줄 뿐.
“크윽.”
다행히 정령 검은 절대 망가지지 않는 무적의 검이었다.
덕분에 엄청난 중력의 거스림에도 부러지거나 망가지지 않았고, 빠르게 추락하던 내 몸은 서서히 멈춰 갔다.
곧 절벽 한가운데에 가까스로 매달린 난 힐끔 아래를 내려봤다.
“후우.”
아래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만약 일이 하나라도 틀어졌다면, 내 몸은 틀림없이 저 계곡으로 떨어졌겠지.
그러나 정령검이 무사히 지지대가 되었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슬아슬했어.’
잠시 숨을 몰아쉬는데, 순간 등 뒤로 무언가가 추락하는 게 느껴졌다.
풍덩!
그걸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것들이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
거세게 내리는 비도, 세차게 흐르는 물도 나를 따라 추락한 그들의 마지막 소리를 막지 못했다.
난 차마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저들은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마물의 부작용이 오기 이전에, 나를 상대하느라 입은 부상이 그들의 운명을 앗아갈 테니까.
그러나…… 인간 된 도리로, 나는 일말의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조용히 명복을 비는 사이, 끔찍한 소리가 멈추었다.
그제야 아래를 바라보니, 난폭한 물줄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잠잠하게 바다로 흐르고 있었다.
난 침음을 삼키며 위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천운으로 절벽의 표면은 마냥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내가 기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난 한 손을 뻗어 돌을 단단히 잡고, 허공에 떠 있던 양발을 휘적여 튀어나온 부분에 올린 후 안정적으로 매달렸다.
그렇게 자세를 잡은 후, 숨을 크게 쉬었다.
‘가자.’
손에 힘을 줘, 깊숙이 박혀 있던 정령검을 꺼냈다. 그리고 휙 뻗어 그 윗부분에 박아 넣었다.
콰앙!
난 그렇게 검 한 자루에 의지해서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냥하러 와서 이렇게 클라이밍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말이야!
그나마 그동안 단련한 근육과 타고난 근력이 날 지탱했다. 난 이를 악물고 아찔한 절벽 타기를 계속했다.
내 몸이 평소처럼 쌩쌩한 상태였어도 힘든 도전이었을 텐데, 지금은 내상을 입은 상태라 힘이 배로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계속 내려 돌 표면이 미끄러웠다.
투두둑-.
“으윽!”
때마침 집었던 돌이 미끄러워 놓치고 말았다. 돌 부스러기들이 데구루루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남은 손으로 정령검을 잡고 있었기에, 저 부스러기와 같이 추락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잠시 호흡했다.
“후우-.”
‘극기 훈련이 따로 없군.’
역시 맨몸으로 벽을 오르는 건 만만치 않구나.
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가만, 안 둔다.”
다시 손을 뻗어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콱 움켜잡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정령검을 위로 꽂아 넣으며 차근차근 땅으로 향했다.
콰앙!
“퍼델 앨러만 데커딜.”
콰앙!
“케스퍼 아글라.”
콰앙!
“누가 이기나 보자고!”
콰앙!
정령검을 절벽에 박을 때마다 분노를 땔감으로 태웠다. 덕분에 난 점점 지상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역효과로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감돌고 있었지만. 무리한 바람에 속에서부터 울컥울컥 피가 올라온 탓이었다.
삼키지 못한 피가 입가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행히 내리는 비가 그 피를 닦아 주었으나, 내 몰골은 엉망일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정령검이 옅게 빛나더니, 갑자기 아이닝이 휙 튀어나왔다.
“벨라디이-! 아앗! 절벽! 높아!”
정령인 아이닝은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날 바라봤다. 그러고는 기겁했다.
“피! 벨라디, 피!”
아이닝이 어쩌다 소환됐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난 아이닝에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절벽을 오를 뿐이었다.
이런 날 보며 아이닝이 다급하게 외쳤다.
“조금만 기다려, 벨라디!”
아이닝이 서둘러 위로 날아갔다.
그렇게 잠시 후, 그 부근에서 빛이 반짝였다. 마법 다이아몬드로 텔레포트를 할 때마다 나오는 빛이었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킬리언-!”
“벨라디!”
절벽 위로 킬리언이 다급히 몸을 내밀었다. 그때 난 가까스로 고지에 다다른 상태였다.
