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38화 (139/197)

138.

나인트 버그만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전부 눈앞에서 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스틴 프레도 때문이었다.

“난 이제 아는 게 없다니까, 다들 왜 이러는지 몰라.”

그 말에 사교계의 마당발이며, 모스틴과 나인트의 겹지인인 한 백작 영식이 입을 열었다.

“모스틴,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내가 뭘?”

“자네가 이번 내기에서 앨턴 양에게 돈을 걸었단 거 다 알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핵심 정보를 앨턴 양에게만 공유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 영식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전부 모스틴에게 은밀히 정보를 얻기 위해 왔지만, 그가 굳게 입을 다문 탓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모스틴은 그런 영식들의 야유에도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허허, 이 친구들 좀 봐. 난 말해 줬다고? 이 숲 북쪽에 토끼들이 대규모로 무리 지어 산다니까? 거기 가면 평생 만날 토끼는 전부 볼 수 있어.”

그 말에 백작 영식이 가슴을 팍팍 치더니, 모스틴에게 딱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그렇게 남들에게 다 말해 준 정보 말고. 혹시 보는 눈이 많아 그런가? 그럼 나한테만 알려 줘. 저리로 가자고, 응?”

조금 떨어져 있어 나인트가 있는 곳까지 그 말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백작 영식과 모스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백작 영식과 모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모스틴 프레도에게 얻은 정보는 전부 나인트와 공유하기로.

그러나 모스틴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그 영식의 얼굴을 쭈욱 밀었다.

“어허! 징그럽게 왜 이렇게 달라붙어? 자네 콧김이 다 느껴지잖아!”

그러더니 모스틴은 말고삐를 잡고 짓궂게 웃었다.

“이봐, 친구들! 모두 이 이상의 정보는 기대하지 마! 어차피 우승은 벨라디니까! 하하하하!”

그렇게 소리친 모스틴이 ‘오늘 저녁은 토끼로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이렇게 말하며 자기 기사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걸 본 백작 영식은 다급히 모스틴을 따라가며, 나인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틀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인트 역시 혀를 차며, 빠르게 남서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사냥 대회가 시작하자마자 벨라디가 달려간 방향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젠장!’

속에서 짜증이 확 솟았다.

벌써 넓은 숲속에는 드문드문 총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백작 영식만 믿고 있다가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나인트는 조급함을 느꼈다.

그렇게 집결지에서 멀어져 얼마나 달렸을까, 따르던 기사 중 하나가 외쳤다.

“나인트 님! 이쪽에 짐승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기사의 제보에 나인트는 서둘러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니, 멧돼지가 있던 흔적이 역력했다. 나인트는 그걸 보며,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 지금부터 집중하면 돼.’

나인트는 벨라디가 여자라는 이유로 방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앨턴가의 핏줄인 것도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동생의 주접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오빠, 말했었나? 내가 앨턴 공작가의 사격장에 초대받아서, 벨라디 양의 사격 훈련을 직관했던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했으니까 말하지 마.

-세상에, 그날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알아? 그런데 벨라디 양은 그걸 신경도 쓰지 않고 과녁 정중앙을 척척 다 맞히더라니까?

-다 아니까 말하지 말라고.

-아니, 이다음이 훨씬 중요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하인들이 갑자기 원판을 휙휙 하늘 위로 던지는 거야. 그런데 벨라디 양이 그것까지 다 맞힌 거 있지? 무려 허공에 떠다니는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연속으로!

-야, 너 지금 나 기죽이려고 일부러 그 이야기하는 거지?

-어머, 그걸 이제야 알았어? 오빠가 어떻게 벨라디 양을 이기고 우승하려고 그래? 이번 사냥 대회는 그냥 포기해!

-저게! 엘로샤 버그만! 너 일로 안 와?!

벨라디 앨턴의 열렬 추종자인 여동생은 오빠가 아닌 그녀를 응원하느라 바빴다.

물론 여동생의 응원 따위 이쪽에서 사양이지만,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벨라디 앨턴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사격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처음 참가했던 여름 친목 사냥 대회에서 곧바로 2등을 차지했다고 하고.

‘그 후로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 최근 성적은 모르겠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대임은 분명했다.

나인트는 꼭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싶었다.

후작가의 삼남이라는 애매한 위치에서 자신의 몸값을 올리려면, 사냥 대회 명예 졸업만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신이 우승하면, 가을 사냥 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앨턴이 아닌 자가 명예 졸업을 하는 것이기에, 부모님은 물론 모든 친인척까지 기대를 많이 걸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우승이다!’

그 생각과 동시에, 나인트는 수풀 근처에서 멧돼지를 발견했다.

인기척을 지운 그는 그대로 총구를 조준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알이 깔끔하게 머리를 관통했고, 멧돼지의 육중한 몸은 그대로 쓰러졌다.

기사들은 그걸 보며 작게 환호했다.

“첫 사냥감부터 멧돼지라, 시작이 좋습니다.”

