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40화 (141/197)

140.

솔직히 함정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내 지도를 바라보던 버그만 영식의 눈에 탐욕이 가득했기에, 가볍게 시험해 본 것뿐이니까.

‘그런데 진짜 훔칠 줄이야.’

버그만 가문의 남매들 중 특별히 모난 인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 영식도 허세는 있을지언정, 못된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욕심이 지나쳤네.’

뭐, 그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나였어도 명예 졸업이 목전인데 라이벌의 승리가 확실시되면, 질투와 욕심이 치솟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어쩌겠어. 타이밍이 허락하지 않은 걸.’

나에게도 이번 사냥 대회는 아주 중요했다.

아니, 애초에 난 모든 평가에서 남들보다 월등한 성적을 내야 했다. 그러니 어설픈 동정과 양보는 사치스러운 일이다.

‘하여튼 버그만 영식이 스스로 약점을 쥐여 줬으니, 내가 잘 활용해야겠네.’

그렇게 후후후 웃는데, 무언가 싸한 기분이 휙 날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주변에는 나무와 풀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명, 내 몸은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중지.”

내 행동에 알렉산더는 물론 기사들도 말을 멈췄다. 뒤따라오던 기사 중 한 명이 물었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난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곧 비가 오려는지 공기는 무거웠고, 먹구름이 잔뜩 껴서 숲도 평소보다 어두웠다. 하지만 그 외 특별한 건 없었다.

‘기척도 없는데…….’

그 순간이었다.

히이이이잉!

알렉산더 역시 뭔가를 느꼈는지 거칠게 울었다. 동시에 우리 아래로 작은 마법진이 형성됐다.

“이건!”

내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훅-. 몸이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으윽.’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무는데, 사냥용 장갑 보석 중 하나에 금이 간 게 보였다. 몸의 내상을 막아 주는 특수 보호막이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이 보호막이 없었다면, 난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거란 뜻인데?

그걸 깨닫는 순간, 날 휘감는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재빠르게 고개를 드니,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보기 좋게 당했군.”

히이이잉!

내 아래에서 알렉산더가 경계하듯 울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방금까지 앨턴가의 기사들과 이동하던 길이 아닌, 전혀 다른 숲 한복판이었다.

거기서 난 익숙한 것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벨라디 앨턴이다!”

“벨라디 앨턴을 죽여라!”

앞뒤 좌우. 사방을 빽빽하게 채운 괴한들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쥐고 내게 달려들었다.

난 그나마 괴한들이 덜 밀집된 방향으로 무거운 총을 던졌다. 어차피 사냥용 총은 사람을 쏠 수 없으니, 빠르게 버리는 게 맞았다.

총 때문에 대형이 살짝 흐트러지자, 그쪽으로 빠르게 알렉산더를 몰았다.

“달려!”

히이이잉!

알렉산더가 괴한들을 넘어트리며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달렸다.

동시에 난 다른 장갑에 달려 있던 자수정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보석이 깨지며 무언가가 소환됐다. 바로, 보석에 미리 넣어 두었던 정령 검이었다.

“벨라디 앨턴을 죽여라!”

“죽여라!”

채앵, 챙! 정령 검으로 그 공격을 막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괴한들은 풀린 눈으로 시종일관 날 죽이겠다고 외쳤다. 그걸 보자 이가 아득 갈렸다.

‘케스퍼 아글라……!’

놈이 언젠가 멜도르와 네시아 때처럼 날 공격할 수 있다고 항상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정령 검을 챙겼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가을 사냥 대회를 노리다니……!’

이 대회는 황태자의 소관이다. 그러니 사고가 터지면 그도 책임을 면하기 힘들 터였다. 모두 각오하고 일을 꾸민 걸까?

‘거기다 또 희생양을 만들었어.’

조사 결과, 네시아를 덮쳤던 괴한들은 절반 정도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그 말은 즉 황태자와 케스퍼가 마물의 부산물로 평민들을 희생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의미였다.

‘전염병의 치료제로 인체 실험을 벌였던 때같이.’

그리고 지금, 놈들은 다시 한번 죄 없는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내게 쏟아지는 공격에서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을 배운 이는 아무리 세뇌당해도 기본적인 자세를 취하니까.’

이렇게 오합지졸이 아니라!

카가강-!

난 눈먼 공격들을 대번에 튕기며 앞을 주시했다. 사실 실력 면으론 위험할 게 전혀 없었다.

‘문제는 양이야.’

앞에는 전쟁을 치러도 될 정도의 군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고 빽빽하게 몰려들어 동선도 엉망이고, 심지어 이지가 없었기에 같은 편도 공격했으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걸 보며 난 혀를 찼다.

‘사람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길래 이 참상을 만드는 거야.’

괴한들의 운명이 안타까웠으나, 지금은 동정할 때가 아니었다. 공격을 막을수록 내 머리는 차가워졌다.

‘아주 작정했군.’

아무리 약한 이들이라도 저들은 마물의 부산물로 각성한 상태다. 그러니 급소를 맞고 치명상을 입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흡사 좀비처럼.

그런 놈들이 눈에 다 담기지도 않을 만큼 득실거리니, 전력 차이가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 상대했다가는 내 손해야.’