덕분에 킬리언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뺨에 낯선 물방울이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빗방울과 다르게 온도가 따듯했다. 그걸 자각한 순간 집중력이 흐려졌고, 몸에서 힘이 훅 빠졌다.
비틀거리는 날 보며 킬리언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벨라디!”
그가 급하게 손을 뻗어 내 팔을 붙잡았다. 곧이어 강한 힘이 날 땅 위로 이끌어 올렸다.
그 힘에 기대, 난 마침내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데 내 팔을 잡은 킬리언이 그대로 날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어쩌다 이렇게 많이 다친 거예요.”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절벽을 오르느라 기력을 전부 소진한 난, 그 품에 몸을 맡기며 킬리언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물기 가득한 회색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장 치유할게요.”
그 말과 함께 일전에 느꼈던 정령의 마법이 내 몸을 휘감았다.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킬리언은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덕분에 정령의 치유 마법의 기운이 폭발하듯 내게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괜찮아질 테니까.”
난 사색이 된 킬리언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왜…….”
이 중얼거림에 날 보듬던 킬리언이 눈을 마주했다.
킬리언은 쏟아지는 빗줄기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난 내 뺨 위로 떨어졌던 눈물을 떠올리며 물었다.
“왜…… 울고 있어요?”
아프고 지친 건 난데. 왜 킬리언이 저리 힘들어하는 걸까.
내 의문에 킬리언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고는 내 머리에 얼굴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두려워서요.”
그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당신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알아서……. 하마터면 당신을 잃을까 봐.”
계속 비를 맞은 터라 몸이 무척 차가웠다. 따뜻한 킬리언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그걸 인지할 수 있었다.
난 자연스럽게 그 품에 파고들며, 킬리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알아요. 당신은 강한 사람이죠. 그러니 내가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해결했을 거야.”
“…….”
“하지만……. 하지만 난 아니에요. 난 가만히 앉아서 당신을 기다릴 수 없었어요.”
킬리언이 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약해서 미안해요. 당신을 믿지 못하고 결국 찾아온 것도.”
“킬리언.”
이쯤에서 그의 말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난 킬리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움직임에 훌쩍이던 킬리언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벨라디, 조금 더 쉬어야 해요.”
난 그런 킬리언과 눈을 마주했다.
정령의 치유 마법 덕분에 외상은 물론, 뒤틀렸던 내상까지 빠르게 회복된 상태다.
덕분에 완전히 컨디션을 되찾은 난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킬리언을 응시하다,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건 나약한 게 아니에요. 날 믿지 못한 것도 아니고.”
“베, 벨라디?”
예고 없는 내 스킨십에 킬리언의 눈이 커졌다.
난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날 걱정해 줘서.”
“아…….”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건 예상 못했는지, 킬리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어쩐지 그 모습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난 그동안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어.’
그게 마음 편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내 고집 때문에 그가 날 걱정하는 마음마저 자책할 줄은 몰랐다.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깝고, 또 마음 쓰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난 용기를 내서 킬리언의 손에 살짝 깍지를 꼈다.
“이렇게 도우러 와 준 것도 정말 고마워요. 계속 혼자였으면 막막했을 텐데……. 덕분에 큰 힘이 됐어요.”
절벽을 오르느라 아이닝에게 대답할 힘도 없었으면서, 누군가 텔레포트하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을 외쳤으니까.
난 생각보다 훨씬 더 킬리언을 의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벨라디.”
날 보는 킬리언의 눈빛이 어느새 몽롱해졌다. 어쩐지 그 시선이 기껍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잠시 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이 시간이 싫지 않아…….’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빠르게 이성을 찾은 난 킬리언의 손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잘됐어요. 이렇게 된 김에 그때 했던 계약을 이행하기로 해요.”
아쉬운 듯 내 손을 바라보던 킬리언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네, 네? 계약이요?”
그 얼빠진 되물음을 들으며 난 절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직 박혀 있는 정령검을 쑤욱 뽑았다.
“당신의 복수를 돕는 대신, 당신은 내가 정령을 소환할 수 있도록 돕기로 한 것.”
난 정령검에 묻은 돌 부스러기와 흙을 비에 씻어 내리며, 거추장스러웠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거, 지금 이행하도록 하죠.”
전생을 자각하고 나서부터 계속 노리고 있었던 정령과의 계약. 이제야 그 완벽한 타이밍이 다가왔다.
내 당당한 미소에 킬리언은 더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