“거기다 단 한 발로 잡으시다니. 대단합니다, 나인트 님.”

그 소리를 들으며 나인트의 기분도 좀 나아졌다.

‘그래, 내 실력도 만만치 않다고.’

“가자! 우승은 우리 거니까!”

“예!”

나인트는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기 위해 힘차게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열심히 방아쇠를 당겼을까?

어느새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야영에 능숙한 기사 한 명이 자리를 찾는 사이, 나인트는 잠시 휴식하기로 했다.

“후-, 목이 마르군.”

그가 무거운 총을 내려놓자, 기사가 물통을 건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나인트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종일 잡은 짐승들의 수를 세 보았다. 저번 대회 첫날의 기록은 가뿐하게 뛰어넘었으니,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나인트의 어깨가 당당하게 펴졌다.

벨라디 앨턴이 얼마나 잡았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은 모스틴 프레도의 도움 없이도 이만큼이나 성적을 올렸다.

그게 못내 자랑스러웠다.

‘저녁을 먹고, 바로 야간 사냥을 나가야겠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야영 자리를 찾으러 갔던 기사가 돌아오더니, 곧장 나인트에게 다가왔다.

“나인트 님.”

“왜 그러지? 적당한 곳이 없나?”

“그게…… 근처에서 앨턴가의 기사들을 발견했습니다.”

“앨턴가의?”

“예, 조금 더 가면 호수가 있는데, 앨턴 공작가는 그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입니다.”

나인트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그쪽으로 가자. 이 넓은 숲에서 마주친 것도 우연인데, 인사라도 해야지.”

‘그런 김에 내 자랑도 좀 하고 말이야.’

나인트는 그렇게 흐흐흐 웃으며 말에 올라탔다.

그렇게 나인트는 기사의 안내에 따라, 벨라디가 자리를 잡았다는 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저 앞에 마법 전등의 빛이 보였다. 나인트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다가가자, 곧 벨라디와 앨턴가의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저녁 식사를 끝냈는지, 주변이 조금 어수선했다.

나인트는 힐끔 그 모습을 보며, 말에서 내려 벨라디 쪽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요. 나인트 버그만입니다.”

아무리 사냥 대회라지만, 결국 귀족들의 교류와 친분을 쌓는 이벤트였다.

그렇기에 숲을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같이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벨라디 역시 접근하는 나인트를 반갑게 맞이했다.

“여기서 인사를 나누네요, 버그만 경.”

보고 있던 지도를 내려놓은 벨라디가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인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로샤 양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벨라디 앨턴입니다.”

나인트는 벨라디의 키가 큰 걸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지척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새삼 그녀와 자신의 눈높이가 같다는 걸 깨달으니, 침이 절로 삼켜졌다.

‘나도 어디서 키로 기죽은 적은 없는데.’

그러나 그는 그 생각을 잘 감추며 벨라디와 악수했다.

사실 나인트는 이렇게 영애와 악수를 한다는 것 자체도 낯설었다. 원래 악수는 남자들의 인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벨라디 앨턴의 위상은 평범한 귀족 영애와 다르지.’

무려 앨턴가의 임시 가주이자, 마법 루비의 주역이며, 증기 기관차의 주인이니까.

거기다 후작가의 삼남인 나인트가 상대하기도 힘든 정계의 고위 관리들과 교류가 잦은 사람이었다.

황제 폐하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는 소문 역시 팽배했기에, 이런 악수쯤은 그녀에게 익숙할 것이다.

‘그래, 외부에서의 입지는 인정해. 오히려 존경심도 들어.’

하지만 사냥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미 데커딜 제국을 넘어 마갈라 제국에까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벨라디와 다르게 나인트에게는 이 사냥 대회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녀에게 지기 싫었다.

“저도 이 근처에서 사냥을 했는데, 앨턴 양도 그런가 보군요. 원하시는 만큼 잡았습니까?”

나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힐끔 자기 기사들을 바라봤다.

사냥감을 정리한 상자를 벨라디에게 뽐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재빠르게 나인트의 눈빛을 읽고, 슬그머니 수레에 실은 상자를 보여 줬다.

냉장 마법과 경량 마법이 동시에 걸린 사냥 상자는 벌써 4개나 쌓여 있었다.

나인트의 콧대가 절로 높아졌다.

‘어떠냐! 내가 첫날 낮에만 이렇게 많이 잡았는데, 이길 수 있겠어?’

그런 마음이었으나, 벨라디의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분명 나인트의 상자를 봤을 터인데도 말이다.

‘과연, 고위 귀족답게 표정 관리에 능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아쉬운 일이었으나, 벨라디 앨턴에게 자랑했으니 목표는 이뤘다.

나인트가 입을 열려는데, 저 너머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차림을 보니 앨턴가의 기사였다.

그 기사는 나인트를 힐끔 보더니 벨라디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벨라디 님, 수레 하나가 가득 차 더 이상 상자를 실을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인트의 당당한 미소에 쩌저적 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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