난 힐끔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날씨가 비슷한 걸 보니, 분명 서부의 숲에서 벗어난 건 아닐 텐데…….’

애초에 그런 장거리 텔레포트는 마법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이 숲은 작은 영지 하나를 뒤덮을 만큼 넓었고, 괴한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지도도 의미 없어졌어.’

그건 사냥 대회가 개최되는 부분만 그려져 있거든.

난 하늘에서 눈을 떼고 이번에는 알렉산더를 바라봤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알렉산더의 속도도 체감될 정도로 느려졌다.

아무리 명마라 해도, 오전에 곰을 잡느라 체력을 소진했으니 지금껏 버텨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거기다 알렉산더의 몸 곳곳에 상처가 나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였다.

‘더 버티다가는 위험해.’

알렉산더의 고삐를 확 잡아끄니, 달리던 말이 급정지했다. 그 틈에 난 재빠르게 내린 후, 알렉산더의 엉덩이를 때렸다.

“도망가!”

내 명령에 알렉산더가 멈칫하며 날 돌아봤다.

난 알렉산더가 달릴 방향으로 칼을 휘둘러 괴한들의 대열을 흩트렸다. 그러고 단호하게 외쳤다.

“가!”

눈치 빠른 알렉산더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앞으로 달렸다. 다행히 괴한들의 목적은 오로지 나였기에, 도망치는 말을 공격하는 놈은 없었다.

난 알렉산더가 멀어지자마자,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투명한 반구가 생성돼, 내게 딱 달라붙어 있던 괴한들을 밀쳐 냈다.

곧 내 주위로 푸른 빛을 띠는 방어막이 완성됐다.

캉-! 캉-!

“죽어! 죽어!”

“벨라디 앨턴! 죽어라!”

괴한들이 그렇게 외치며 보호막을 마구 공격했지만, 견고한 보호막은 깨질 틈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건 마법 다이아몬드의 보호막이거든.’

과거 켄뉴브 학교 폭발 사건에서 나와 모스틴, 시온을 구한 그 다이아몬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사냥 대회에 참가하려면 보호막이 설치된 마법 보석이 필수라고.

‘내가 고작 내상을 막아 주는 자수정만 챙겼을 리 없잖아?’

그래서 미리미리 멜도르에게 말해 이 다이아몬드를 챙겨 온 참이었다.

내게 상처를 준 물건이자, 어머니의 유품이라 생각하면 찜찜하기 그지없지만…….

‘이것만큼 안전한 보호 수단도 드무니까.’

물론, 이 세상에 완벽한 물건은 없었다. 이 다이아몬드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보호막의 유지 시간이었다.

‘이 숲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유지 시간은 턱없이 짧아.’

그래서 알렉산더도 일부러 놓아준 것이다. 알렉산더까지 같이 감싸면, 보호막의 크기가 커지며 유지 시간도 단축됐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해서든 그 안에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건가.’

“그래, 한번 해 보자고.”

난 이딴 곳에서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가을 사냥 대회의 우승도, 이 기습에서의 승리도 전부 차지할 거거든.

승부욕이 활활 불타오르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에 회답하듯 우중충한 하늘에서 콰과광 천둥이 울렸다.

***

나인트는 몇 번이나 스스로를 자책했다.

‘바보 같은 나인트 버그만! 어떻게 귀족으로서, 기사로서 그딴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거야!’

벨라디 앨턴의 압도적인 사냥 성적과 곰 이야기를 듣자, 나인트는 참을 수 없는 질투와 탐욕을 느꼈다.

그랬기에 벨라디가 야간 사냥을 간 틈을 타, 야영지에 잠입해 유혹하듯 놓여 있는 지도를 들고 나와 버렸다!

그 순간을 회상한 나인트가 버럭 소리쳤다.

“내가! 내가 남의 물건을 훔치다니!”

그 외침에 뒤에서 따라오던 버그만 후작가의 기사 하나가 나인트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나인트 님!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러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인트가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말했다.

“너희의 주인으로서 면목이 없다! 난 명예를 저버렸어!”

그 말에 다른 기사가 외쳤다.

“물론 나인트 님이 한밤중에 저희에게 휴식을 명하시고는 그런 일을 벌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를 인정하고 후회하시는 모습은 용감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면 앨턴가의 임시 가주님도 나인트 님을 용서해 주실 겁니다!”

그 격려에 나인트는 큰 부끄러움과 용기를 얻었다. 한순간의 욕심으로 스스로의 자긍심을 바닥으로 떨어트렸으나,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인트는 품에 넣어 둔 지도를 무겁게 여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얼른 앨턴 양을 찾자! 그리고 진실된 사과를 하는 거야!”

벨라디가 원한다면, 기꺼이 벌을 받을 각오도 끝냈다. 그런 나인트를 알기에 기사들이 응원했다.

“저희가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나인트 님!”

그렇게 그들은 부지런히 숲을 뒤졌다. 어딘가에서 열심히 사냥을 하고 있을 벨라디를 찾기 위해서였다.

‘얼른 이 후회의 지도를 돌려주고 싶은데.’

그렇게 기사들과 구석구석을 뒤지던 나인트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나인트는 그 소리에 집중하며 조용히 말을 몰았다.

그리고 곧 아주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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